어둠을 품은 빛
동화 속 악역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처음부터 어둠이었을까?
말레피센트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품고 있었을까. 눈의 여왕은 원래 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우리가 "악역"이라 부르는 존재들, 그들에게도 한때 울던 밤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었던 순간이, 이해받고 싶었던 눈빛이 있었을 것이다.
어둠은 나쁜 것이 아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듯, 어둠은 늘 우리 곁에 공존한다.
문제는 어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어둠을 아무도 안아주지 않았을 때 일어난다. 수용받지 못한 어둠은 점점 자라나, 어느 순간 그 사람 전체를 집어삼켜버린다. 동화 속 악역들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화"가 많은 사람이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내 안 어딘가에 늘 웅크리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한 학년에 반이 하나뿐인 작은 시골 학교. 마당이 있는 집을 내려오면 논두렁이 있고, 그 길을 건너면 학교가 나왔다.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았고, 할머니는 급식실에서 일하셨다.
나는 수줍음이 많았지만 친구들을 좋아했다. 밝을 땐 우악스럽게 웃기며 놀았고, 가라앉을 땐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 작은 교실 안에도 "끼리끼리"가 있었다. 은따에서 왕따까지, 보이지 않는 선들이 그어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선 안에 들어가는 법을 몰랐다. 아니,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혼자 남겨진 친구 편에 서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안의 "정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편들어준 친구는 결국 자신을 따돌렸던 무리에게 돌아갔고, 나만 홀로 남겨졌다.
그때의 분노와 억울함이 아직도 선명하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나서서 싸우지도 않고, 그냥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다가 혼자가 되는 구조.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가며 사회적 감각이 생기고 사춘기가 오면서 그 고통은 더 날카로워졌다.
홀로 남겨졌을 때의 부끄러움과 수치심. 나는 화장실이나 빈 교실에 숨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덮어두었다. 지우고 싶은 기억처럼.
아직도 그 문을 살짝만 두드려도 가슴이 저릿해지고 코끝이 찡해진다.
최근 "감정의 정원에서 온 편지"를 쓰면서, 나는 크락이를 떠올렸다. 분노를 상징하는, 뾰족하고 붉은 그 존재.
나는 크락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었을까. 돌아보니, 내 안에 지켜야 할 원칙이 너무 뚜렷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원칙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방임될 때, 나는 깊은 고립감을 느꼈다. 어린 나에게 그 고립감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어둠이었다.
하지만 그 어둠이 나쁜 것이었을까?
아니다. 그건 나를 지키려는 마음이었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보호막이었다. 다만 아무도 그 어둠을 알아봐주지 않았을 뿐.
동화는 권선징악을 말한다고들 한다. 선이 이기고 악이 지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읽는다.
동화의 결말은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얼어붙은 심장이 녹고, 저주가 풀리고, 잃어버렸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그건 어둠을 없애는 게 아니라, 어둠마저 품어서 온전해지는 이야기다.
우리 안에도 어둠은 있다. 그건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안의 조각조각을 완벽하지 않은, 날카로운 유리조각 같은 기억들까지 왜곡하거나 방임하지 않고 품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어린 날의 나에게, 뒤늦게라도 말해주고 싶다. 아니, 죽을 때까지 매 순간 해야하는 일인지 모른다.
"네 안의 어둠은 틀린 게 아니야. 그냥 아직 아무도 안아주지 않았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