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안의 이야기
— 지안의 이야기 _공허
지안은 스물여덟 살이었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좋은 대학. 대기업. 강남 자취. 인스타그램에는 카페 사진과 여행 사진. 친구들이 “잘 살고 있구나”라고 댓글을 달았다. 지안은 하트를 눌렀다.
아무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지안은 매일 밤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잠이 오는데 자고 싶지 않아서. 자면 아침이 오고, 아침이 오면 또 괜찮은 척해야 하니까.
공허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다. 지안의 하루는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지안은 없었다. 모든 것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느낌.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아무도 없는 느낌.
지안은 가끔 자기 얼굴을 만져보았다. 있는지 확인하려고.
유리온실은 자취방 베란다에 나타났다. 빨래건조대 뒤에 유리문이 하나 있었다. 안이 보였다. 작은 온실. 풀들과 이슬빛과 화분 위의 셀리.
지안은 들어갔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야 했지만, 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유리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안쪽에서. 지안의 공허가 온실의 온도를 빼앗는 것이었다. 이슬빛이 희미해지고, 셀리의 잎 끝이 하얗게 변했다. 동상처럼.
지안은 생각했다. 아, 나는 이것도 시들게 하는구나.
온실을 나왔다.
일주일 뒤 유리문 너머로 셀리가 보였다. 잎이 두 장으로 줄어 있었다. 나머지도 끝이 하얗고 축 처져 있었다.
지안은 문을 열지 않았다. 유리문에 이마를 대고 한참 서 있었다.
“미안해.”
왜 미안한지 몰랐다. 하지만 그 외에 미안하다고 할 곳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잘하고, 친구들에게는 괜찮은 척하고, 부모님에게는 걱정 끼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셀리에게만 말할 수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한 달 뒤 지안이 온실에 들어갔다. 승진에서 떨어진 날.
셀리가 잎 한 장으로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 잎. 온실 안의 풀들은 대부분 시들어 있었고, 유리벽에 서리가 두껍게 끼어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지안은 화분 앞에 앉았다. 셀리의 마지막 잎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짜로 무언가를 느꼈다.
무서움.
이 잎마저 시들면. 그러면 나한테는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잖아.
“죽지 마.”
셀리에게 하는 말이면서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 안에 마지막 남은 무언가야, 죽지 마.
지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공허한 사람의 첫 번째 눈물.
눈물은 차가웠다. 따뜻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이었다. 화분의 흙에 떨어졌다. 비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며들었다.
셀리의 마지막 잎에서 하얗던 끝이 아주 미세하게 초록으로 돌아왔다.
1밀리미터.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변화.
하지만 지안은 보았다. 공허한 사람은 미세한 것을 잘 본다. 모든 것이 비어 있으니까, 작은 변화가 크게 보이는 것이다.
지안은 그 1밀리미터의 초록을 보며 한참을 울었다.
그 뒤 지안은 매일 들어가지는 않았다. 매일 들어가면 온실이 얼었으니까.
대신 유리문 앞에 섰다. 매일 밤. 셀리의 잎을 확인했다. 살아 있는지. 초록이 남아 있는지.
가끔 문을 열고 손만 넣었다. 셀리의 잎에 손끝만 닿게. 오래 머물면 온실이 얼으니까, 잠깐만. 손끝이 닿는 동안에만 공허가 잠깐 물러나고, 그 자리에 미세한 무언가가 차올랐다.
지안은 그것을 조금씩 모았다. 매일 밤, 손끝만큼의 무언가를.
한 달이 지나자 오 분은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서리가 끼는 속도가 느려졌다.
셀리의 잎이 다시 두 장이 되었다. 새 잎은 약간 푸르스름한 초록. 서리를 견딘 식물만 가지는 색. 작고, 두껍고, 단단했다.
“너 강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되려나.
어느 날 밤, 온실 안에서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자기 프로필. 카페 사진, 웃는 사진. 다 지안인데 하나도 지안이 아니었다.
유리벽을 보았다. 서리가 끼어 있었지만, 닦으면 투명한 유리가 드러났다. 안이 보이고 밖이 보이는 유리.
지안은 서리를 닦기 시작했다. 손이 차가웠지만 멈추지 않았다.
“보여야 하잖아. 안에 있는 게 밖에 보여야 하잖아.”
서리를 닦은 자리마다 결정 무늬가 남았다. 얼어붙었다가 녹은 자리에만 생기는 무늬.
“예쁘네.”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혼자 “예쁘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셀리의 잎이 지안을 향해 아주 살짝 기울었다.
지안은 셀리에게 이름을 짓지 않았다. 아직은. 이름을 지으려면 그 존재를 알아야 하고, 지안은 셀리를 아직 잘 모르겠었다. 자기가 무엇인지도.
하지만 모르는 채로 함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공허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매일 밤 손끝만큼의 무언가를 모으면 언젠가 온실에 봄이 올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