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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탄호 Oct 16. 2021

150년 전통의 종이 공방 : 치쿠젠 아키즈키 와시쇼

치쿠젠 아키즈키 와시쇼(筑前秋月和紙処). 사무라이 집안에서 만든 전통 종






일본의 오래된 상점 : 후쿠오카현 아사쿠라시 아키즈키 마을 치쿠젠 아키즈키 와시쇼(筑前秋月和紙処)


후쿠오카시 남동부, 아사쿠라 시(朝倉市) 외각에 자리한 아키즈키(秋月)마을. 낡은 성터를 중심으로 옛 상가 건축이 이어진 동네 한복판에는 창업 이래 150년의 전통을 잇는 화지(和紙・일본 전통 종이) 공방, 치쿠젠 아키즈키 와시쇼(筑前秋月和紙処)가 있다.










펄프 종이의 보급으로 많은 화지 공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와중에도 꿋꿋이 명맥을 잇는 치쿠젠 아키즈키 와시쇼를 찾은 건 매화가 움튼 3월 초. 은은히 퍼지는 매화 향을 따라 고즈넉한 마을 중심가 옆으로 난 골목으로 진입하자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건물 하나가 등장했다.






박:여기구나.





수많은 손길에 닳고 단 출입문을 열자 알록달록한 화지와 예쁜 조명, 아기자기한 그림이 새겨진 엽서로 가득한 공간이 나왔다.









박 : 실례합니다.




긴장된 목소리로 인기척을 내자 뒤편 작업장에서 ‘네!’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방 4대 장인인 이노우에 켄지(井上 堅治)씨다. 이른 아침부터 종이 만들기 작업에 전념한 탓인지 그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이노우에 : 안녕하세요. 기타큐슈에서 온 박상 이신가요? 미안해요. 아침부터 작업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오신 줄도 몰랐어요. 이른 아침부터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죠? 제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해서 낮만 되면 코가 막혀요. 그래서 컨디션 좋은 아침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아침 일찍 취재를 부탁드렸어요. 양해 부탁드릴게요.





박 : 아닙니다. 이렇게 시간 내주신 것만으로 너무 감사드려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노우에 :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박상 바로 작업장으로 갑시다. 이 문만 열면 바로 나와요.'










문을 열자 '삐거덕'하는 소리와 함께 큼직한 작업장이 등장했다.

 



이노우에 : 좀 허름하죠? 지난 150년간, 원료 추출부터 건조까지 모든 공정을 여기서 했어요. 저와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버지까지. 4대의 손 때가 묻은 곳입니다.









치쿠젠 아키즈키 와시쇼(筑前秋月和紙処)의 역사




작업실 중앙으로 이동한 이노우에씨는 도구 하나를 집어 들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노우에 : 저희 집안은 원래 아키즈키 번(영주)을 모시던 무사 가문이었어요. 그런데 19세기 중반, 막번 체제가 폐지되면서 많은 무사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막번 체제 : 에도 시대 일본 사회를 지탱한 '체제'로 열도 전역을 다스린 에도 막부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세한 영주(번)를 일컬어 막번 체제 라 불렀다.




이노우에 : 하루아침에 생계가 끊기자 많은 무사들이 들고일어났어요. 저희 증조할아버지도 그중 한 명이었고요. 시위가 격화하자 위기를 감지한 정부는 자구책을 마련했어요.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전국 각지의 무사 마을에 각종 산업 기술을 전수한 것이죠. 이러한 움직임 하에 저희 마을에는 ‘화지 제조술’이 소개되었어요.




이미 많은 지역을 여행하신 만큼 역사나 지리는 빠삭하실 텐데 야메(八女)라고 해서, 아사쿠라 시와 이웃한 소도시가 있어요. 예로부터 각종 가내 수공업이 발달했던 그 동네의 대표 상품이 화지였어요.




때문에 신 정부 관료(메이지 시대, 1868-1912)들은 야메 마을의 화지 기술자들을 저희 마을에 파견해 기술을 전파하도록 했어요. 이후 이들에게 제조법을 배운 무사 집안사람들이 하나 둘 공방을 차렸고, 얼마 안가 화지는 마을을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죠.




지금은 저희 가게밖에 안 남았지만 한창때만 해도 마을 내에 20곳 넘는 공방이 존재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공방이 많다한들 기술력이 좋지 못하니 수 백 년간 종이를 만들어 온 야메 지역과 경쟁이 안 됐죠.




그리하여 아키즈키 마을의 화지 공방들은 일반 화지와 더불어 모토유이(元結い*상투를 틀 때 쓰는 머리끈) 생산에 주력했습니다. 틈새시장을 노린 거죠.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어요. 서구화로 인해 일반 사람들이 상투 틀 일이 없어졌거든요. 게다가 펄프로 만든 종이가 대중화하면서 ‘출판 업계’로부터도 외면받으며 판로를 잃었죠. 아니 완전 설자리를 잃었어요. 그 결과 하나 둘 문을 닫더니 이제는 저희 공방만 남았네요. 솔직히 저희도 얼마나 갈지 모르겠고요.









다소 무거운 이야기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노우에 : 박상, 여러 전통 공방을 방문해 보셨을 테니 아실 겁니다. 가내 수공업이라는 게 돈이 안 되는 일이라는 걸요. 제가 올해로 가업을 이은지 21년 째인데 비수기에는 직장인 시절 손에 쥐던 월급보다 적은 돈으로 먹고살아요.





게다가 펄프 종이 사용량과 대비되는 화지의 수요 감소로 생산량도 급격히 감소했어요. 십수 년 전만 해도 월 몇 천 장은 생산했는데 지금은 500장 남짓 만드는 게 고작이에요. 솔직히 이것 가지고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요. 그래서  몇 해 전부터는 인테리어 벽지나 화지 조명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동시에 화지 체험 교실도 운영하고 있고요. 이렇게 아등바등해야 겨우 저희 세 가족 풀칠할 만큼 벌어요. 때문에 큰 재물을 바라는 이들에게 '화지 만드는 일'을 추천하지 않아요.





그래도 이것저것 시도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요 근래 들어 사정이 좀 나아지긴 했어요. 특히 저희가 만든 화지 조명이 인테리어 업계에서 화제를 모으며 주문량이 많이 늘었어요. 여기에 규슈에서 몇 안 되는 '전통 화지 체험 공방'이라는 입소문도 나면서 주기적으로 여행객도 많이 찾아오고요. 오래오래 가업과 전통을 잇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죠.





그리고 이러한 관심에 힘 입어 몇 차례 방송에 출연도 하고 재미있는 경험도 많이 했답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마을 지키는 일도 했고... 그리고 몇 해 전부터 정기적으로 마을을 찾는 부경 대학교 학생들과 교류하며 좋은 추억도 쌓았어요. 작년에는 부경대 학생 두 명이 저희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굉장히 좋은 경험을 했어요. 올해도 별 일이 없으면 학생들이 우리 마을에 들를 텐데 이번에는 또 어떤 추억을 만들어 나갈지 벌써부터 기대가 돼요.  





물과 닥풀을 섞는 중



홈스테이 이야기에 미소를 되찾은 이노우에 씨는 화제를 바꾸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노우에 : ‘박상, 자 그럼 지금부터 직접 화지를 한 번 만들어봅시다. 앞서 제가 아키즈키 화지로 모토 유이를 만든다 말씀드렸죠? 즉 머리끈이라는 질기고 탄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원료 수집부터 완성까지 복잡한 공정을 거칩니다.




수조에 물과 닥풀을 넣은 후 '마세'로 이를 섞고 있는 이노우에 씨





화지 만드는 과정



크게 세 가지 공정 (1. 원료 수집 및 처리 – 2. 원료 가공 – 3. 종이 뜨기)으로 구분하며 세부적으로는 13-15개 과정을 거친다.



1. 11월부터 12월 경에 원료 (닥나무) 채집

2. 가마솥에서 닥나무 가지 찌기

3. 쪄낸 가지의 껍질을 벗긴 후 남은 껍질 깨끗이 긁어내기

4. 건조하기

5. 흐르는 물에 씻어내기

6. 겉껍질을 벗겨낸 후 속 껍질만 남기기

7. 2~3시간가량 속 껍질(白皮,시로가와) 찌기

8. 흐르는 물에 24시간가량 씻어내기

9. 줄기 마디, 잔 줄기 등 깨끗하게 쳐내기

10. 방망이질

11. 방망이로 잘 두들긴 섬유를 스키후네(漉き舟, 나무 수조)에 넣어 물과 닥풀을 섞는다. 그리고 마세라고 하는, 빗살을 닮은 도구로 잘 섞어 낸다.

12. 스게타(簀桁, 종이를 뜨는 목재 도구) 로 종이 뜨기(紙漉き, 종이 뜨는 작업을 카미스키 라 부른다.)

13. 잘 떠낸 종이에서 물기를 제거한 다음 건조






스게타를 흔들며 종이를 뜨는 중




이노우에 : 시간 관계상 오늘은 종이 섞어 내기와 종이 뜨기 공정만 해볼게요. 처음에는 조금 어려울지도 몰라요. 그래도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 테니 괜찮을 겁니다 자 그럼 한 번 해 봅시다.






간단히 설명을 들은 후 두 팔을 걷어 종이 만들기에 나섰다. 물풀로 가득한 스키후네(나무 수조)에 묵직한 스게타(簀桁)를 넣어 양쪽으로 휘저었다.





박 : 우와, 무겁다. 이노우에 씨께서 하시는 걸 볼 때는 쉬울 줄 알았는데 막상 해 보니 굉장히 묵직하네요?







이노우에 : 그렇죠? 종이 뜨기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에요. 물풀이 잘 스며들지 않으면 좋은 종이를 못 만들어요. 힘으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리듬을 타야 한다는 말인데 무슨 말인지 잘 안 와 닫죠? 처음에는 다 그래요.





일단 스게타를 좌우로 30회가량 흔들면서 찰랑찰랑, 물이 넘칠 듯 말 듯 적당선을 지키면서 움직여 봅시다.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오오 좋다. 지금 잘하고 있어요.





그의 격려에 힘입어 요령껏 스게타를 움직였다. 양쪽으로 흔드는 횟수가 늘면서 서서히 결실이 드러났다. 스게타 위로 물풀을 머금은 습지(젖은 종이)가 수북하게 쌓였다. 이후 이를 건조장으로 옮겼다.










이노우에 : 자, 여기 나무 판에 습지를 한 장 한 장 겹쳐 볼게요. 각각의 나무판에 겹친 습지는 24시간 동안 방치하는데 그 사이에 수분이 아래로 떨어져요. 그리고 다음 날, 어느 정도 마른 종이를 압축기에 놓고 힘을 넣으면 나머지 수분도 탈수되는 거죠. 그다음 별도의 건조 작업을 거쳐 종이를 완성합니다. 오늘 만든 건 완성하는 대로 댁에 보내 드릴게요.










이노우에 : 아 참, 그리고 저희 공방에서 만드는 화지 사이즈는 기본 39cm X 53cm예요.  B4 용지 두 장 크기라 보면 돼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사이즈로 매달 500장가량의 화지를 생산해 엽서, 서예 용지, 수첩, 조명 도구 등으로 활용해요. 아, 전통 가옥의 벽지나 문창지로도 쓰고요.




상황이 되면 1부터 10까지 모든 공정 과정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저희 일이라는 게 하루 만에 끝나는 게 아니라서 이렇게 부분적으로만 공개하네요. 너무 아쉽습니다.





옅은 미소를 띤 채 완성된 종이를 들어 보이는 그를 향해 질문 하나를 던졌다.




박 : 앞서 말씀하시길 가업을 물려받기 전에는 일반 기업에 다니셨다고 하셨는데, 일을 포기하고 가업을 잇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세요?’





이노우에 : 글쎄요. 뭐 그리 대단한 사명감은 없었어요. 가업이니까,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가 하던 일을 내가 물려받을 때가 됐다. 라 생각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였죠. 딱 그 정도였어요.





다만 저희 딸아이가 저처럼 거부감 없이 이 일을 물려받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도 본인이 싫다고 하면 억지로 권하고 싶지 않고요. 올해로 15살이 되었는데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억지로 돈 안 되고 힘들기만 가업을 물려받아 고생하는 것보다는 본인이 하고자 하는 분야로 나갔으면 하는 마음... 산에 올라가 닥나무를 채집하고, 추위에 부르튼 손으로 작업하면서 1년 내내 공방에 매여 있는 게 선뜻 추천할 일은 아니니까요. 허허허.




그렇게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공방에서의 일정을 마쳤다.




이노우에 : 박상, 오늘 이렇게 먼 걸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상이 하고자 하는 일 모두 다 잘 되길 응원할게요. 그리고 모처럼 먼 동네까지 와 주셨는데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노포 한 곳을 소개해 드릴게요. 저희 공방에서 7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일본 유일의 ‘민물 김’ 공방이에요. 엔도 사장님이라는 분이 운영하는 곳인데 그분께는 제가 연락해 놓을 테니 한 번 가 보세요. 그리고 다음번에도 저희 공방에 들러 주시고, 많은 분들께도 홍보 부탁드릴게요. 늘 건강하시고요. 오늘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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