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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탄호 Oct 24. 2021

조선인 도공의 발자취가 남은 도자기 공방 겐에몬가마

창업 260년, 생활 자기를 빚는 도자기 공방 겐에몬가마(源右衛門窯)

이즈미야마 






임진왜란 이후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납치됐다. 피로인(被虜人)이라 불리는 이들 중에는 남부 지방에 살던 도공(陶工)이 상당수 포함됐다. 이들은 참전(参戦)한 영주들의 영지로 끌려갔는데 이중에는 이삼평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오늘날 일본 도자기의 아버지이자 아리타 마을의 신으로 추앙받는 그는 나베시마(오늘날 사가현) 영주로부터 ‘백자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아 도자기 원료인 백자석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1616년, 고생 끝에 아리타 이즈미야마(有田泉山)에서 양질의 백자를 발견했다. 이후 그가 식솔을 이끌고 아리타에 정착한 것을 계기로 다른 도공들도 하나 둘 아리타에 건너와 가마를 세웠다. 이렇게 형성된 마을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상류층 사이에서 귀한 사치품 대접을 받은 한편, 나가사키 데지마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이렇듯 지난 400년, 일본 도자기 문화 융성에 이바지한 이 고장은 오늘날에도 일본 제1의 도자기 마을이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걸맞게 마을 곳곳에는 유서 깊은 도자기 공방이 여럿 남았다. 이중 마을 3대 도자기 공방으로 알려진 겐에몬가마(源右衛門窯)에 방문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도자기 



기밀 유출 방지를 이유로 공방 취재에 난항을 겪다 아리타 관광 협회 야마구치 씨에게 도움을 받아 겐에몬가마(源右衛門窯)를 취재하게 되었다. 마을 외각에 자리한 아리타 도자기 단지(有田陶磁の里プラザ) 근처에 있는 공방은 창업(1753년) 이래로 260여 년간 담백한 생활 자기를 빚어 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가네코 쇼지(金子昌司) 대표를 필두로 60명 넘는 직원이 도자기를 빚고 있다. 




가네코 대표님은 아리타 도자기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분으로 홈페이지에는 그가 쓴 도자기 관련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아리타야키는 크게 3가지 양식으로 나눈다. 먼저 부드러운 유백색 자기에 붉은 유약으로 그림을 그려 넣은 한편, 여백의 미를 추구한 가키에몬 양식(柿右衛門様式)과 에도 막부에 바치기 위해 나베시마 영주의 전용 가마에서 생산하며, 고급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반점 하나 없는 깨끗한 표면과 정교한 그림을 그려 넣은 나베시마 양식(鍋島様式)、앞서 언급한 두 가지 양식이 등장하기 전 아리타에서 생산한 모든 도자기를 칭하는 한편 흰 표면에 푸른 계열 유약으로 그림을 넣은 고 이마리 양식(古伊万里様式). 이 세 양식이 일본 도자기 문화를 지탱한다. 




특히 고 이마리 양식은 유럽 도자기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초, 명나라의 멸망으로 세계 최대 도자기 생산지였던 경덕진이 폐쇄됐다. 하루아침에 도자기 시장을 잃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새로운 시장개척에 나서다 일본에 주목했다. 당시 일본에는 조선에서 끌고 온 도공들이 전국 각지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어 이들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상인들은 도자기 마을이 형성된 아리타에 대형 발주를 하게 된다. 이때 생산된 도자기들은 이마리(伊万里)에서 선적되었다 해서 이마리야키(伊万里焼・이마리 도자기)라 불렀고 유럽 사회에 건너가 왕실과 귀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중 독일 작센 주의 선제후(選帝侯)이자 훗날 폴란드 왕에 등극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산 도자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큰돈을 들여 이마리야키 수집에 열 올렸고, 이후 가신들에게 일본산 도자기와 같은 복제품을 만들 것을 지시한다.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복제품 생산에 성공한 아우구스투스 1세는 영지에서 30km 떨어진 지역에 도자기 공방을 세우는데 이곳이 훗날 유럽 도자기 문화를 선도한 마이센이다. 




이렇듯 유럽 도자기 문화에 일정 영향을 미친 고 이마리 양식은 18세기에 이르러 식기 및 생활 자기를 빚는 데 널리 활용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맞춰 탄생한 겐에몬가마. 흰 벽과 검은 기와가 조화를 이룬 작업장 건물 위로 빨간 벽돌로 둘러친 굴뚝이 우뚝 선 건물 입구에서 가네코 대표님과 후지 부장님과 인사를 나눴다. 




가네코 : 어서 와요. 대표직을 맡고 있는 가네코라고 합니다. 이쪽은 영업 담당인 후지 부장이고요. 야마구치 씨로부터 박상이 ‘도자기 이야기와 더불어 ‘장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어서 저희 둘이 함께 나왔습니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죠.’ 




긴 백발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대표님의 안내를 받아 전시실로 들어가자 담백한 표면 위로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도자기가 눈에 들어왔다. 







사라져 가던 아리타 고 이마리 양식에 생명을 불어넣다. 



박 : 대표님, 홈페이지에 게재된 정보에 따르면 겐에몬가마에서는 고 이마리 양식으로 생활 자기를 빚는다고 하는데 어떤 계기로 고 이마리 양식을 채택했고, 또 이를 계승함에 있어 어떤 노력을 해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가네코 : 16세기,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도공에 의해 일본도 도자기 생산능력을 갖춥니다. 아리타에서 생산한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는 한편, 막부 일가와 귀족들에게 헌상되는 등 사치품으로서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안정된 국내 정세를 토대로 서민 경제가 성장, 이후 상인들과 여유가 있는 서민들도 도자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일본의 음식 문화’도 함께 발전하는데요. 상류층을 중심으로 예쁜 도자기에 음식을 담아 먹는 게 유행했습니다. 일본 음식은 눈과 마음으로 먹는다고 하지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저희 가마(공방)는 담백한 표면 위에 멋스러운 그림을 그려 넣은 고 이마리 양식으로 '음식을 예쁘게 담기에 최적'인 생활 자기를 생산했습니다. 




그런데 1828년, 아리타 마을에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장인들이 타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하루아침에 공방과 기술자가 사라지자 ‘고 이마리 양식’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습니다. 기술이 단절되거나 한 건 아니고 주류에서 벗어났다 보시면 됩니다. 그러다 1970년, 6대 후계자인 타테바야시 겐에몬(舘林 源右衛門・역대 후계자들은 겐에몬’이라는 이름을 물려받는다.)이 유럽 시찰 중에 17-18세기에 일본에서 빚은 고이마리 양식 도자기를 접하게 됩니다. 이후 아리타에 돌아온 그는 옛 기술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시행착오 끝에 옛날 기법 그대로의 ‘고이마리 양식’을 재연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고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작업장을 개방했습니다.  



박 : 한때 단절될 뻔한 기법을 재연하기까지 많은 고생이 따랐을 거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술 보안에 더욱 신경 쓸 법도 한데  어째서 일반 여행객들에게 작업장을 공개하시나요?








가네코 :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공방은 생활 자기를 생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도자기라 하면 굉장히 비싸고 예술성 높은 사치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매스컴에서 보도하는 아리타 도자기들은 점 당 수백만 엔, 수 천만 엔을 호가하다 보니...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는 생활 자기를 판매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저희는 생존을 위해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한편 친숙함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때문에 도자기를 생산하는 전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누구나 구입 가능한 예쁜 도자기'라는 친밀감을 전하고자 합니다.  







도자기 = 철저한 분업 



박 : 그러시군요. 아직 작업장을 보진 못했지만 대표님의 설명 덕에 도자기를 한층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두터운 책임감을 갖고 한 점 한 점 빚으시구나...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대표님, 작업장 공개 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도자기 생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가네코 : 기술이다, 양식이다, 장인정신이다. 이런 뻔한 이야기는 원치 않으시겠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분업입니다. 이삼평 도공이 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로 아리타 도자기는 예술품이 아닌, 제품에 가까웠습니다. 그도 그럴 게 에도 시대, 이 지역을 다스린 나베시마 영주에 있어 도자기 산업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당시 에도 막부는 지역 영주들의 ‘조세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참근 교대제라 해서 영주들이 정기적으로 영지와 에도(도쿄)를 오가도록 하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영주들은 이동과 에도 체제에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발생한 경제난을 타개하고자 나베시마 영주는 도자기 산업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유럽으로 건너간 도자기들도 지금에서야 ‘예술품’으로 대접받지 예전에는 유럽인들이 좋아할 만한, 혹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제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저희 공방 또한 그렇습니다. 저희는 예술품이 아닌, 생활 자기를 만드는 곳입니다. 따라서 고객들이 좋아하는 동시에 시대상에 맞는 제품을 빚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철저한 분업이 필수입니다. 먼저, 여기 있는 후지 부장이 소비자들의 욕구와 트렌드를 조사해 저에게 알려 줍니다. 그러면 제가 이를 반영한 도자기 디자인을 고안하고, 이후 공방 내 직원들이 규격에 맞는 도자기를 빚습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순간에도 건너편 공방에서는 굽고, 말리고, 그리고 하는 분업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저희 공방에 취업했다가 상처만 받고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처라 함은?’ 




가네코 : 제가 계속 ‘저희는 생활 자기를 만드는 곳입니다.’라 강조하고 있지요? 이 말인즉 우리 가게가 예술품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간혹 예술적 가치에 뜻을 두고 입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분명 면접 시에 ‘우리는 생활 자기를 만드는 곳으로 철저한 분업을 통해 도공들은 본인이 맡은 일만 하며,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꾸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들어왔다가 상처만 받고 나가시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합니다. 예술가라고 하는 예쁜 꿈을 짓밟는 듯하여 미안하긴 하지만 우리 공방의 최고 가치는 '이익과 생존'입니다. 이를 위해 도공들끼리 협력해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드는 것만을 생각하고요. 




박 : 그러시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오늘 공방에 오기 전까지 도자기를 예술품의 영역으로만 바라봤어요. 보통 아리타 도자기라 하면 예술적인 가치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때문에 대표님께서 ‘우리는 생활 자기를 빚는 곳이지 예술품을 만드는 가게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해 주실 때 조금 충격을 받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이문을 내고 살아남는 것'이 전통을 잇는 동시에 가게가 생존하는 것이니 도공들의 철저한 분업을 통해 ‘작품’이 아닌 ‘상품’을 빚으려 한다.라는 경영방침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럴 경우 직원을 구함에 있어 조금 어려움은 있을 듯합니다. 




가네코 : 어이쿠,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제가 박상을 놀라게 했군요. 절대 그럴 의도는 없었으니 너그럽게 이해해줘요. 허허허,,, 그리고 직원 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2018년까지 마을 내에 현립 아리타 요업 대학(佐賀県立窯業大学)이 있었습니다. 학교가 폐교되기 전에는 이곳에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공방에 취업하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두 해 전,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분업의 가치'를 알려주는 곳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일본 내 대학에 개설된 상당수 도예 관련 학부는 ‘예술품’을 빚는 걸 목표로 하기에 거기서 정규 교육을 받고 취업활동을 하려는 학생들이 저희 공방에 지원했다가 ‘분업’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술’과 ‘생존’는 다른 영역이거든요. 저희에게는 무엇보다도 ‘생존’이 중요하기에 앞으로도 이러한 방침을 고수할 예정입니다. 





따라서 ‘분업’에 대한 이해도가 깊고, 길게 한 가지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역사와 업무 내용을 이해해주는 직원들이 들어와 줘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명맥을 이어나가리라 믿습니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 해주고 있으니 저 또한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도자기 고안에 힘 기울여야겠지요. 






생활 자기를 빚는 예술을 합니다. 



가네코 : 말이 나왔으니 건너편 작업장에 가 봅시다. 저희 공방은 전 과정을 공개하고 있으니 원하는 만큼 사진을 찍으셔도 되고,  작업을 구경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를 따라 들어간 작업장에는 열 명 가량 되는 도공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인기척에도 흔들림 없이 맡은 일을 하는 프로들의 뒷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가네코 대표가 말했다. 




가네코 : 제가 오늘 '분업'과 '생활자기'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만 달리 보면 '분업' 또한 예술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여기 있는 후지 부장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 공방이 관현악단이라면 제가 지휘자고 여기 있는 직원들은 악기를 든 연주자라고...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선율이 울리듯 저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 직원들이 도자기를 빚는 과정이 흡사 예술과 같다고... 그런 의미에서 오래오래 직원들과 호흡을 맞춰 좋은 곡(생활자기)을 연주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사랑받는 도자기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반성 



아는만큼 질문이 가능하기에 취재 일주일 전부터 나름 자료도 뒤지고 책도 읽으면서 인터뷰 내용을 짠다. 그런데 이번 취재를 통해 "장인과 오래된 가게에 있어 '생존의 영역'을 예술적 가치로만 여기고 다가가진 않았나"라는 자기 반성을 하게됐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장인의 입장과 공방의 존재 목적을 우선 생각한 다음보다 심층적인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공방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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