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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탄호 Oct 21. 2021

8대째 제등, 이토 곤지로 상점 제등 공방

힙합 쏘울 가득한 젊은 장인이 있는 제등 공방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중국에서 제등(提灯)이 들어왔다. 이후 1230년 7월 14일, 교토에서는 정령((精靈)을 맞이하기 위해 높은 곳에 제등을 달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추석에 해당하는 오봉(お盆) 기간이 되면 처마와 불단, 묘지 등에 제등을 매달았고, 오봉에 다는 등이라 해서 봉쵸칭(盆提灯・일본어로 제등이 ‘쵸칭’)이라 불렀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는 날에는 ‘저승으로 돌아가는 조상님을 배웅한다.’는 의미에서 강에 나가 등을 띄워 보냈는데 이를 오쿠리비(送り火) 혹은 도로나가시(灯篭流し)라 칭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200여 년, 야메 마을은 제등 제작에 필요한 와지(和紙・일본 전통 종이) 생산지이자 풍부한 대나무 수급처라는 이점을 활용해 일본 제일의 ‘제등 고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1836년에 문을 연 이토 곤지로 상점(伊藤権次郎)이 있다.







본능적으로 똑똑똑



낯가림이 심한 탓에 남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이 없다. 따라서 취재 때는 없는 사회성을 쥐어 짜낸다. 그런 의미에서 예정에 없는 일은 잡지 않는다. 분명 그랬건만… 팽이 취재를 끝내고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한 전통 건축물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친다고 건물 사진이라도 찍을 요람으로 카메라를 드는 순간. 투명한 유리창 뒤편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망설이고 할 것도 없이 똑똑하고 문을 두들겼다.




이토 : ‘어떻게 오셨어요?





검은색 스냅백에 뿔테 안경, 자연스럽게 다듬은 콧수염,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남방으로 멋을 낸 남성이 미닫이 문을 열어 내게 물었다.





박 : 아,,, 그게… 실은 제가 ‘오래된 상점’을 테마로 취재 중인데 제등 만드시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라 무의식적으로 문을 두드렸어요. 죄송합니다.





이토 : 그러셨어요? 괜찮아요. 가끔 작업하다 보면 밖에서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제등이라 함은 연배 있는 어르신들께서 만드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젊은 애가 작업하는 게 신기한가 봐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잠시 들어오시겠어요? 실내가 좀 더럽긴 한데 제등 사진이 필요하시면 찍으셔도 되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 주셔도 괜찮아요.’





예상치 못한 호의에 감사를 전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 냄새와 닥풀 냄새가 뒤섞인 작업장 구석구석으로는 가지각색의 제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토 : 반갑습니다. 이토 히로키(伊藤 博紀)입니다. 보시다시피 제등 만드는 일을 하고요 간단히 가게 소개를 드리자면 오늘날 마을 내에는 9개의 제등 공방이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곳이 저희 가게예요. 그런데 봉쵸칭(盆提灯)을 생산하는 다른 공방과 달리 저희는 절이나 신사, 일반 가게에 거는 등을 만들어요. 물론, 쓰임새가 다를 뿐. 제작 공정은 같아요. 이렇게 야메에 탄생한 제등은 야메 제등이라 하는데 댓살(竹ひご타케히고)을 나선형으로 이은 본체로 만들어 곡선미가 느껴지는 게 특징이에요.



키가타 본체. 코마 위에 하네를 끼운 다음 우치가와를 씌우고 대나무살을 돌돌 감은 상태





제등 장인의 하루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제등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설명하던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제등 모양의 목재 모형(木型, 키가타)으로 가져갔다.





이토 : 키가타는 제등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예요. 키가타는 크게 코마(コマ)와 하네(ハネ)로 구성되는데 상하 꼭지 역할을 하는 코마에 하네를 끼우면 대략 제등 모양이 나와요. 이 위로 댓살(대나무살)을 감아 제등 본체를 만들지요. 참고로 키가타는 적게는 몇 만 엔, 많게는 수 십만 엔에 달할 만큼 고가(高値)라 제등 상점에서는 보물처럼 여겨요.




그리고 코마에 끼우는 하네의 개수에 따라 제등 크기가 달라져요. 가장 작은 제등은 하네 8장, 대형 제등은 16장이 필요해요. 그다음 우치가와(内加輪)를 부착하죠. 이렇게 키가타 조립이 끝나면 이를 ‘나무틀’에 끼워요. 그러며 다음 키가타를 뱅뱅 돌려가며 제등 본체를 만들어요.





이때 본체를 구성하는 댓살은 4m짜리 대나무 수 십 개를 길게 이어 붙인 건데, 이를 우치가와에 꿴 후 한 손으로 키가타를 뱅뱅 돌리면서 감아줘요. 이 작업을 히고마키(ひご巻き・댓살 감기)라 불러요. 너무 힘을 주면 댓살이 어긋나기 때문에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감각을 요하는 작업이에요. 너무 힘을 주게 되면 댓살이 어긋나거든요. 물론 사람 손으로 만들다 보니 불가피하게 댓살과 댓살의 높낮이가 발생하기는 해요. 이를 교정하는 게 이토가케(糸がけ)라 해서 본체를 바로 주는 공정이고요. 이 작업이 끝나면 기본 형태가 완성돼요.









이토 : 그 후 화지(和紙)를 붙여요. 이때 등에 붙이는 화지는 야메 마을에서 생산한 야메 테스키화지(八女手漉き和紙)만 써요. 테스키화지가 빛 투과율이 좋아서 등 안에 불을 넣었을 때 색이 예쁘게 나오거든요. 마침 화지 붙일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바로 보여 드릴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닥풀을 묻힌 붓을 들어 댓살 구석구석에 발랐다. 그다음 종이를 올리고는 앞서 풀을 묻힐 때 쓰던 것과는 다른 붓을 종이에 마찰시켜 댓살에 잘 붙도록 했다. 이후 삐쭉삐쭉하게 튀어나온 종이 끄트머리 부분은 면도칼로 잘라냈다.








이토 : 끄트머리를 자르는 걸로 본체 만들기를 얼추 완성했어요. 이제 이걸 하룻밤 동안 말릴 거예요. 이후 풀이 다 마르면 본체 안에 들어가 있던 키가타를 분해하고, 제등 본체 위아래 부분에 화지를 붙여 강도를 보강하는 우치하리(内張り)로 본체 만들기는 끝이 나요. 이후 이 위로 그림을 새기는데 이 작업은 에츠케(絵付, 부채에 그림을 새겨 넣는 직업)의 몫이에요. 저희 가게에서는 제 형이 에츠케로 활동하고 있어요.







가족의 힘으로



이토곤지로 상점의 역사는 18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구와 문짝을 만드는 목공소로 출발한 가게는 2대 후계자인 이토 세이하치 대에 이르러 제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4대 후계자인 곤지로(権次郎)씨가 1836년에 ‘이토 곤지로 상점’이란 이름으로 가게를 등록, 현재는 8대 후계자인 이토 히로키씨와 그의 형이 주축이 되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제등 만드는 방법’과 ‘가게의 연혁’을 듣던 중 별안간 궁금증이 생겼다.




박 : 이토 씨는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하셨어요?





이토 : 어릴 적부터 대충 만들 줄은 알았지만 정식으로 시작한 건 5년 조금 넘었어요. 그 전에는 이 일과 일절 관련 없는 일을 했고요.





박 : 아~원래는 일반 직장에 다니셨나 봐요?





이토 : 네,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패션 빌딩이라는 곳에 다니며 기획도 하고 여러 가지 하며 살았어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제등 만드는 일이 싫어서 고향을 떠난 건 아니에요. 그냥.. 뭐라고 할까. 사실 태어났을 때부터 집안 곳곳엔 제등이, 눈만 뜨면 이를 만드는 모습을 봐 와서 일을 물려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1도 없었어요. 학창 시절에는 가게에 나와 일을 거들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이어 제등 제작자가 되겠다.’라는 마음이 생겼죠.





그런데 일생을 이 조그만 마을에서만 보내기엔 제 인생이 아깝더라고요. 또 ‘제등 제작자’의 삶이라는 게 평생 제등만 바라봐야 하는 일인데 한 분야에만 몰두하다 보면 자칫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질 우려도 있잖아요. 그래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다양한 경험을 해 보자’, ‘넓은 세상을 구경해 보자’라는 생각에 패션 업계에 몸 담았어요.  





그렇게 5년간 열심히 일 하고, 쉬는 날에는 친구들과 만나서 놀고 추억도 쌓으면서 후회 없는 일상을 보냈어요. 그러다 문득  ‘아, 고향에 돌아가 제등을 만들어야겠다. 지난 시간 바깥세상에서 보고 느낀 걸 토대로 독자적인 제등을 만들자.’라는 마음이 생겼고, 이후 주저 없이 고향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기술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죠. 그러는 사이 또 5년이 지났네요.’





박 : 그러시군요. 굉장히 담담하게 말씀을 해주시지만 분명 일을 배우는 과정에서 힘든 적도 많으셨을 거라 생각해요. 언제 가장 힘드셨어요? 





이토 : 아무래도 몸이 마음을 못 따라갈 때죠. 어릴 적부터 가게에 나와 일을 도우면서 간단하게나마 제등 만드는 법은 익힌 터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금방 능숙해질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해 보니 안 그렇더라고요. 제 딴에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엉성하고. 만드는 족족 아버지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 같고. 그래서 초반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노력은 배신을 안 한다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서서히 감각이 생기더라고요. 거기에 손님들로부터 칭찬과 호평을 받으면서 자신감도 얻었어요. 그러면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독창적인 제등을 만들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흔히 야메 제등이라 하면 종교 혹은 전통적인 색채가 강하거든요. 이는 전통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일정한 ‘수요’를 지킨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제등을 만들고 싶었어요.




호두까기 인형에 등장한 야메 제등





그리하여 때로는 심플하게, 때로는 화려하게. 잡화점, 레스토랑, 카페, 백화점 등 어디에 걸어도 이질감이 없는 제등을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어요. 그 결과 2018년, 디즈니가 제작한 호두까기 인형과 4개의 왕국(Disney’s The Nutcracker and the Four Realms)에 저희 제등이 등장하는 쾌거를 거뒀어요. 장면 장면마다 저희가 제작한 제등이 등장하는데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고요.’







바라는 점이 있다면...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던 그는 디즈니 이야기에 이르러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한층 밝은 목소리로 바람을 전했다.




이토 :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의 일상과 조화를 이루는 장식형 제등을 많이 만들고 싶어요. 그렇다 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바꿀 생각은 없어요. 일반 상점이나 인테리어 가게, 백화점 등에서 주문이 들어오는 건 맞지만 여전히 저희 가게의 매출 대부분은 절과 사원, 마쓰리 때 쓰는 행사용 제등이 차지하거든요. 행사가 집중된 5~7월 사이에는 쉬는 날이 없을 정도예요. 월 5~6천 개씩 만드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전통과 현대적 가치. 이 둘의 균형을 지키며 제등을 만들고자 해요. 더불어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야메 제등의 매력을 알리고 싶고요. 이를 위해 향후 제등 만들기 체험 행사나 전시전 같은 기획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또 저희 가게가 오래오래 살아남으려면 저희만 잘해서 될 게 아니라 제등 제작에 필요한 댓살과 화지를 만드는 공방도 유지가 돼야 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공방들이 문을 닫고 있어요. 그 결과 재료 구하는 것도 어려워졌고요. 실례로 현재 일본 전역에는 제등 본체 역할을 하는 '댓살'을 생산하는 곳이 두 개 밖에 안 남았어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분들께 사랑받는 제등 만들기에 주력하는 동시에 '야메 마을에서 가장 젊은 제등 장인'이라는 타이틀을 깨고 진정한 프로가 되는 게 바람입니다.




예전 내 모습이 떠올라서



일정에 없던 취재인 만큼 이 이상 시간을 빼앗는 건 예의가 아니라 판단하여 이쯤에서 취재를 끝내기로 했다.




박 :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을 텐데 먼저 들어오라 호의를 베풀어주시고, 제등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토 씨 덕분에 많은 걸 배우고 갑니다.'





이토 : 아니에요. 괜찮아요. 예전에 제가 패션빌딩이라는 곳에서 일했다는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때 어떤 일을 진행하려면 항상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똑똑'하는 소리에서 예전 제 모습이 떠올랐어요.





뭐 그런 것도 있고 야메 제등이 더 많은 분들께 알려지고 친숙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드린 것도 있어요. 아직 경력이 5년밖에 안 되서 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아, 그리고 매년 9월에 저희 마을에서 아카리토챳퐁퐁(あかりとちゃっぽんぽん)이라고 하는 제등 축제가 열리는데 마을 곳곳에 제등들이 주렁주렁 걸려서 장관을 이루거든요. 기회가 되면 그때도 저희 마을에 들르셔서 좋은 추억 많이 쌓아가시기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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