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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탄호 Oct 14. 2021

필름 영사기 돌아가는 80년 된 영화관

35㎜ 필름 영사기의 추억, 고쿠라 쇼와관(小倉昭和館)






후쿠오카 현 북동쪽에 위치한 기타큐슈시(北九州)는 규슈(九州)와 혼슈(本州)를 잇는 관문이다. 일찍이 산업화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도시 곳곳으로 크고 작은 근대 산업 건축물이 자리했고, 시내 중심가인 고쿠라(小倉) 한복판에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탄가 시장(旦過市場)이 걸터앉았다. 생선 가게와 채소 가게, 정육점, 건어물점 등 120개 넘는 점포가 늘어선 시장은 사시사철 인파로 북적이는 시내의 상징이 되었는데 그 옆 자락으로 8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영화관 고쿠라 쇼와관(小倉昭和館)이 있다.









상영관이라고는 달랑 2개, 주로 거는 작품은 신작보다는 철 지난 영화, 그 흔한 자동 발매기 하나 없어 직원이 표를 끊어주는 것도 모자라 60년 넘은 영사기로 필름을 돌리는 말 그대로 옛날 영화관. 그리하여 누군가는 ‘시대의 흐름을 좇지 못한 낡음’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이곳에 들른 건 추적추적 봄 비 내리던 수요일 오전.




매표소와 자그마한 매점, 불단(仏壇) 주변으로 수많은 영화 포스터와 사인이 붙은 입구 로비로 단정한 정장 원피스에 예쁜 브로치, 긴 단발로 멋을 낸 여성 한 분이 서 계셨다. 영화관의 3대 사장인 히구치 도모미(樋口智巳)씨다.





박: ‘안녕하세요. 영화관 취재 건으로 온 박탄호라고 합니다. 히구치 사장님이신지요?’




히구치 : ‘네, 반갑습니다. 박상, 제가 히구치입니다. 별 볼 일 없는 영화관에 들러 주시고 한국 분들께 소개도 해 주신다니 감사드려요. 저희 극장 옆 탄가 시장에는 매년 한국 분들도 많이 오셔서 개인적으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친근해요. 또 저를 비롯해 스텝들도 한국 영화를 좋아해서 종종 한국 영화도 상영한답니다.’




 





박: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실은 얼마 전에 『1987』과『그것만이 내 세상』 을 보러 왔거든요. 일본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보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닌데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히구치: ‘그러셨구나. 저도 그 영화,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저희 극장은 개봉한 지 조금 지난 영화를 많이 걸어요. 그래서 상영을 정하기 전에 직원들의 의견과 관객 분들께서 남겨 주신 앙케이트 조사를 추합 한 다음 추천도가 높은 영화를 거는데 <그것 만이 내 세상>도 그중 하나였어요. 박상도 오늘 인터뷰가 끝나면 앙케이트에 의견을 남겨 주셔요.’




박: ‘네, 꼭 남기고 갈게요.’





히구치 : 그럼, 지금부터 저희 영화관을 소개해 드릴게요. 관내는 물론이고 관객 분들께는 공개하지 않는 장소와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도시와 함께 성장한 80년 된 영화관



히구치 : 저희 영화관은 1939년에 영화관 겸 시바이(연극, 芝居) 극장으로 문을 열었어요. 오늘날에는 상영관 두 개짜리 영화관이지만 한창 기타큐슈 시가 잘 나가던 시절에는 시내 곳곳에 분점을 3개나 두기도 했고, 상영관 규모도 지금보다 훨씬 컸답니다. 당연히 손님도 많았고요.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제가 초등학생 시절에는 시내에 영화 상영관이 100곳 이상 있었어요. 그 시기 제가 하라마치(原町・탄가시장 남서쪽에 자리함)에 살았는데 집 바로 앞에 저희 영화관 2호점이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 마치기가 무섭게 매일 영화관에 달려가 맨 앞자리에서 영화를 봤는데 평일 주말 안 가리고 손님들로 빼곡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하지만 텔레비전 방송과 인터넷 매체 활성화로 영화의 인기가 사그라들면서 지금은 예전만 못 해요. 그래서 한 때는 폐업할 생각도 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한창 때는 영화관을 4개나 둘 정도였지만 영화를 향한 대중의 관심이 줄면서 금쪽같은 분점을 폐점해야 했어요. 그때마다 2대 사장이셨던 아버지께서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죠.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기존의 ‘일본 영화만 상영한다.’라는 방침을 바꿔 1989년부터는 서구 영화도 걸기 시작했지만 멀티 플렉스 영화관의 등장으로 별 효과는 못 얻었죠. 그 결과 적자가 눈더미처럼 불어 나면서 영화관을 지속하는 게 힘든 상황에 직면했죠.





그리하여 2011년에 폐업을 준비했어요. 다만, 아버지께서 직접 영화관 문을 닫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제가 사장 대리 자격으로 영화관에 머물며 폐점 절차를 밟았죠.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 분들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게다가 유명 영화감독이나 배우들께서 저희 영화관을 응원해주시는 걸 접하고 나니 차마 문을 못 닫겠더라고요. 그래서 폐업을 주장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영화관을 물려받았답니다.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네요.






그런데 사실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어요. 영화 관람 이외 쇼핑과 여러 오락을 즐길 수 있는 멀티 플렉스 영화관이 시내 곳곳에 자리한 상황에 낡아빠진 영화관이 살아남을 길이 안 보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게 ‘일반 멀티 플렉스 영화관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자.’ 였어요.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관객을 대상으로 상영 희망 영화 앙케이트 조사를 실시해 언급이 많은 영화 위주로 상영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2홍타테(2本立て)라 해서 1,200엔을 내면 영화 두 편을 연속으로 볼 수 있는 시스템도 도입했죠. 이 2홍타테 시스템은 서로 연관성을 갖는 영화를 시리즈 마냥 엮어서 2편 연속 상영하고 있답니다.






또한 일 년에 한 번 올나이트 행사도 여는데, 이게 뭐냐 하면 늦은 밤부터 다음 날 6시까지 총 4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이벤트예요. 이때는 단순히 영화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오프닝 무대부터 시작해 영화 사이사이에 음악 연주회를 열거나 시사회도 마련해요. 동시에 저는 주전부리가 든 바구니를 들고 객석을 돌며 방문 판매도 하는데 이게 또 호응이 좋아요. 보통은 기타큐슈의 인기 명물 과자를 팔고, 가끔 영화에서 나오는 간식을 파는데 그때마다 반응이 폭발적이랍니다.





박: ‘우와, 그러시군요. 단순히 영화 상영에 그치지 않고 추억을 공유하는 공간처럼 느껴지네요.’






히구치: 네 맞아요. 관객들께서는 집에 있는 텔레비전으로는 느끼기 힘든 큼직한 영상미와 웅장한 사운드를 기대하고 영화관에 들러 주시는 거잖아요. 저희는 그런 관객 분들께 영화뿐만 아니라 색다른 감성과 추억도 제공하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따금 영화 상영에 맞춰 배우와 감독을 초빙해 상영회나 강연회를 열어요.





이곳 로비 벽에 다닥다닥 붙은 사인들은 지금까지 저희 영화관에 들러 주신 배우들과 감독들께서 남겨 주신 건데, 벽에 붙은 것만 80장 정도이고 사무실과 다른 곳에 있는 것까지 합하면 100장 이상일 거예요. 영화 마니아 입장에서는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난 시간 일본 영화의 변천사를 읽어 나갈 수 있어요.





그리고 비정기적으로 지역 공동체와 연계한 행사도 열어요. 아무래도 요새 아이들은 영사기나 영사 기사의 존재를 모르잖아요. 따라서 지역 초등학교 학생들을 초대해서 우리 영화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영사기도 보여 줘요. 또 매년 영화를 좋아하는 지역 대학생들의 영화 포럼도 저희 쇼와관에서 열고요. 게다가 매점에서 판매하는 주전부리 수익 일부를 기부하기도 한답니다.





저기 매점 가판대에 있는 수제 캐러멜 보이시죠? 저건 지역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지원금 마련 차원에서 판매하고 있는 거예요. 이 밖에도 여러 활동을 하는데 일일이 말씀드리자면 끝도 없어서 여기까지 할게요.






그럼 이제부터 영화관과 관련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에 계신 시바(椎葉)씨가 안내해 주실 거예요. 50년 넘게 저희 영화관에서 35mm 영사기와 동거 동락한 역사의 산 증인이시라 사실 저 보다 더 많은 걸 알고 계시거든요. 저희는 나중에 다시 만나도록 해요. 그럼 박상, 잘 부탁드릴게요.









사장님의 설명을 끝으로 시바 영사 기사님을 따라나섰다. 사람 좋은 얼굴에 각진 안경, 멋쟁이 베레모를 쓴 기사님은 구수한 말투로 입을 뗐다.





시바: ‘박상 반갑소. 시바라고 하오.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도움이 될까 모르겠는데 여하튼 잘 부탁드리겠소. 음, 무슨 이야기부터 해볼까? 아, 그래. 저기 매점 옆에 조그만 공간이 있지요? 건물 입구에서 보이는 매표소라오. 우리 영화관은 자동 발매기 대신 직원들이 직접 표를 발권하는데 영화관을 찾아 주시는 관객 상당수가 고령층인 탓에 기계에 익숙하지 않은 걸 고려했다오. 나만 해도 올해로 76세라 영사기 이외 다른 기계 다루는 게 익숙하지 않아. 허허’





아, 그리고 우리 영화관 매점의 자랑 하나 더! 고령층 관객이 많다 보니 판매하는 주전부리들은 목에 걸릴 염려가 적고 부드러운 걸로 두고 있지. 그리고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쉽게 뜯을 수 있는 포장지로 된 과자들만 팔고 있고. 또 자랑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안 떠오르네. 일단 실내부터 돌아봅시다.’





80년 넘은 영화관, 경력 50년 넘은 베테랑 영사기사


 

기사님을 따라 큼직한 스크린이 있는 1관에 들어갔다. 자잘한 계단을 타고 오른 관객석 가장 윗자리에서 스크린을 내려보던 기사님이 말문을 열었다.





치바: ‘참 굴곡이 많은 영화관이었지. 이곳에 일본 영화계의 흥망과 지난 모든 이의 세월이 남았다 보면 돼.’





‘이 영화관이 말이오, 1939년에 문을 열었는데 올해로 딱 81년 됐어. 나는 50년 넘게 영사 기사로 일했고... 70년대, 그러니까 내가 박상 나이 만할 때만 해도 프로 스포츠나 영화 말고는 딱히 즐길 게 없던 시절이라 저녁 시간 대나 쉬는 날에는 관내에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사람들은 70년대를 영화 불황기라 하는데 그 시절조차도 연일 만원이었지. 영화 한 타임에 30-40명 정도만 와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야.





그렇다 해서 지금이 불행하냐? 그렇진 않아. 영사기가 없는 영화관까지 나오는 판에 이 나이 되도록 영사 기사 일을 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나는 말이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깊은 감정과 추억을 제공했듯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어. 그런 의미로 각종 어려움에도 영화관 문을 닫지 않고 영업을 지속해 준 히구치 사장에게 많이 고맙다오.’








추억은 영화를 싣고, 35mm 후지 제너럴 영사기




잠시 감회에 젖어든 듯한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하던 영사님이 이야기를 재개했다.




시바: 내가 말이 좀 길었지? 나도 다른 노인네들과 마찬가지로 한 번 옛날이야기를 했다 하면 멈추질 않아. 그런데 말이야. 박상도 내 나이가 되면 이 감정을 알게 될 거야. 나이가 들수록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되더라고... 후회할 만한 삶은 살진 않았는데 찰나한 젊음이 그리운가봐. 그러니 말로 기억으로 더듬는게지. 여하튼... 옛날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같이 영사실에 한 번 가보지 않겠나?’







멋쩍은 웃음을 짓던 기사님을  따라 로비 맞은편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조그만 공간이 나왔다. 시대의 명작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와 영사기사 알프레도가 머물던 영사실을 연상케 하는 곳에는 낡은 영사기 한 대와 필름이 든 상자 등이 놓여 있었고 영사기 바로 앞으로는 상영관이 내다 보이는 작은 창이 뚫려 있었다.




시바 : ‘여기가 내 공간이야. 어때 아늑하지?’





박: ‘우와, 박물관에서 오래된 영사기를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쌩쌩하게 작동하는 건 오늘 처음 봐요.’





시바 : ‘그렇지? 이게 후지에서 나온 건데 지금도 잘 돌아가. 영화관 초창기에는 외국 영사기를 쓰다가 이후 35mm짜리 일본산을 들여왔지. 이 영사기에 들어가는 필름이 개 당 15분에서 20분짜리 분량이라 영화 한 편 트는 데 6개가량의 필름이 필요한데 이를 갈 때마다 느끼는 손 맛이 끝내줘.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 만져보겠나?





기사님의 배려로 영사기를 조작할 기회를 얻었다. 설명에 따라 손을 움직이자 맞은편으로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시바: ‘어때? 재미있지? 이 맛에 영사 기사를 한다오 내가.’





근데 박상. 정말 안타깝게도 이제 우리 영화관의 주력은 이 35mm짜리 필름 영사기가 아니야. 평소에는 여기에 있는 디지털 영사기(DCP)를 돌려. 이놈(35mm 필름 영사기)은 1950~70년대에 나온 영화 중에서 필름으로만 볼 수 있는 게 있는데 그런 것들을 상영하거나 특별 행사 때나 써. 그리고 비교적 규모가 작은 건너편 2관은 영사기 없이 블루레이 플레이어로 영화를 틀고 있고.





박: ‘그러시구나.. 기사님, 잠깐 영사기를 만져보고 송출된 영상을 보는 걸로도 이토록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필름에서 디지털 영사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시원 섭섭하셨을까요?  





맞아요. 많이 서운했지. 그래도 말이오, 아직까지 내가 할 수 일이 있어 좋다오. 지난 내 삶은 필름 돌아가는 소리와 영사기가 비추는 작은 세상과 함께 했거든. '챠라챠라'하고 필름 감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상영관을 내려다보면 관객 뒷모습이 눈에 들어와. 슬픔에 떨리는 어깨와 기쁨으로 으쓱 거리는 어깨. 호기심에 들썩거리는 어깨… 사람은 말이야 뒷모습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영사기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뀐 지금도 그래. 내가 돌리는 영화에 사람들이 울고 웃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내가 울고 웃어. 정말 행복한 직업이지. 그러니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어.






꼭 그러실 거예요. 앞으로 종종 들를 테니 좋은 영화 많이 틀어 주세요.








100년 후에도 지속될 영화관으로




기사님과 악수를 나눈 후 1층 로비로 내려가자 사장님께서 매점 물건을 체크하고 계셨다.




히구치: 박상, 시바 씨 하고 이야기 잘 나누셨어요? 오늘 함께 한 이 순간이 앞으로 낼 책에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박 :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영업 준비로 바쁘실 텐데 1시간 넘게 귀한 시간 내주시고 소중한 이야기 들려주셔서, 게다가 특별한 공간도 공개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사장님 이하 직원분들의 배려가 헛되지 않도록 좋은 이야기 엮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장님. 꼭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간단하게라도 좋으니 고쿠라 쇼와관의 향후 목표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히구치: 네, 괜찮아요. 정말 당연한 말이지만 저는 앞으로도 저희 영화관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바라요.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지역 주민들과 추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기타큐슈 시민 분들의 두터운 애정과 관심으로 여기까지 온 만큼 이에 보답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도 마련할 예정에 있고요. 더불어 한국 영화도 많이 상영할 테니까 주변 한국 친구분들께도 알려 주세요. 고맙습니다. 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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