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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탄호 Oct 15. 2021

87세 마스터가 볶은 호박 커피 한 잔, 커피 아로

창업 58년, 커피 아로(珈琲アロー)








일본의 3대 성(城)으로 손꼽히는 구마모토 성(熊本城)과 국민 캐릭터 쿠마몬, 알록달록 노면전차가 거리를 수놓는 구마모토 시. 오랜 시간 규슈(九州)의 핵심 도시로 명성을 떨친 시내 곳곳으로는 유서 깊은 노포(老舗)가 즐비하다. 일본 식당 평점 사이트인 타베로그(食べ ログ)에 게재된 구마모토 맛집 중 평점 1위,  그 밖의 사이트에서도 만점 가까운 점수를 기록하는 등 모든 지표가 '지역 제1의 돈가스 전문점’ 임을 증명하는 카츠레츠테이(勝烈停)와 진한 돈코쓰 국물 위에 볶은 마늘 기름을 올려 돼지 냄새를 잡은 라멘 전문점 텐가이텐(熊本ラーメン天外天)、140년간 시민들에게 지식과 감동을 전한 나가사키 지로 서점(長崎次郎書店)등 많은 노포가 존재하는 가운데 아는 사람들만 아는 숨겨진 노포가 있다 하여 들러 보기로 했다.  




 



 

 

87세、경력 60여 년의 마스터가 볶은 연한 커피 한 잔, 커피 아로(珈琲アロー)
  

 

1.5km 규모의 아케이드 상점가가 길게 뻗은 시모 도오리(下通り) 외각, 크고 작은 술집이 밀집한 골목 언저리로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얼굴을 드러낸 노포(老舗) ‘커피 아로’(珈琲アロー). 1964년에 문을 연 이 커피 전문점은 여타 찻집과는 결이 다른 커피를 제공한다. 때문에 구마모토 시민을 비롯해 멀리서 온 여행객들과 커피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오후 6시 15분,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등진 채 킹스 크로스 역 9와 3/4 승강장을 연상케 하는 벽돌 외벽 사이로 조그맣게 난 출입문을 열었다. 빛바랜 사진과 신문 기사로 빼곡한 벽 앞으로는 8명 남짓 앉을 수 있는 기역자 모양의 카운터 석이, 바로 맞은편에는 컵과 각종 도구로 가득한 3평가량의 주방이 자리했다. 그리고  주방 한가운데서 격자무늬 와이셔츠에 흰색 조끼, 검은색 리본.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 스타일로 멋을 낸 노년 남성이 커피 포트를 닦고 계셨다. 지난 58년 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를 낸 야츠이 이와오(八井 巌) 마스터다.

 

 

 

야츠이 : ‘어디에서 왔는가?’

 

 

 

남들 다 하는 그런 인사 말고 인자한 목소리로 관심을 전하는 그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다음 그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야츠이 : ‘어서 와요. 우리 가게는 메뉴가 하나밖에 없다네.’

 

 

 

이곳에서 주문 가능한 커피는 오직 하나. 가열된 주전자에 넣은 커피콩이 노란색으로 변할 때 내리는 일명 ‘호박 커피’(500엔)다. 가볍게 우려내 투명색에 가까운 이 커피를 두고 로스팅 전(全) 과정을 밟지 않기에 ‘커피로 인정할 수 없다.’ 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산미가 없고 고소한 데다 은은한 풍미가 있어 이를 맛보기 위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러한 인기가 도쿄까지 전해져 구마모토에 현지 시찰을 왔던 일왕 부부도 야츠이 마스터가 낸 커피를 음미했다고 한다.

 

 

 


58년, 문을 연 모든 순간이 특별했다.

 

 

젊은 시절, 호텔과 레스토랑 등에서 경력을 쌓은 야츠이 마스터는 업무 특성상 커피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검고 쓴 원두커피를 볼 때마다‘ 어째서 커피는 검은색일까?’,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아도 산미가 안 나는 커피는 없을까?’와 같은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이상적인 커피를 만들어 보겠다.'라는 마음이 생겼고, 그간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커피 아로를 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장사가 잘  된 건 아니었다. 시행착오 끝에 만든 호박 커피는 '진한 원두커피'에 익숙했던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대로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었다.  ‘커피는 본디 건강식이다. 따라서 건강하게 마셔야 좋다. '깊게 우려내지 않고 부드럽게 마시는 호박 커피가 신체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꾸준히 커피를 내는 사이 많은 단골손님이 생겼다.

 

 


 

가게에 들러주는 모든 손님이 소중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이들이 있었다. 10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들른 손님, 잊어버릴 만하면 찾아와서 커피 한 잔 기울이는 중년 남성, 원두커피만 마시면 '쓰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호박 커피를 마시고는 이 커피라면 평생 마실 수 있겠다라 극찬한 유명 작가, 커피 한 잔에 늦은 밤까지 인생사를 읊고 간 배우 등 셀 수 없이 많은 '군상'은 지난 시간 그 흔한 여행 한 번 안 가고 커피만 우려낸 그의 삶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추억을 사진으로 담아 실내 벽 여기저기에 붙여놓았다. 억겁의 세월에 빛바랜 사진을 한 장 한 장 가리키며 '일화'를 읊는 그의 얼굴에서 그리움이 묻어 나왔다. 

 

 

 

 

한참 동안 '이어진 기억에 남는 손님', '유명인들과의 에피소드'가 끝나자 이번에는 실내에 놓인 물건을 향한 애정을 쏟아냈다.

 

 

 

야츠이: ‘여기 있는 주전자와 컵들은 직접 다 구해 온 것들이야. 커피를 담기에 좋고, 잘 깨지지 않는 것들로 엄선했지. 얼마나 강도가 센지 몇 해 전 구마모토 대지진 때도 끄떡없었어. 액자도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깨지는 와중에도 커피 컵과 주전자는 하나도 안 깨지더라고.  발품 팔아 산 보람이 있었어.’




 

 

 

 

하루를 쉬면 3일을 손해 본다.

 

 

이야기가 끝나자 마스터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방금 전까지 얼굴 가득 피어 있던 미소는 온대 간데없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커피를 우려 내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뜨겁게 달아오른 주전자 부리를 투박한 컵에 기울이자 투명색 커피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은은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야츠이: '자, 한 번 마셔봐요. 호박 커피예요.'

 

 

 

 

'잔 밑이 비치는 이 투명한 커피는 무슨 맛일까.' 하는 호기심과 함께 커피잔을 코끝으로 옮겼다. 커피의 '커' 자도 모르면서 애호가라도 된 것 마냥 길게 숨을 들이쉬어 향을 음미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냄새가 어깨 끝에 매달려있던 피로를 밀어냈다. 가볍게 날숨을 내뱉곤 잔을 입에 가져갔다. 기존에 알던 커피와 다른, 마치 곡물 우려낸 물을 마시는 것 같은 기분. 다소 이질적이긴 하나 나쁘지 않았다. 좀 더 깊은 맛을 보고 싶어 눈을 감고  '혀'에 모든 신경을 쏟아 부었다.  

 

 

 

박 : '잘 마셨습니다.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맛이라 생소하긴 한데  부드럽고 은은하네요.'

 

 

 

 

야츠이 : '그렇지? 처음 마시는 분들은 다들 그리 말해. 일절 쓴맛이 안 느껴지다 보니 원두커피를 싫어하는 분들조차도 내가 낸 호박 커피는 거부감 없이 잘 마셔.'

 

 

 

하루를 쉬면 삼 일을 손해 본다.

 

 

커피잔을 비우고 마스터에게 시선을 옮기는 찰나 그가 시종일관 꼿꼿이 서 계시다는 걸 깨달았다. 아흔 가까운 어르신께서 선 채로 커피를 내고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박 : ‘마스터, 계속 서 계시면 힘들지 않으세요?’

 

 

 

야츠이 : 응? 나 쌩쌩한데?

 

 

 

 걱정 말라는 의미로 따듯한 미소를 던진 그는   ‘음음’ 하고 목을 가다듬곤 긴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야츠이 : '나는 개업 이후로 60년 가까이 거의 쉬는 날 없이 출근했다네. (벽에 붙은 신문 기사에 의하면 사모님의 장례식으로 인해 18일간 쉰 걸 제외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에 나와 커피를 볶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창 시절에는 오전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연중무휴로 가게 문을 열었어. 그러니 그때와 비교하면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만 영업을 하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계속 서 계시면 피곤하실 텐데..'라는 우려 섞인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주먹을 쥐어 반대편 팔뚝을 툭툭 치시더니 재차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야츠이 : ‘모름지기 서비스업이라는 게 손님에게 정성을 제공하는 일인데 눈앞에 손님을 두고 내가 풀어지면 안 되지. 그리고 우리 가게에는 구마모토 사람뿐만 아니라 도쿄, 오사카, 홋카이도 등 전국 각지에서 먼 발걸음 해주시는 분도 많거든. 심지어 한국이나 타이완, 홍콩 등 이웃 나라에서 와 주시는 분들도 계시니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쉴 수가 없어...

 

 

 

물론 이런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어.  단골손님들은 '마스터! 여행도 좀 다니시고, 피곤할 때는 좀 쉬세요' 라 말하거든. 내가 왜 그 마음을 모르겠어... 그런데 내게는 이 장소가 '세상의 전부'라 이곳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이 여행처럼 느껴져. 손님들이 들려주는 세상사가 얼마나 재미난데.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나.





 

 

 

이 몸이 다 할 때까지

 

 

‘오모테나시’라는 말이 걸맞은 그의 가치관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출입문이 열렸고 짙은 화장을 한 40대 여성이 들어왔다. 근처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마담'이었다.

 

 

 

마담 : '마스터 나 왔어요. 커피 주세요.'

 

 

 

야츠이 : '오늘은 좀 늦었네?'

 

 

 

마담 : ‘아니 글쎄, 아까 낮에 은행에 갔는데 뭐 하나 바꾸는데 두 시간 넘게 걸린 거 있죠. 안 그래도 바쁜데… 어쩌고 저쩌고..’

 







 

 

쉼새 없이 이어지는 푸념에도 귀찮은 내색 없이 연신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치던 마스터는 잠시 그녀의 하소연이 멈춘 틈을 타 몸을 움직였다. 속사포같이 떠들던 그녀도 그 순간만큼은 정적을 지켰다. 두 개의 시선이 향한 곳에 우뚝 선 마스터는 뜨겁게 데운 주전자 속 커피를 조그만 컵에 부었다. 뽀얀 김이 피어오르는 동시에 그윽한 향기가 실내를 타고 돌았다.

 

 

 

마담 : '나는 마스터가 내주는 커피를 마셔야 하루가 편해져. 오늘도 진짜 짜증 나는 일 투성이었는데 금세 괜찮아지잖아. 아 정말이지 이 커피도 이 가게도 마스터도 너무 좋아. 그런데 나중에 마스터가 가게 문을 닫으면 어쩌지?'

 

 

 

그녀의 푸념을 통해 마스터의 대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것을 어림짐작했다. '마스터가 안 계시면 가게도 사라지겠구나.' 라 아쉬움이 생기려는 찰나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야츠이 : '어쩌긴 뭘 어째.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야지. 오늘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만 생각해. 이랬든 저랬든 간에 은행 일은 잘 해결됐고,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있고, 그 덕에 하루 종일 불편했던 기분도 나아졌잖아. 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않아도 돼.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걱정은 더 큰 걱정을 만드니까.'  

 

 


 

카르페디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니 불변하는 것에 기대고 절대적인 말에 의존한다. 오늘 하루 짜증 나는 일 투성이었던 그녀에게 마스터는 비빌 구석이었고, 넉넉잡아 6평 남짓한 이 공간은 '포근한 안식처'였다. 그렇기에 먼 훗날 가게가 사라지면 '나는 어디서 위로받나.'라는 생각으로, 혹은 '오래오래 장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일시적인 위안을 얻고자 오지 않은 '미래'를 논했을 것이다.





사람 마음을 다 헤아릴 만큼 지혜롭진 않으나 60년 가까이 한 자리에서 손님들과 희로애락을 나누고, 그들의 고민과 슬픔을 덜어준 마스터의 인품과 존재감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내는 커피 한 잔에 위로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확인했다. 따라서 커피 한 잔으로 위로받는 와중에도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상기하며 불안해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하루아침에 단골 찻집이 사라지기도 하고,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남보다 못 한 사이가 되기도 하며, 한 순간에 삶이 바뀌는 일도 발생하니까.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니까.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에 지레 겁먹고 걱정을 사서 하다 보면 '현재'를 망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마스터의 말대로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게 맞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윽한 커피 향, 잔잔한 분위기,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다정한 대화. 가게에 자리한 모든 요소가 '행복'을 가리키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하며, 커피 한 잔을 더 시켜 늦은 밤까지 이야기 꽃을 피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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