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박탄호 Oct 23. 2021

교토스럽게, 창업 190년 부채 공방 오오니시 교센도

교토 전통 접부채(京扇子)에 교토를 그려 넣다.





오오니시 교센도(大西京扇堂)



교토 시청 근처 이시바시 쵸(石橋町)를 관통하는 아케이드 거리. 가지각색 개성을 품은 상점들 사이로 2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부채 공방이 있다. 1830년에서 1843년 사이에 창업한 것으로 추정하는 오오니시 교센도(大西京扇堂). 고급스러운 접부채로 가득한 이곳에서 9대째 가업을 잇는 오오니시 쇼베에(大西庄兵衛) 장인을 만났다.




교토에서 만들어야 한다. 교토 부채 교센스(京扇子)



부채 거죽과 부챗살, 그림 그리기에 들어가는 원료와 그 밖의 모든 재료를 교토와 그 주변 지역에서 난 걸로 쓰는 동시에, 생산 전 과정에 있어 교토 장인의 손을 거친 접부채를 교센스(京扇子 , 교토 전통 접부채)라 한다. 오늘날 교토에는 50곳가량의 교통 전통 부채 가게가 있는데 제조와 판매를 동시에 하는 곳은 채 열 곳이 안 된다. 그중 하나가 지금 서 있는 오오니시 교센도(大西京扇堂)다.




싸게는 몇 천 엔 엔 비싼 게는 수 십만 엔에 이르는 부채가 진열된 판매장. 입이 벌어질 만큼 예쁜 부채로 가득한 판매장 뒤편 작업장에는 미간을 찌푸린 채 부챗살을 다듬는 어르신 한 분이 계셨다. 9대 후계자인 오오니시 쇼베에(大西庄兵衛) 장인이다. 45살에 가업을 물려받은 이래로 30년가량 부채 만들기에 전념한 그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오니시 : 9대째 가업을 잇는 오오니시 쇼베에라고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쇼베에’라는 이름을 쓰셨는데 이는 가게 후계자들은 대대로 ‘쇼베에’라는 이름을 쓰기로 한 전통 때문입니다. 가게를 물려받는 순간 '쇼베에'로 개명신청을 하지요.





후계자들이 이름을 물려 받게된 것은 여관에서 부채 가게로 업종 변경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통입니다. 현재 가게가 소재한 이시바시초는 *도카이도(東海道) 종점으로 예로부터 인적 이동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대대로 저희 집안은 이곳에서 여관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1830년에서 43 사이 1 창업주가 부채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이후 부채 공방으로 업종을 변경했습니다. 초창기 가게 이름은 야마토야(大和屋) 주로 () 공급하는 부채를 만들었습니다. 가게 근처로 크고 작은 절이 많았거든요. . 참고로 현재 절에 부채를 납품하는 공방은 전국에 5곳이 있는데 이들 모두 교토에 소재하며 그중 하나가 저희 가게입니다.





오오니시 부채의 오리지널 제품, 라쿠후센




그런데 19세기 말, 철도 개통을 계기로 많은 여행객들이 교토에 방문하게 되면서 다양한 부채를 생산하기로 합니다. 당시 여행자들 사이에서 교토 가부키와 노, 차도, 교겐, 라쿠고 등 전통 공연이 인기를 끌었거든요. 아울러 전국 각지에서 교토의 게이코(芸子・게이샤)를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고요. 이 과정에서 라쿠후센(洛風扇)이라고 해서 교토 시내 명소와 명물을 모티브로 한 저희 가게 만의 접부채가 탄생했습니다.




*도카이도 : 1601년에 만들어진 간사이(오사카, 교토, 고베 등)와 간토(도쿄)를 연결하던 육로. 교토와 에도까지 495.5km에 이르는 육로 사이사이로 53개의 역참이 생기고 그 주변으로는 상업과 숙박업이 융성했다.  








종이 대신 기록하던 목간이 부채가 되기까지

 



박 : 오래된 가게 중에서 후계자들이 창업자의 이름을 물려받는 경우가 있다는 걸 들은 적은 있으나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여관에서 부채 가게로 업종 변경을 한 점도 신기하고요. 이제 막 이야기를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두근두근 거리네요. 그런데 제가 취재에 앞서 부채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 봤는데 종류도, 만드는 방법도, 역사적 기원도 상이하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를 준비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오니시 장인께서 부채의 종류와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오니시 : 허허허,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 한 만큼 설(説)도 분분해서 자료를 읽으며 혼란스러우셨겠지요.  부채는 크게 타원형 부챗살에 종이를 붙인 방구부채(우치와, 団扇)와 얇게 자른 대나무살을 겹친 다음 아래에 구멍을 뚫어 실로 엮은 후 그 위에 종이를 붙여 접었다 폈다 하는 접부채(扇子, 센스)로 나눕니다.




중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부채의 '최초 형태'는 방구 부채였습니다. 등장 이래로 상류층의 사치품으로 쓰이다 7세기 무렵, 중국에 유학 간 승려와 상인들에 의해 일본 땅에 상륙했지요. 그리고 8세기 초, 일본에서 접부채가 발명됩니다. 이 말인 즉 방구부채의 기원은 ‘중국’이지만 접부채의 시초는 일본에서 비롯했다는 의미입니다.

 







한 차례 설명이 끝나자 오오니시 장인은 한 손에 접부채를 쥔 다음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오니시 :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8세기 교토 궁정에서 접부채의 원형인 히오기(桧扇)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히오기란 목간(木簡,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문자 기록을 사용하던 30cm가량의 나무 판) 아래에 구멍을 뚫어 실로 이어 붙인 것으로 궁에 출입하던 사람들이 궁정 예식을 외우기 위해 목간에 문자를 적은 후 상시 휴대했습니다. 이후 궁내 여성들 사이에서는 그림을 그려 넣은 히오기가 유행했고요.





이윽고 10세기에는 가와호리 오우기(蝙蝠扇・펼쳤을 때 그 모습이 박쥐와 닮았다 하여 박쥐 부채라 부름)가 유행했습니다. 당시 왕족과 귀족들은 5개가량의 부챗살 위에 종이나 천을 붙인 가와호리 오우기에 그림을 넣어 다녔는데 이것이 중국에 전래되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마쿠라 시대(1183-1333), 중국에 건너간 가와호리 오우기가 한 차례 변형을 거쳐 열도로 역수입되었습니다. 단면에 종이나 천을 붙이던 가와호리 오우기와 달리 대나무살 양면에 종이를 붙인 중국산 접부채는 이후 접이식 부채인 센스(扇子)로 진화했습니다.





한편 중국산 부채는 유럽 사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무역 차 중국에 들렀던 유럽 상인들이 중국에서 구한 부채를 자국 상류층에게 팔았는데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운 유럽을 중심으로 그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합니다. 왕실 사람들과 귀족들은 앞다투어 예쁜 그림이 들어간 접부채로 멋을 부렸고 절대 왕정 시기에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지에서 부채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스페인에서는 옛 전통 기법으로 접부채를 만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 부채의 자존심 교센스(京扇子)



한 때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부채는 14세기경, 중국에서 역수입된 이후 서민의 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서민 문화가 태동한 에도 시대에 이르러 가부키와 분라쿠, 게이코(芸子・한국에서는 게이샤로 알려짐) 공연 등 여러 예술 분야의 소품으로 쓰였는데 이들 대다수가 교토에서 생산한 교센스(京扇子)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교센스란 부채 생산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교토와 그 주변 지역에서 조달한 동시에, 생산 전 과정을 교토 장인의 손을 거친 접부채를 말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전통 수공업에 종사하는 이가 줄면서 재료 구하는 게 어려워졌습니다. 현재 교토 내 모든 부채 공방에서 쓰는 부챗살은 이웃 시가현 아도가와(滋賀県安曇川)에서 공수한 것으로 이 지역은 일본 부챗살 생산 9할 이상을 도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이도 교토에서 생산한 전통 화지(和紙)를 붙입니다.




이렇게 재료를 갖추면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합니다. 접부채는 쓰임새에 따라 들어가는 부챗살 개수도 달라집니다. 시중에 파는 일반 부채는 30-35개, 축제나 행사에서 쓰는 고급 부채는 60개 가량의 부챗살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크게는 20여 개, 세부적으로는 88개의 공정을 거칠 만큼 손이 많이 갑니다. 따라서 교토 내 부채 공방들은 부챗살부터 종이 붙이기, 조립, 그림 그려 넣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철저한 분업을 실시해 완성도를 높입니다. 물론 예전에는 제 조부처럼 하나부터 열 끝까지 혼자 해내는 장인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이야기에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내려놓은 그는 맞은편 벽에 붙은 흑백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 속 가장 오른쪽에 계신 분이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저희 아버지고, 나머지 두 분은 공방 일을 돕던 장인들이십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두터운 장인 정신으로 부채 만들기에 매달리셨습니다. 반면 아버지는 ‘지나치게 과정에만 심취하면 가세가 기운다.’라는 생각에 부채 만드는 일보다는 판매에 주력하셨습니다. 물론 아버지께서도 부채 만드는 능력은 있었습니다. 경영자 입장에서 가게를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대대로 이어온 기술을 유지 및 전승하는 것도 중요했으니까요. 따라서 판매와 제작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분주히 노력하셨습니다.




여하튼 저희 조부와 부친은 그랬고요. 오늘날에는 철저한 분업으로 부채를 만듭니다. 현재 교토에는 부챗살을 제작하는 장인부터 종이를 붙이는 장인, 그림을 그려 넣는 에츠케(絵付け)등 45명가량의 부채 장인이 있습니다. 한 때 100명 넘는 장인이 분주히 작업하던 거에 비하면 많이 줄었죠. 일은 고된 반면 돈이 안 되는 ‘장인’의 삶을 살려는 젊은이들이 적은 상황에서 이렇게나마 유지하는 것도 기적이라 봅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저희 공방은 몇 해 전부터 제 아들이 일을 거들며 후계자 문제는 덜었으나 저희 둘만으로는 판매용 부채 생산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 달에 150개는 만들어야 가게 유지가 되니까요. 따라서 전 공정에 있어 후계자를 양성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교센스가 살아남는 길



박 : 다른 수공예와 마찬가지로 교토 부채 산업 또한 후계자 육성이 시급하군요. 이 밖에는 또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오오니시 : 음... 우선은 ‘교센스’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게 문제입니다. 70~80년대만 해도 연간 600만 개 이상 판매되던 것이 지금은 200만 개 밖에 안 팔립니다. 이는 선풍기나 에어컨의 영향도 있지만 보다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유명 포목점과 백화점 등에서 어머니 날 선물세트로 손수건과 국산 부채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백화점 관계자들이 원가 절감을 위해 국산 부채 만들기에 필요한 재료를 들고 중국에 건너가 중국 공장에 대량 주문을 맡겼고, 그 결과 국산 부채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고급화 전략으로 어느 정도 고객을 확보한 교토 전통 부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외국인 손님과 결혼식, 시치고산(七五三祝い・ 남자아이가 3살·5살, 여자 아이가 3살·7살 되는 해의 11월 15일에 아이의 성장을 축하하는 행사)과 같은 전통 행사, 전통 공연 예술가들이 구입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런 가운데 교센스를 사칭하거나 모방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이에 대처하고자 교토에 있는 부채 장인들과 가게들이 협력해 교토 접부채 방구부채 상공 협동조합(京都扇子団扇商工協同組合)을 설립했습니다.




교센스 마크



 

조합에서는  ‘교토와 그 주변 지역에서 난 재료를 쓰는 동시에, 생산 전 과정에 있어 교토 장인의 손을 거친, 나아가 협회에 가입한 가게만 ‘교센스’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기준을 정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부채에 ‘교센스’ 마크를 새겨 넣어 타 지역 부채와의 차이를 뒀습니다. 이밖에도 전통 기술 보존과 후계자 양성 등 부채 유지를 위한 여러 부분에서 협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별개로 저희 가게에서는 조부 때부터 부채에 교토 풍경을 그려 넣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부채를 라쿠후센(洛風扇)이라 부릅니다. 단순히 우아한 그림을 넣는데 그치지 않고 교토 전통 부채에 교토 풍경을 새겨 넣음으로써 가장 교토스러운 ‘공예품’을 만들었다 자부합니다.









한국 전통 부채와 일본 전통 부채가 함께 성장하길



‘오래전 한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수원이었던가... 그곳에서 한국산 전통 부채를 볼 일이 있었습니다. 진열된 부채들을 보며 ‘한국 전통 부채는 방구부채가 많구나.’라 생각하던 찰나, 합죽선(合竹扇, 한국 전통 접부채)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교센스와 다른 듯 닮은 면이 있는, 하지만 정말 매력적인 부채여서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한국의 전통 부채도 어려움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전통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건 너나 할 거 없는 문제이기에  부디 양국 모두 고유한 ‘부채 문화’를 잘 유지해서 후손들에게도 물려줬으면 합니다. 그런 바람으로 향후 가게에서 부채 만들기 체험 교실도 열 예정이니 많은  한국 분들께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전 02화 소소하게 은은하게 : 교토를 비추는 전통 양초 공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