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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May 31. 2020

순결하고 무해한 글은 존재할까

아니요, 아마 그렇지 않을 걸요





다시 말하지만,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걸 측정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순백의 피해자는 없다> 허지웅, (한겨레 ESC칼럼)



허지웅은 칼럼에서 한국 사회의 순결 콤플렉스에 대해서 짚고 넘어간다. 요컨대, 이 사회는 심지어 어떤 범죄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도 순결의 프레임을 씌워 가두는 경향이 있다는 것. 피해자는 피해자일 뿐이다. 감정적으로 불쌍히 여겨져야 할 필요도, 자격을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을 필요도 없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피해 사실을 적시하고 그에 따른 최대한의 처벌을 하도록 노력하면 된다. '순결', 순결이라..


순결 :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깨끗함 혹은 마음에 사욕, 사념 따위와 같은 더러움 없이 깨끗함
비슷한 말: 순백, 청결, 결백, 순수, 청정

 


어떤 단어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덧붙여질 수 있겠지만, 현대 사회, 특히 한국에서의 순결은 이제 긍정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다가 한 가지 의문에 다다랐다. 개인 창작자들의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순결한 컨텐츠라는 건 존재할까.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무해하고 순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컨텐츠'. 이건 거의,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명제처럼 불가능한 존재 아닌가.



기획자와 편집자 그리고 프로덕션의 단계에서까지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모여 목적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만든 컨텐츠라 한들, 예기치 못한 피해자나 특정한 영향을 끼치는 일은 어떻게든 생기고야 만다. 그것은 글에서도 마찬가지라서, 글쓴이는 그 모든 가능성을 미리 예견해서 차단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착한 컨텐츠란 무엇일까. 인기가 많은 공중파의 예능도 때로는 욕을 먹을 때가 있고, 온 국민이 사랑한다는 캐릭터 펭수에게도 가끔은 악플이 달린다. 


<서늘한 여름 썰> 팟캐스트를 진행하던 세 명의 진행자 서밤, 블블, 봄봄님이 쓴 책 <마음의 구석>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무해한 사람은 없다' 챕터에서, 청정한 컨텐츠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해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방송을 만들었다고 자신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한 반응으로 인해 당황한 적이 많다고 저자는 고백했다. 최선을 다해도 세상에는 완벽하게 무해한 존재란 없으며, 누구나 쉽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잘못을 했다면 남은 것은 반성하고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뿐이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부분에 있어서 오만하게 장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컨텐츠를 만든 창작자는 예측 가능하지 않은 어떤 측면에 대해서 얼만큼의 책임을 가져야 할까.


특별히 노이즈 마케팅을 의도한 자극적인 특정 컨텐츠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창작물은 나름 선한 의도로 만들어졌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창작물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90% 이상의 사람들에게 괜찮을 컨텐츠와 60% 이상의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컨텐츠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맥락에 따라 달라질 것이 분명한 독자/대중의 반응을 어디까지 예측하고 어떤 기준에 맞춰야 할까.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결국 내게 있다. 내면의 완벽주의와 강박이 만나 물리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결벽으로 나타난다. 정리 정돈을 좋아하는 것은 깨끗함의 차원이라기보다 컨트롤의 문제였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내가 조절할 수 없는 불완전의 영역에서 어떤 불확실성이 덮칠지 알 수 없을 때 겁이 나고, 그런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더 많은 주변의 요인을 컨트롤하려고 애쓴다. 내 안의 일부는 호기심이 가득한 모험을 꿈꾸는데, 또 다른 일부는 주변을 통제할수록 안정을 느끼고 그를 위해 불안을 거세하는 방향으로 자라와서, 그 둘은 항상 서로 치열하게 싸우느라 바쁘다. 청정하고 무해한 글, 99.9%의 순도로 반론과 문제가 없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늘 막힌다. 자신이 없다. 예상하지 못할 반론에 대해 이렇다 할 방패막이가 없다. 발행을 누르기 전의 자기 검열이 늘어난다.


사마천의 <사기> 기록에는 상앙의 법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진나라 초기 재상이었던 상앙은 나라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엄격한 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황제의 아들이 법을 어겼어도 예외 없이 벌을 주었다고. 그래서 질서의 정립에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결국엔 자신이 만든 그 엄격한 법에 의해 자신도 예외 없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종종 상앙처럼 엄격한 자기 잣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 걱정이 든다면 그 엄격한 기준을 좀 놓아주면 될 텐데, 또 쉽게 그러지도 못한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방법을 알 것 같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유해지기는 어려워서 매번 그냥 발을 동동 구르며 산다.


아니, 그러니까, 조금 너그러워지면 어때. 스스로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간, 언젠가 지금보다 나이가 들고 약해져 긴장이 떨어진 어느 날엔가 내가 정한 기준에 내 발목이 잡힐 것 같다. 순결하고 무해한 글은 없다. 혹시라도 있다면, 그저 흑도 백도 아닌 무색무취의 글일 거야.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겉돌기만 멤멤하다 끝나는 글. 그러니까 내 안에 있는 어떤 선명한 색의 존재를 부정하지 말자. 심지어 그것이 예쁘거나 밝거나 사랑받는 색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 내 안에 무엇을 감추기는 어려운 것 같다. 주머니에 담긴 못처럼 자꾸 끝이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글쓰기의 시작은 아마 하염없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인정하는 일부터인지도 모르겠다.




무해하고 청정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내고 싶은, 혹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글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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