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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Apr 20. 2020

밤을 건너는 시간

어떤 나른한 행복의 기억들


 


 

밤 시간을 좋아했다. 고요한 새벽, 사람들이 잠든 시간, 가라앉은 공기. 

무엇보다 방해받을 것 없는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어서 좋았다. 인터넷 서핑을 하던, 책을 읽던, 라디오를 듣던, 글을 쓰던,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


그것은 동생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새벽까지 각자의 방에서 늦게까지 딴짓을 하다가 서로 물을 마시러 냉장고를 오가거나 화장실에 가려고 방을 나왔다가 서로에게 얼른 자라고 잔소리를 했다. 오다가다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똑똑, 하고 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하고 나오기도 했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그 시간을 쉽게 놓지 못했다.






동생은 나보다 사교적인 사람이다. 학교를 다닐 때에도 친구나 동기, 선후배를 만나느라 바쁘고, 데이트를 하느라 바쁘고, 이런저런 모임에 다니느라 바빴고,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일을 하느라 바빴다.(제대로 된 퇴근이 없는 직종) 같은 집에 살고 있어도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약속을 해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우리가 종종 만나서 공유하는 시간이 있다면 금요일 밤,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보는 시간이었다. 부모님이 주무시는 안방 맞은편 거실에 앉아 볼륨을 1이나 2로 줄이고 나지막한 소리로 유희열의 입담과 뮤지션의 음악을 지켜본다.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그걸로 좋고, 그렇지 않으면 동생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불을 다 끄고 소파에 기대어 앉거나 바닥에 누워 멍하니 TV에서 나오는 푸른빛을 지켜보면서. 시작한다, 시작한다! 얼른 씻고 와. 잔소리를 하다가, 양치를 하며 첫 게스트를 맞는 일. 아니면 좀 더 바쁜 한 명이 방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구 나오면 불러줘! 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의 음악을 같이 듣는 일. 성시경의 아바타 같은 특급 게스트가 나오면 이리 와봐, 대박! 하고 낄낄대며 서로에게 알려주는 일. 함께 사는 가족과 TV를 보는 일은 너무 평범해서 기억할 필요 조차 없는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지나고 보니 나에게는 일종의 힐링의 시간이었다. 그 시절 내게 행복이란 건 그런 순간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좀처럼 그 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밤을 새서 과제를 하는 날에도 스케치북을 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갈 만큼. 
 

다음날엔 별 약속이 없는 한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이번엔 엄마도 함께 셋이 거실에 모여 앉아 <최고의 요리 비결>을 봤다. <스케치북>이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이하나의 페퍼민트>까지 이어오는 우리의 애정하는 음악 프로그램이라면, <최고의 요리 비결>은 동생이 좋아해서 나와 엄마도 덩달아 보게 된 프로그램이다. 원래 EBS에서 하는 프로그램이라 볼 일이 잘 없는데, 일주일치를 모아 토요일 늦은 아침에 재방송을 해주는 걸 자주 봤다. 게으른 차림으로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보면 제일 배고픈 사람이 먼저 점심 먹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남은 밥과 반찬을 꺼내 대충 때우는 날도 있고, 라면이나 만두 같은 인스턴트를 먹기도 하고, 그러면서 거실에 모여 앉아 TV를 보면서 점심을 먹었다. 엄마는 프로그램을 보며 다음 주 식단에 영감을 얻었고, 동생은 원래 요리와 맛있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그냥 요리 프로를 좋아했다. 나는 엄마랑 동생이 함께 있는 거실이 좋아서 같이 끼어 앉아 있었다. 그러다 보면 또, 으아아, 주말이 지나가고 있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후회하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의 집에 살 때를 돌아 보면, 그런 게으르고 나른한 시간들이 제일 많이 생각나고 또 그립다. 




얼마 전에 방구석 콘서트에 나온 뮤지컬 <빨래>를 보다 예전 기억들이 났다. 대학로 근처에서 학교를 다니던 동생 덕에 우리 가족은 종종 시간을 내어 소극장 연극이나 뮤지컬을 함께 보러 가기도 했다. 그때 보았던 공연이 <빨래>, <늘근 도둑 이야기>, <라이어> 같은 스테디셀러 공연 들이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서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좋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서울살이 몇 핸가요.’ 하는 그 넘버가 좋고, 이야기의 구성도 좋고, 특히 아기자기한 무대 미술이 인상 깊었던 공연 <빨래>. 십 년 전에도 공감했지만, 그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 시절의 모습을 투영해서 공감할 수 있는 시대성을 가진 뮤지컬. 


소극장 공연이나 연극, 뮤지컬은 사실 한 번 보면 반할 수밖에 없다. 작은 극장 안에 들어서면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연기자나 뮤지션과 관객의 교감이랄까, 그들만의 활력과 생동감 같은 것들이 있다. 숨죽여서 눈 앞에 벌어지는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그 기운에 압도되기도 하고 그 순간에 몰입해서 즐기게 된다. 그 기분에 취해 커튼콜을 나서면 어떤 환상 속에 빠져있다가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처음 <빨래>를 보았을 때 감동적인 공연 자체에 반했다면, 이번엔 스크린 속 공연을 보고 나니 그동안 몇 년씩 극을 이끌어 오고 연기한 사람들의 의지와 끈기와 에너지가 보이는 것 같다.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저 사람들도 젊음과 열정을 바쳐 힘든 시간을 버티고 버티고 버텨서 여기까지 왔겠지. 예술한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힘껏 응원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skWsTaXgBg



서울살이 몇핸가요 서울살이 몇핸가요 언제 어디서 왜 여기 왔는지 기억하나요
서울살이 몇핸가요 서울살이 몇핸가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하고 살아가나요
...
서울 살이 여러 해 당신 꿈 아직 그대론 가요.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 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나요.



이곳에서 나도 일곱 번째 이사를 했다. 내 꿈은 뭐였더라.

이 노래에 내 파트를 넣는다면,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인생을 잘 살고 싶은 건 모든 청춘이 마찬가지일 텐데,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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