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지만 확실한 기쁨

2020.07.격리의 시대에 가성비 높은 소비란,

by 틂씨





세 달만에 또 이사를 했다. 이쯤이면 이제, 이사의 달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몇 번째인지 한 손안에 꼽을 수 없으니 세지 않기로 한다. 어떤 박스가 가장 튼튼한지 알게 되고 -주로 바나나 박스가 튼튼하다- 모은 물건들의 무게와 부피를 대충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달까. 하지만 이런 감각은 또 사용하지 않으면 금방 잊겠지.


정부 차원의 폐쇄적 락다운(봉쇄)은 어느 정도 풀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이 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라 일어나는 일들은 여전히 제약이 있다. 사람들은 이제 ‘1.5m 사회'에 익숙해졌다. 그마저도 주변의 벨기에나 다른 곳에서는 2m라던데, 네덜란드는 1.5m로 지정했다. 최소화한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1.5m 사회적 거리두기 사회에서는 어떤 것을 기쁨삼아야 하지.





그러다 발견했다, 또 다른 즐거움. 요즘 매일 들렀던 중고 생활용품점(secondhand shop)에서.

불명확한 미래에 큰 규모의 소비를 할 수는 없으니, 자주 중고 생활용품점에 간다. 한국과 달리 네덜란드에서 중고 생활용품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꽤 흔한 소비 형태다. 게다가 그곳에는 유로도 아니고 센트 단위로 뭔가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젠 뭔가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서라기보다, 가서 구경하고 뭔가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기 위해 참새가 방앗간에 들리듯이 자주 들린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재질은 패브릭보다는 유리나 도자기 재질. 청결도 때문인데, 새것 같은 아이템을 발견하면 기쁨이 배가 된다. 그러니까 주요 공략 섹션은 부엌용품과 가구 쪽이 되시겠다.


원래는 스튜디오에 둘 책상이나 의자 같은 것들을 보려고 했는데, 중고 매장이다 보니 물건 값 보다 배달비가 더 비싸다. 그 정도 배달비를 주고 사려니 왠지 마음이 쓰려 결국 가까운 동네에 있는 가게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대신 컵과 그릇의 섹션으로 발을 돌린다. 가끔 좋은 브랜드의 그릇이나 컵 같은 것들이 다른 것들과 섞여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날이 있기도 하니까, 오늘도 행운을 바라면서.


지난 삼 일간 샀던 건, 아주 작고 예쁜 샷 글라스-깔끔한 검정 라인으로 된 레몬 일러스트가 예쁘게 그려져 있어서(그러니까 그냥 예뻐서)- 하나와 조금 큼지막한 유리컵 두 개. 그동안 살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도자기 재질의 머그잔을 별로 좋아하지 않다는 사실과 200ml의 용량의 컵은 너무 작아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300ml 이상은 수용할 수 있는, 유리로 되어 속이 투명한, 그리고 너무 얇지 않고 어느 정도 무게감 있는 잔이 좋다. 티 전용의 잔들은 아주 얇고 가벼운데, 그런 컵은 금세 깨질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싫다. 새로 이사 온 집에는 온통 아주 작은 용량의 머그컵들 뿐이라 답답했다. 물 한모금 먹고 나면 다시 물을 떠야 해. 큰 컵, 시원스럽게 큰 컵을 사야 한다. 컵들이 가득 모여있는 선반을 꼼꼼히 둘러본다. 사용감도 거의 없고 적당한 용량과 무게를 가진 유리컵을 찾았다! 1유로 25센트의 행복이 생각보다 꽤 커다랗다. 이렇게 소소한데 확실한 소비의 기쁨이라니. 생활용품 사면서 이게 이렇게 기쁠 일인가 싶지만, 뭐 어때.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sunflower.jpeg 여름엔 해바라기죠!



일주일에 두 번, 집 앞에는 마켓(장)이 선다. 집 앞에 장이 선다니, 이게 이렇게 편리한 일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장을 지나는 길에 형형색색의 꽃 매대를 둘러보다 결국 커다란 해바라기 한 묶음을 샀다. 다섯 송이에 4유로. 네덜란드는 꽃이 흔하고 싸다. 한국에서는 몇만 원을 훌쩍 넘을 것 같은 화려하고 풍성한 꽃다발도 10-15유로 정도면 살 수 있다. 심지어 마트에서. 그래도 여전히 사치스럽다고 느끼는(필수적이지 않은) 소비는 내게는 쉽지 않은데, 해바라기 한 단이 제일 눈에 띄었다. 예쁘네. 그동안은 멀리 사는 바람에 마켓에서 꽃을 사면 꽃다발을 손에 들고 자전거를 타고 다시 먼길을 되돌아가기 어려워서 쉽게 살 마음을 먹지 못했는데, 이제는 시장 근처에 사는 장점을 누려보기로 했다. 잠시 꽃다발을 들고만 있었는데도 근사한 기분. 이런 거구나, 꽃이 주는 마음.


작고 소소하지만, 어쨌건 확실한 기쁨들을 만들어내며 살고 있다.

결국 소비의 결과라는 맹점은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정도의 가성비라면야 훌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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