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8.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던 순간
이 나라의 장점 중 하나는 어딜 가든 초록 초록한 잔디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잔디 아래의 흙도 대게는 딱딱하지 않아서 그 위에 앉으면 단번에 푹신하다-는 생각이 드는데(과장이 아니다!), 잔디가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이 나라에 와서야 처음 알았다. 한국은 아무래도 환경과 날씨 탓에 잔디가 귀하고, 그래서 그 위를 마음껏 밟거나 앉을 일이 많지 않으니까. 그리고 아마도 이렇게 숱이(?) 풍성하지 않아서 이런 푹신한 느낌도 들지 않을 것이다.
자전거로 10분, 근처 공원에 간다. 자전거를 나무에 기대어 세우고 자리를 잡은 후 챙겨 온 작은 하맘(터키식 얇은) 타월을 잔디에 깐다. 그 위에 누워 가만히 하늘을 보는 것이다. 이러려고 나왔다. 일기 예보에 종일 해가 쨍하다고 했으니까. 백팩에는 작은 책 한 권과 탄산수 한 병, 그리고 씻어둔 청포도 한 팩을 넣었다. 나무가 살랑살랑 바람에 움직이고 눈 앞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강줄기가 흐르고 있다. 새소리가 들리고 지나가는 워터 택시와 화물선 배들이 물을 가르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따뜻하고 편안하다. 이것만큼 내가 바라던 행복이 있었나 싶을 정도. 평소에는 타국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답답한 순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순간에는 그게 다른 방식의 장점이 된다. 이 배경에는 다만 한국의 여름 하면 떠올리는 어떤 풍경에 포함된 매미 소리가 없을 뿐이다. 공기 또한 습도가 낮아 한국처럼 끈적이지 않는 쾌청한 날씨이고.
원래 누워 있는 상태에 약간의 공포가 있다. 누워서 아무 가림막 없이 온전히 배를 하늘로 향하고 있다 보면 나 자신이 취약한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뒤집힌 고슴도치 같은 기분? 누가 내게 아주 가까이 오거나 나를 공격할지도 모르는데, 그럴 때 쉽게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심지어 한 여름의 집에서도 나는 얇은 이불을 배에 덮어두지 않으면 잠을 청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러니 혼자 공원에 와서 대담하게 잠이 들 여유까지는 아직 없지만, 그래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저 누워있는 것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누워있다보니 문득, 어디선가 익숙하고 향긋한 비누 내음이 풍겨온다. 누가 목욕이라도 하고 온 건가 싶은, 막 목욕탕에서 나오는 누군가에게 날 법한 깨끗한 세제 냄새다. 아주 익숙하고 꽤 진한 농도로. 여기 어디 샤워장이라도 있는 걸까, 공원이 아니라 실은 캠핑장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여긴 그냥 강가의 작은 공원인데. 후각의 환기란 얼마나 강력한지. 그러다 어딘가에서 가족끼리 모여 바비큐라도 하기 시작하면 매캐한 연기 냄새가 또 바람을 타고 지나간다. 그렇게 흘러오는 냄새에 따라 내 머릿속의 상상은 순식간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방향을 달리해서 달린다. 너무 재밌다, 이 상상들. 그저 잔디에 누워있기만 했는데.
이쪽저쪽으로 상상을 발휘하다, 갑자기 이 기운과 공기를 담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라니, 읽기는 좋아해도 평생 해본 적은 없는 일이다. 시도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소설 속의 어느 여름날 같아서, 그 생생한 느낌을 어딘가에는 담고 싶어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허구를 섞은 글. 그럴 능력이 있다면 좋을 텐데.
오늘 들고 온 책은 <JUST KIDS>. 패티 스미스(Patti Smith)가 쓴, 그녀와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그리고 6-70년대의 뉴욕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책이랄까. 이 자서전은 몇 년 전 벨기에의 안트워프에서 열린 어느 소규모 재즈 페스티벌을 보러 갔다가 그날 패티 스미스의 공연에 반해서 샀다. 그 후,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전에도 다녀왔다. 책에는 그 시대 뉴욕의 디테일이 낯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잘 읽히지 않는 영어 이름이나 명칭 같은 것들이 많지만, 전반적으로는 술술 읽히고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있다. 말 그대로 Just Kids이던 예술가들의 젊은 초상을 들여다보는 느낌도 있고, 아니면 영화의 어떤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100% 즐겁기 위해 읽던 책이라 언제나 뒷전으로 밀리다 보니 여전히 2/3 부분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고 오래도록 책장에 꽂혀 있었다. 오늘도 나머지 1/3을 전부 읽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그냥 즐겁게 읽히는 만큼만 읽어야지. 그 시절의 히피 라이프를 부러워하면서, 그냥 입 끝에 미소를 지어가면서. (원서로 된 책은 아직도 한글만큼 술술 읽히지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다)
최대한 핸드폰을 멀리하려 3G 데이터를 꺼 두어도, 책을 읽다가 문득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가만히 강물을 바라보다 빈 손이 어색하게 느껴지면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손에 쥔다. 어떻게 해야 이 스마트폰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지 생각하지만, 핵심은 핸드폰이 아니라 내가 '비난받지 않을 만한 쉬운 일들'로 시간을 죽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현실 회피 같은 것. 자꾸 생산적인 일은 비난받지 않고 싶어 미루고(도대체 누구냐, 그 비난하는 사람!), 비생산적이며 쓸데없는 일에 몰두한다. 그건 잘 못해도 안 혼나거든. 중독의 문제가 아니라 회피의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도, 좋은 시간을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좋은 시간이었으니까.
겨우 락다운이 해제되고 여름이 오고, 그래서 이렇게 산책이라도 실컷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 이 여름이 사무치게 그리워질지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