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당근 케이크를 굽습니다

2020.12. 일상의 기쁨을 영위하기 위해서

by 틂씨




어떻게 지내, 라는 물음에 답이 궁한 사람은 늘 그냥, 하고 끝을 얼버무린다.

별 일 없이 지내지. 별일 없다는 것이 대답이 된다면.



매일 세 끼를 굶지 않고 제시간에 챙겨 먹으려고 노력해. 밥은 배가 고플 때 먹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먹어야 한다고 누가 그랬거든. 하루에 한 번은 집 밖에 나가 바깥공기를 쐬고 햇빛을 보려고 해. 많이 걷지는 못해도, 종일 집에만 있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잠은 7시간 정도, 일정한 시간에 자려고 노력해. 자정에는 자려고 하지만, 마음이 불안한 날엔 새벽 서너 시까지 잠들지 못할 때도 있지. 그래도 오전에는 남향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감사해하며 빛을 가만 들여다 보기도 해. 환기도 아침저녁으로 시키고. 우리 집은 창문이 작아서 환기에 쥐약이거든. 부엌엔 커피와 우유와 계란이 떨어지지 않게 채워두려 하고, 냉장고 속의 야채들이 상하지 않도록 식재료 테트리스를 하듯 먹어 치우기를 반복해. 그래서 뭔가를 많이 사지 않게 되더라고. 상하기 전에 먹어 치워야 하는 순간이 싫어서. 귀찮아도 장은 이틀에 한 번쯤은 보게 되는 것 같아. 신선한 식재료를 먹는 게 좋더라고. 그날그날 먹고 싶은 걸 먹는 것도.


페이셜 클렌징이 마침 떨어졌길래 세수 비누로 바꿔봤어. 예전에는 고체 비누를 쓰는 것보다 액체로 된 클렌저를 쓰는 것이 뭔가 더 세련된 모습처럼 여겨졌다면, 요새는 다시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는 비누를 사용하는 것이 환경을 위한 배려처럼 여겨지더라. 세수할 때 비누를 쓰고 싶은데 혹시 피부가 상할까 봐 오래 고민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깜짝 놀랐어. 다섯 개의 조각으로 작게 나눠진 그 비누를 오래 쓰게 될 것 같아. 최근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작년처럼 작은 붉은색 포인세티아를 샀어. 작은 화분 하나에 2유로이니까, 꽤 괜찮은 가성비의 아이템이거든. 게다가 예쁘고. 겨울은 아무래도 식물을 새로 들이기에 좋은 타이밍은 아니지만, 포인세티아는 늘 이맘때쯤 나오니까. 하나 사 두면 붉은색 잎이 쨍해서 정말 크리스마스 같은 기분이 나더라.




크리스마스의 상징 같은 식물, 포인세티아. 빨간 건 꽃이 아니라 잎입니다.




아, 그리고 베이킹을 자주 하게 됐어. 주로 많은 재료와 휘핑 기계가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것들 위주로. 재작년 겨울쯤, 처음 파운드 케이크를 굽고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도 가끔씩, 베이킹 향기가 그리운 날엔 재료를 사다가 베이킹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 집에 이사 오고 나서 횟수가 잦아졌지. 아무래도 올해 코로나 덕에 내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도 했고, 스트레스받을 때 베이킹 만한 것이 없거든. 밀가루와 버터, 계란, 우유와 생크림, 거기에 말차 가루나 얼그레이 티, 호두나 아몬드 가루, 바닐라 같은 것 들을 더해서 대충 휘저은 다음에 뜨거운 오븐에 넣고 기다리면, 40분 정도 혹은 더 짧은 시간이 지나고 차근히 부풀어 올라 제법 먹음직한 케이크나 스콘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너무 기분 좋아. 오븐 속에서 구워지고 있는 빵들을 보고 있으면, 저런 걸 직접 만들어내다니! 하는 묘한 기쁨과 아드레날린이 솟아오른다니까.


또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눠주는 기쁨이 쏠쏠하거든. 저울도 계량기도 없이 대충 만드는 베이킹이 지상 최고의 맛 일리는 없지만, 어쨌든 공짜로 단 걸 받는 사람들은 대게 맛있다고 말해 주기 마련이니까. 텅 빈 마음 어느 구석이 채워지는 기분이 든달까. 레시피 속의 글로만, 혹은 영상으로만 존재하던 것들이 실제로 그럴 듯 한 맛을 내며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근사하게 느껴지고.




무려 진짜 당근이 들어가는, 당근 케이크.




자주 굽던 스콘이나 파운드케이크 대신, 얼마 전엔 큰 마음을 먹고 당근 케이크를 구워 보았어. 나에게 당근 케이크란 건, 궁극의 달달함 같은 존재거든. 학교를 다닐 때에 스트레스가 엄청난 날이면 친구들이랑 압구정의 세시셀라(Ceci Cela)에 가서 당근 케이크를 먹었어. 어디를 가도 거기보다 맛있는 당근 케이크는 없었(다고 믿었)지. 눅진하고 진한 버터크림 프로스팅 위에 포슬한 생크림까지 얹어서 진한 아메리카노와 먹으면, 비록 찰나지만 세상이 좀 행복해지는 기분이었거든. 약간은 이국적이던 가게 분위기도 좋았고, 그 안에서 맛있다고 호들갑스럽게 함께 떠들던 친구들도 좋았고. 위로의 말이었던 거야, 우리 다음에 당근 케이크 먹으러 가자! 하는 건.


케이크 본체도 그렇지만, 프로스팅은 더 까다로울 것 같아서 만들 생각은 안 해봤거든. 그런데 베이킹 레시피 영상들을 보다 보니 당근 케이크 레시피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고. 게다가 그날따라 우연히 집에 남은 피칸도 좀 있고, 당근도 있고, 밀가루도 있었던 거야. 그래서 구웠지, 당근 케이크를. 크림치즈 프로스팅은 생각보다 만들기 어렵지 않았고, 별 거 없이도 꽤 근사한 맛이 나더라. 처음 만든 이 케이크가 잘 익어서 맛있는 맛을 내주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분이 좋았어. 신나더라고. 왜, 자존감이 떨어져 있을 땐, 작은 성공을 자주 하라고 하잖아. 나한텐 이게 일종의 성공 같았어.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엔 당근 케이크를 굽기로 했지. 코로나로 본국에 돌아갈 수 없는 하우스메이트들과 집에서 작은 홈 파티를 하기로 했거든.





중요한 건, 내가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인 것 같아서. 그 사이에 작은 기쁨도 성취감도 끼워 넣으려고 애쓰고 있어. 당장 커다란 당근 케이크를 만들어서 친구들을 잔뜩 불러 티타임을 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분간은 요원한 일이겠지. 이번에 만드는 두 번째 당근 케이크도 맛이 있다면 다음엔 꼭 한국에 가서 직접 만든 당근 케이크를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이전 09화이른 마음을 적어 보내요,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