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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Feb 21. 2021

식물 키우기와 육아의 공통점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더라는 것





식물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이 나라에 오고 나서부터다.


어릴 때부터 늘 엄마는 베란다에 각종 희귀 난부터 행운목을 비롯한 여러 식물을 가득 키웠지만,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그들에게 물을 주는 것을 가끔 까먹어서 그들에게 미안해지더라도 자식들에게 물 주기를 대신시킨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가끔 우유를 다 먹고 곽을 비울 때면, 꼭 그냥 버리지 말고 물로 헹궈서 꽃나무에 주라는 부탁을 할 뿐이었다. 그게 다 영양분이라고. 가끔 꽃이라도 피울라치면, 나와 동생을 차례대로 불러다 이거 봐라, 꽃 예쁘지, 향기 좋지 하는 말에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응, 좋네 습관처럼 답했다.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 놀랐던 점은, 타국에서의 새 출발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하는 일이 노란빛의 조명과 식물을 사 모으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한 번도 최우선으로 꼽힌 적이 없던 일이다. 안락함을 위해서 사람들은 노랑과 초록을 모았다. 그때 처음 식물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식물이 생명으로 채워주는 기운이 공간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남의 집 살이를 주로 하며 이미 그 집에 존재하던 식물들만 키워 보았던 내가 처음 키우기 시작한 식물은 아보카도였다. 친구가 아보카도를 먹고 나온 씨를 물꽂이 해서 새싹을 낸 작은 나무를 선물해주었다. 그 해 겨울엔 포인세티아와 겨울을 보냈다. 그다음 해 봄, 다시 이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돈을 내고 내 식물을 샀다. 플렌 테리어의 꽃이라는 몬스테라.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스킨답서스와 선인장, 알로에, 홍콩 야자에 이르기까지 꽤나 여러 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식물을 키우면,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일단 새 화분을 사서 집에 들여놓으면, 초록 초록한 잎들이 자라나는 것이 신기해서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보통은 꽃을 보는 식물보단 잎을 보는 관엽식물을 주로 사게 되는데,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자라나는 잎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루함을 잊게 된달까. 자꾸 들여다본다고 자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어쩐지 물을 주고 싶어 진다. 말라 죽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그래서 늘 촉촉하게 해 주면 왠지 잎이 더 잘 자랄 것 같은 느낌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분명 물이 마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잎이 누렇게 변하거나 떨어지기 시작했다면, 그래서 이상한 마음에 물을 조금씩 더 주었다면, 빙고! 당신은 과습에 당첨되었다.  


그때서야 구글에 질문을 하면 이미 좀 늦은 경우가 많다. 초보 식물 집사는 식물을 말려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과습으로 죽이는 경우가 많다고. 화분과 흙의 종류, 공간의 특성과 빛의 양에 따라 식물이 필요한 물의 '적당히'의 양이 다르기 때문에 '보통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식의 답이 늘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처음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과습의 개념이 없다. 물을 많이 주면 뿌리가 썩는다는 사실은 식물 하나쯤은 죽여보고(?) 나서야 알게 된다. 무슨 말인지 몰라 흘려 보았던 '식물 키우는 법'이 스쳐 지나갈 것이다. 반그늘과 그늘의 차이가 무엇인지, 흙이 마른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바람이 식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 마음대로 괜찮겠지 싶어 또 물을 자주 주면 어떻게 되는지, 같은 읽었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


신박한 세상이었다. 식물 키우기에는 '정답'과 '정량'이라는 것이 대체로는 없어서, 뭐든 상황에 맞게 '적당히'를 키우는 이가 맞춰주어야 했다. 자꾸 들여다 보고 자주 물을 준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관심을 끄고 잊어버려서도 안된다. 꾸준히 들여다보지만 필요한 만큼의 관심과 물만 주어야 한다. 직사광선이 과하면 잎이 타고, 그늘에만 있으면 힘을 잃는다. 아, 이거 아이를 키우는 것 혹은 인간관계까지도 비슷한 이야기 아닌가. '적당히'를 경험으로 찾아내는 것.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아무리 지식으로 알고 있어도 결코 제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육아를 해본 것은 아니니까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초보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은 거 아닐까. 어느 부모나 본인이 알고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운다. 다만, 문제는 그 과정을 시행착오를 겪어 나가면서 함께 배워나가기 때문에 설사 지금의 방법이 잘못된 방법이라 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육아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진다. 그 부모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방법으로. 때로는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전문가 없이는) 경험으로도 쉽게 알기 어렵다. 식물이 죽어도 왜 죽었는지 끝내 이유를 못 찾을 때도 있는 것처럼. 육아의 시행착오나 실수로 죽음까지 가지는 않는 편인 것은 다행일지 모르나, 여전히 이 땅에는 어떤 시절의 트라우마를 품고 사는 어른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모르고 한 잘못도, 결국 끝까지 알 수 없는 잘못들도 다 슬프다.


나도 첫 아보카도 나무를 과습으로 죽이고 나서야 과습에 대해서 알았다. 그 이후로 차근차근 식물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최근에도, 잘 자라던 몬스테라를 '생각난 김에 해치우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해 한겨울에 분갈이를 서두르다 사단을 냈다. 노랗게 변하는 잎들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 겨우 살아남은 잎들을 한 뿌리씩 수경재배로 살려가며 인내심을 배웠다. 서두르면 뭐든 망한다는 것과 내가 괜찮겠지 하는 마음과 상대의 마음은 언제나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끝은 아직 먼 것 같지만, 나는 초보의 단계에서 각기 다른 식물의 '적당히'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몬스테라와 선인장의 사이클은 같을 수 없으니까. 물을 필요 이상으로 자주 주는 것은 영양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것을, 예쁘기만 한 밑이 막힌 유기 화분은 환기가 얼마나 안 되는지를, 어떤 관심은 필요하고 어떤 관심은 필요하지 않은지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른 시도를 해 보면서 배우고 있다. 적어도 자꾸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본 만큼 물은 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루하루 배워가다 엄마 생각을 했다. 엄마도 그랬겠지. 방문을 두 번 열어보고 싶어도 참고,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는 내가 걱정되어도 잔소리를 참으면서, 적당한 거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여전히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면서 서로에게 적당한 정도를 찾아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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