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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Feb 11. 2021

당신의 작고 안온한 세계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위하여





생일은 대게 두 번째 설 연휴와 봄방학 사이의 어디쯤이었다. 덕분에 시간에 휩쓸려 학창 시절에는 제대로 된 축하를 받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끼리의 의식이랄 것이 있다면, 음식 솜씨 좋은 엄마가 미역국과 생일자가 원하는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과 작은 케이크에 초를 꽂아 함께 부는 것 정도였달까.






어린 시절에 갔던, 몇 번의 생일잔치를 기억한다. 파티라는 말보다 잔치라는 단어가 어울리던 시절이었다. 아무나 잔치를 열었던 것은 아니고, 대게는 집이 좀 산다던, 그러면서 반장이나 부반장 같은 감투를 쓴 아이들이 주로 대상이었다. 그네들의 생일잔치는 꽤 거창해서, 열명인지 스무 명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상당히 많은 친구들이 그 친구의 집에 모였다. 옹기종기 상에 둘러앉아 생일 선물로 산 학용품을 교환하고, 케이크와 피자, 치킨 같은 것들을 나누어 먹고, 밖에 나가 동네 놀이터에 함께 뛰노는 것이 코스였다.


그 시절의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도 매번 성적순으로 반장 후보를 칠판에 적고 나면, 내 이름이 어김없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럼 나는 벌게진 얼굴로 손을 들고 개미만 한 목소리로, '저는 기권하겠습니다'를 매 학기마다 말해야 했다. 왜 매번 하지도 않을 일을 번복하느라 붉어진 얼굴로 의사 표시를 해야 하는지 불만스럽다가도, 이번에도 성적순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저 반장감은 정해져 있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내 일이 아니었다. 과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받는 A나, 이미 반장감으로 리더십이 있다고 평가받는 B, 아니면 목소리가 크고 인기가 많은 C 중에 한 명이 될 것이다. 이걸 하려고 하면 부모님이 반 전체에게 간식을 돌리거나 선생님을 보러 오기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집은 그 정도로 거창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학교에 온다고? 어쩐지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종종 A와 B와 C는 한 명일 때도 있었고, 대게 거기에는 부모의 부도 옵션으로 함께 했다. 거 봐, 내 일이 아니라니까. 게다가 반장은 남자아이가, 부반장은 여자아이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모든 번거로움을 뒤로하고 도전해서 뽑힌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반장이나 미화부장 따위였을 것이다. 0표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그러느니 기권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생일잔치를 여는 아이들의 집은 근처 아파트 단지의 가장 큰 평수나 어느 주상복합주택의 고층 같은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아파트는 단지마다 평수가 크게 차이 났다. 우리 가족은 그 아파트의 가장 작은 평수에 턱걸이로 안착했지만, 어쨌든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근처의 다른 형태의 집에 사는 것보다 나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성적이 나쁘지 않으며, 별스럽지 않은 나는 종종 생일잔치에 초대되었다. 초대된 집에 가면, 대게의 아이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기 집보다 훨씬 넓었으니까. 그 안을 우다다 뛰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공주의 방처럼 꾸며진 방을 보며 신기해했던 적도 있다. 집에 와서는 엄마에게, 엄마, D는 엄청 부자인가 봐, 집이 80평쯤 된대, 하는 소리를 소감이랍시고 떠들어댔다.


그런 생일잔치에 다녀오고 나면 왠지 주눅이 들었다. 그러니까, 금수저 재질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전교 1등 하는 아이, 컴퓨터 경시 대회에서 상을 받는 아이, 비싼 미제 학용품을 자랑하는 아이들은 대게 아파트의 가장 큰 평수에 살았다. 그들의 부모님은 의사나 교수, 사업가 같은 직업을 가졌다고 했다. 나는 언제부터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반 아이들의 1/3쯤을 초대하면 포함되지만, 소수 이너서클에는 포함되지 않는 자리. 내 위치는 대략 그 언저리였다.


장래 희망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내주면, 남자아이들은 과학자나 교수, 의사 같은 꿈을 써냈고, 여자아이들은 선생님을 적어 넣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음대를 나오고 아빠가 사업가라는 부반장 E가 당당하게 디자이너가 꿈이라고 말했을 때, 그래서 나중에 미국에 유학을 갈 거라고 말했을 때, 나는 너무 부러워서 분한 마음이 되었다. 나도 미술 수업을 좋아했고, 또 곧잘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무슨 천재적인 재능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그런 재능이 없는 사람은 미술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천재가 아니면 대학을 졸업해봤자 미술학원 선생님이 되겠지, 어쩐지 열 살의 나에게는 찌질하게 느껴지는 삶이었다. 동네 미술학원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보다는 공부를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어야 할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선생님이 되었으면, 바랐다. 가난한 형제들에 치여 대학을 갈 수 없었으므로, 네가 그걸 하면 좋겠다고 했다. 여자 직업으로 최고 아니겠니 하는 말과 함께. 그때 종이에 장래 희망을 선생님이라고 적으면서, 뒤꿈치가 떨어진 오렌지색 양말 목을 잘라 인형 옷을 만들며 나도 (그게 뭔지 잘 모르지만)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E만큼 부유하지도 않고, 미술부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도 아니니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줄 알았다. 도대체 왜 그런 마음을 새긴 걸까. 나는 그런 꿈을 꾸면 안 된다고.




그렇게 가끔씩 생일잔치에 초대되던 어느 날, 나도 생일잔치라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그런 걸 해 봤으면 하는 마음에 엄마를 졸랐다. 엄마, 나도 생일잔치하고 싶어. 엄마는 친구 몇 명을 부를 거냐고 물었고, 나는 자신도 없으면서 음 대여섯 명? 하고 답했던가. 잘 모르겠다고 했던가. 그날 엄마는 제사 때나 쓰는 커다란 상을 꺼내 피자와 치킨, 떡볶이 같은 것들을 잔뜩 차려두고 6명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집에 데려간 친구는 딱 둘 뿐이었다. 늘 함께 다니는 단짝 친구 하나와 아마도 작년에 단짝이었던 또 다른 친구. 그날 내내 초조했던 것 같다. 누구를 부르지? 하지만 더는 부를 사람이 없었다. 안 그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 나는 내 생일인데 우리 집에 놀러 갈래? 라는 말이 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차렸던 음식은 많이 남았고, 우리 셋은 실컷 먹고 일어나 놀이터에 갔었던가.



그날 이후로, 다시는 엄마에게 생일잔치를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생일 파티 자리를 만든 적이 없다. 그때의 그 생경한 기분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나는 단짝 친구 한 두명만 있으면 충분한 삶을 살았다. 북적거리는 집단에 포함되는 일은 어쩐지 불편하고, 남의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어느 해에는 대학교 OT 때 생일이 겹쳐, 그 큰 숙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하나도 내 것 같지 않았다. 어딘가 어정쩡하고 어색한 얼굴이 되어 감사합니다, 답했을 뿐이다. 내 안에서 기능하는 세계의 규모는 이 정도였구나.






어떤 사람은 있는 힘껏 소문을 낸다. 오늘 제 생일입니다! 축하해주세요. 온라인에서 사람들은 쉽게 축하 인사를 남긴다. 축하해요! 말 한마디를 남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그럼요, 소문은 원래 자기가 내는 거예요! 하며 나도 몇 번이나 낯 모르는 누군가에게 팬심을 담아 축하 인사를 전하곤 했다. 내 입으로 생일임을 고백하는 것은 어쩐지 쑥스러운 일이다. 그런 용기를 낸 사람에게는 충분히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에게는 그런 경우가 적용되지 않는 걸까. 생일이라는 말은 쑥스러움을 담지 않고 말할 수가 없다. 말하고 나서도 멋쩍어지는 기분을 견디기 어렵다. 어쩌면 말하고 나서도 축하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일까. 생일 파티에 노쇼가 잔뜩 생겨 기분이 엉망이 되어버릴까 봐?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는데도, 두려움은 인지를 왜곡시킨다. 사실 열 살 생일의 그날, 내가 용기를 조금 더 내어 몇 명이라도 초대를 했다면 6명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별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일 파티를 한다고 친구를 부른다고 해서, 누군가가 '네가 감히 나를 초대해?, 안 가.' 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다, 결국엔 일을 벌이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코로나 시대이기도 하니까. (유럽은 lockdown과 야간 통행금지 기간이다)



어쩐지 묘한 시간이다. 왠지 즐거운 일이 생겼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그런 마음은 들키고 싶지 않다. 그거 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싶지만, 축하의 말이 반가운 것도 사실이라서. 


알리지 않아도 다가와서 산책을 제안하고 작은 선물과 카드를 내미는 친구들 덕분에, 거창한 모임 없이도 한 주 내내 따스한 볕이 드는 부엌에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티라미수를 만들고 치즈 케이크를 굽는 시간이 신이 났다. 티(tea) 묶음과 애플 시나몬 페이스트리, 직접 뜬 니트 조각, 작은 식물들, 커피, 따뜻한 먹거리들, 다른 언어의 생일 축하 노래, 그리고 마음이 담긴 쪽지들까지. 그 옛날의 열 살의 아이에게 전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너의 작지만 안온한 세계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단다, 걱정하지마. 하고.




이탈리안 홈메이드 티라미수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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