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 불운했던 일 년, 2020년을 뒤돌아 본다면
매일이 같으면 어떤 걸 써야 하지, 하지만 매일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일정한 루틴은 이어지면서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걸 먹었다. 비슷한 시간에 잠을 청했지만, 빛이 가득한 날과 비가 맞아주는 날의 기상 시간은 달랐다. 어제는 강가를 걸었고, 오늘은 공원을 산책한다. 햇빛 귀신은 하루의 일조량에 따라 기분이 바뀌기도 한다. 일기 예보에 24시간 중 해가 몇 개나 그려져 있느냐가 어쩌면 요즘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 아니었나. 다행히 해가 길어지는 시기라서, 희망이 느껴진다.
어느 날엔 밤이 너무 길어서 케이크를 구웠다. 레시피를 체크하느라 유튜브를 보고, 재료를 미리 사다가, 계량을 한다. 비율을 맞추고 순서를 정해서 물컹한 어떤 반죽이 고소하고 달큰한 냄새를 풍기는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과정은 대게 두어 시간이 걸린다. 띵! 하고 울리는 오븐의 마침표 같은 알림음이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다. 오늘도 내가 뭔가를 만들었네. 그걸 한 입 먹고, 고마워! 하는 한 마디와 웃음을 보려고 그걸 만들었다.
어느 밤엔 한국 드라마를 몰아서 본 적도 있다. 한쪽에 직접 버터에 튀긴 팝콘을 한 통 그득 두고, 바스락 거리면서 13인치의 노트북 화면으로 2021년의 한국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요새 한국 드라마는 전부 핑크와 보라, 하늘빛의 파스텔톤으로 도배되어 있다. 물론 예쁜데, 근데, 너무 다 그래서 좀 그래. 드라마는 환상의 세계지, 현실이 아니라. 그렇지만 그렇대도 좀 너무해. 이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 사회에서 조금은 떨어져 나왔다는 증거일까.
어느 밤에는 글을 썼다. 닿지도 않는 어딘가에,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뭐라고 자꾸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은 자신이 없으니까. 책은, 사실 많이 읽지 않았다. 한글 책은 몇 개 없고 영어 책은 아무래도 한글만큼 수월하지 않으니까 읽으면서 쉬는 느낌이 아니라 챌린지하는 마음이 되고 그래서 손이 잘 안 간다. 어느 날엔 예능을 잔뜩 보았지만, 그건 말하지 말아야지. 재미만을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은 늘 죄를 짓는 기분이다. 왜지, 왜 놀고 쉬는 것은 죄라고, 누가 그렇게 정해둔 걸까.
집 안의 식물을 좀 더 열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괜히 잎의 먼지까지 닦는 날도 있다. 길거리의 가로수나 시장에 나온 꽃이 피는 일들에 좀 더 민감해졌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의 끝에도 새 순이 올라오는 것이 보일 정도로. 새 잎이 연둣빛이었다가 초록빛이 되어가는 과정이 생명의 생동감으로 느껴졌다. 반려 동물이 있었다면, 이미 절친이 되었을 걸.
뉴욕타임스에서 75명의 아티스트에게 인터뷰를 했다. 아주 우울했던 지난 일 년에 대하여.
사람들의 인터뷰는 사실 크게 보면 비슷했다. 집에 오래 있을수록 공간에 대한 생각이 늘어나고, 편안함을 추구하며, 구성원 간의 조율이 중요해지고, 먹는 것의 퀄리티와 운동에 신경 쓰게 된다. 영화와 드라마를 몰아보거나 책을 본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집에 들어오는 햇빛은 더욱더 중요해졌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비슷하다. 그런데도 또 다르고.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그러니까 똑같지 않은 이야기들은 역시 유머다. 유우-머. 거창한 표제보다 한 번 웃을 수 있는 밈이 훨씬 더 효과적인 시대이니까. 지난 일 년에서 유머를 꼽자면 뭐가 있을까. 나 같은 사람은 늘 진지한 편이라서, 웃긴 일을 찾는 게 이렇게나 어렵다. 화장실 하수구에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아 청소를 해 보겠다고 시도했다가 바닥을 물바다로 만든 일? 그래서 결국은 배관공을 불러야 했던 일? 그게 정말 가장 웃긴 일이 될 수 있을까.
인상적인 질문은, 만약 당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고립되어있게 될 줄 알았다면, 뭔가가 달라졌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의 묘미는 그거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인생은 실전이라서, 예비나 준비가 없다. 아무도, 전 세계인 중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이렇게 오래도록 바이러스 하나로 고통받고 고립될 줄 몰랐다. 이래서, 오늘의 행복이, 오늘의 최선이, 오늘의 건강이 제일 중요한 것이구나 실감한다. 사실 꼭 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당신의 내일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정말 모르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의 일 년이 정말 최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생산적인 면으로 따져 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겠지만.
지난 일 년이 무 자르듯이 어느 날 끝! 하고 끝나지 않을 걸 안다. 사실은 관성이 더해져 이젠 무엇인가가 바뀌는 것이 더 두려운 것도 같다. 지난 시간 동안 깨달은 것들을, 이를테면 오늘이 제일 중요하다는 그 마음을, 앞으로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