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식대로 맺는 결말
어떤 이별에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고, 결정을 번복할 의사도 없는데,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끝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신과 의사의 말이니까 일리가 있는 이야기겠지? 흐지부지되는 것을 못 견디는 나는, 그래서 사라져 가는 끝을 붙잡고 굳이 굳이, 그러니까 이게 끝이라는 거지? 되묻고, 기어코 답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연인이든 친구이든, 그 어떤 관계든. 물도 밍밍한 것이 싫어서 찬물이 아니면 뜨거운 물만 마시는 나는, 흐지부지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흐릿해져 가는 것을 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늘 굳이 그러고 말았네. 아마 어떤 이들을 질리게 했을 것이다. 그저 덮어 놓으면 덧나지 않았을 상처를 들쑤시는 내가 미웠겠지. 나는 대체 왜 이럴까. 끝에 온점이 제대로 찍히지 않으면 내 몸 어딘가에 무언가 남아있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을 견디기 어려워진다.
오늘도 강가를 산책하러 나갔다. 강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려는 마음으로 조금은 뻑뻑한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본다. 오늘의 커피는 플랫 화이트(flat white). 진한 커피라서 좋다. 보통 라떼보다 작은 잔에 담아주지만 에스프레소 더블 샷이 들어간다. 라떼는 더 큰 잔에 에스프레소 원 샷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우유로 채워지니까, 플랫 화이트가 훨씬 더 진한 셈이다. 호주에서 유래된 커피라는데, 정신을 깨기에는 이것만 한 커피가 없다. 블랙 레터링으로 채워진 카페 인테리어는 내가 우주 제일 '힙'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색을 제외하면 뭐든 세련되기 쉬워진다. 명암만 조절하면 되니까. 모든 직원들은 젊은 남자이고, 빠르고 활기찬 톤으로 대화를 한다. 이런 분위기는, 아마 내가 스몰토크에 자신 있는 사람이었다면 반가워했겠지.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친절한 것이 좋다가도 이내 부담스럽게 느끼는 내향형 인간이라, 결국 긴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아시안 더치처럼 보이는 남자의 말은 게다가 빨라서, 나는 계산을 하고 나서 Thank you 도 한 번에 못 알아듣고 sorry? 너 뭐라고 했니? 다시 물어보고 말았다. 아니, thank you라고. 아, 어.. 천만에!(어색) 귀가 유독 안 트이는 날들이 있다. 이러니 저러니 나는 서비스직이 천직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무뚝뚝한 모습으로 손님을 받으면 손님이 다 떨어져 나가겠지. 천성이 아닌 것을 천성처럼 가지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가끔은 내가 혹시 꼰대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걱정하게 된다. 카페를 나오다 보니 내부의 식물이 많이 시들었던데, They look so sad 라고 라도 말해주고 나올 걸.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고 나서는 남의 식물에도 눈이 간다. 사람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만 눈길이 가기 마련이니까.
강을 다리 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과 물 바로 곁에서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이 나라는 수로나 강 등, 물이 흔해서 전 국민이 어릴 때 수영을 의무적으로 배운다고 한다.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한 생존 수영이랄까. 그래서인지, 웬만한 강이나 호수, 물가에 펜스가 쳐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한국 같았다면 누구 하나가 진즉에 빠졌거나, 그래서 왜 제대로 펜스를 쳐두지 않았느냐고 지방자치단체에 민원이 한참 들어오고도 남았을 것 같다. 생존 수영을 의무로 배우지 않은 코리안인 나는, 펜스가 없는 강가에서는 왠지 불안하고 서늘한 기분이 된다. 툭 건드리면 빠질 것 같다. 물결이 넘실대면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어 안전지대를 확보한다. 그나마 돌들이 방파제처럼 경사를 이루고 이어져 있으면 괜찮은데, 절벽처럼 콘크리트가 끝나는 곳이라면 그 옆을 한참 떨어져 걷는다. 무서워, 저 물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다. 빠지는 상상을 하고 싶지 않다. 춥겠지. 물도 꾸정물 색인걸.
오-래전 첫 유럽 여행에서 포르투갈의 로까곶이라는 관광지를 방문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이 붙은 절벽. 그 절벽 끝에 수평선이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가 있던 곳. 왠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마음이 되어 한참을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공포를 느껴야 했다. 바다를 실컷 볼 수 있도록 절벽 가까이에 오솔길에 나 있는데, 그 길에는 펜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발만 헛디뎌도 추락사할 것 같은 아찔한 기분. 그 날 우연히 흰 제복을 입은 한국 해군인지 학생들인지 모를 사람들을 단체로 스쳐 지나갔는데, 나중에 그들 중 한 명이 절벽에서 실제로 추락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큰 격차로 꿀렁이는 물은 잠시만 바라보아도 금세 어지럼증이 돈다. 지상에 발을 붙이고도 이런데, 아마도 배는 멀미 때문에 못 탈 것 같다. 그래도 큰 숨을 들이쉰다. 산책을 나왔으니까, 숨을 들이쉬어 주어야지. 남들보다 겁이 많으면 사는 이유를 찾기 더 어려울까? 어떤 드라마의 OST가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데, 이 드라마도 여전히 내 방식대로 끝을 맺어주지 못해서 그런가 잠시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결말을 어떻게 내 방식대로 맺나 욕심이 과하다 싶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 마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