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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May 16. 2020

당신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입니까

삶에 여한이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당신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인가요.

한글로 버킷 리스트라 하면,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어떤 것에 대한 희망적인 서사 같지만, 단어의 유래를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실은 '죽다'라는 의미의 '양동이를 차다(Kick the Bucket)'란 영어에서 유래된 버킷 리스트는,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리스트인 것이다. 생각난 김에 <버킷 리스트>라는 영화도 다시 봤다.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의 오래전 연기를 볼 수 있고, 무슨 할아버지들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일인가 싶어 진다.


버킷 리스트라, 뭐가 있을까.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일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있고, 경험과 배경이 다르다. 저마다의 버킷 리스트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 클리쉐 같은 내용을 생각해보면, 스카이다이빙이나 번지 점프, 세계 여행 같은 것들이 있겠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적은 나의 버킷 리스트는 이렇다.

창작자로서의 전시, 출판, 기획

아프리카 여행

팔목의 아주 작은 미니 타투.  



10개를 적어보려고 했는데, 5개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더 작은 단위로 쪼개 보자면 많은 리스트가 생겨나겠지만, 크게 보면 이것뿐이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살면서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해 본 것 같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대할 때면 왠지 모를 용기가 생겼다. 여행도 다시고 싶은 만큼 다녀봤고, 번지점프나 스카이 다이빙, 행글라이딩 같은 레포츠도 해 봤다. 저 리스트의 최상단에는 실은 유럽에서 살아보는 것(뭘 이루는 것도 아니고)이 있었고, 디테일이야 어찌 되었건 그 명제 자체는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패스. 타투는 아직 어떤 도안을 할지 결정짓지 못했을 뿐, 몇 년 내로 할 것이다. 아프리카 여행은 이 판데믹이 끝나고 나면 언젠가 한 번은 갈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남는 것은 창작자로서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뿐이다. 사실 인생의 메인이라 해야 할 커리어를 이제껏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을 제외하고는 흥미와 호기심이 동해 하고 싶었던 웬만한 일들은 거의 해 봤다. -안다, 사이드는 사이드일 뿐, 메인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걸. 그런데 나에게 남은 게 이런 것 들뿐이다.- 마추픽추와 우유니 소금사막을 보았고, 산티아고 길도 걸었다. 태풍과 지진에서 살아남아 이젠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 체제의 가운데에 있다. 별을 보러도 다녀봤고, 음악도 배워봤고, 몸도 써 봤다. 먹고 싶은 것들도 어떻게 해서든 그때그때 먹었다. 사고 싶은 것들은 많겠지만, 죽기 전에 꼭 갖고 싶다, 그런 소비욕은 없다.


이력서에 별로 적을 것 없는 삶을 살아온 죄로 때때로 떳떳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회의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음. 적어도 인생을 희생과 양보로 점철 짓거나 그래서 간절히 소망한 어떠한 목표를 놓쳐보지는 않은 것이다. 언젠가 노홍철이 자신은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더라도 여한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와, 저렇게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 부럽다고 생각했는데, <이터널 선샤인> 속 클레멘타인을 보며 저렇게 마음껏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돌아보니 그렇다. 지금의 나도 인생에 큰 여한은 없는 것 같다. 아닌가,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건 무기력하다는 말이거나 간절함이 사라졌다는 뜻일까.


물론, 아쉬운 부분이야 셀 수 없다. 가심비 대신 가성비의 최대치를 기대하며 사는 삶이었다. 언제나 시간과 돈을 쓰는 것에 전전 긍긍했고 그것이 나의 많은 부분을 갉아먹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삶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시간과 돈은 늘 부족하다. 그 마음은 어쩔 수가 없지만, 다른 방식으로 삶을 일궈온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싶지도 않다.




막다른 골목에 멈춰 설 때면, 새로운 시작이 나를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한 상점들을 보며, 밖에 나가 맛있는 빵을 사고, 오랜만에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만든 라떼를 한 잔 하고, 원두 가게 사장님과 다시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찐득해 보이는 레몬 드리즐 케이크도 한 판 구웠다. 파우더 슈거를 왕창 넣고! 행복할  있지. 아주 작은 일들로도.


절망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기회는 생길 것이다. 실은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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