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대로부터 독립했다

[페미니스트의 탄생 05.] 거리낄 것 없는 그날을 위하여

by 틂씨




느낌이 쎄했다. 샜구나.

울퉁불퉁한 돌길의 덜덜거리는 진동을 피해 잠시 엉덩이를 자전거 안장에서 떼었다가 다시 앉은 순간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패드에 꾸욱 엉덩이를 대고 눌러앉은 기분. 생리대를 하고 자전거를 타면 그런 기분이 된다.


네덜란드에서는 대중교통보다 자전거를 훨씬 많이 이용한다. 오죽하면 더치들은 자전거를 들고 태어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 나도 이 나라에 오자마자 자전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집의 위치가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지만 걷기는 좀 애매하게 먼 곳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30분씩은 자전거를 탔다. 그런데 생리 때 자전거를 타는 일은 여러모로 곤란했다. 안장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엉덩이와 사타구니가 안장에 맞닿는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생리대는 위아래로 짓눌렸다. 그 찝찝한 기분이란. 대안을 찾아야 했다.






남들처럼 보수적인 한국의 가정에서 자랐다. 십 대일 때 우리는 아무도 입 밖으로 생리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않았던 것 같다. 들키면 큰일 나는 일처럼, 쉬쉬 하며 숨겼다. 대신 ‘그날’이나 ‘마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로 돌려서 표현했다. 나는 엄마에게도 부끄러워서 생리통이라는 말을 못 하고 그냥 배가 이상하게 아프다고 말하곤 했다. 언젠가부터 내게는 생리라는 단어 자체가 검붉은 핏덩어리를 형상화한 글자처럼 느껴졌다.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 순간, 걸쭉한 핏덩어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불러 봤을 리가. 그 단어는 내게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한 감각으로 남아있다.


오랫동안 패드를 제외한 다른 제품을 써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했다. 대학교 앞에서 공짜로 나누어 주던 탐폰도 누가 볼 새라 가방 안쪽에 감추느라 바빴고, 막상 용기를 내어 포장 상자 겉에 쓰인 사용법을 읽고 따라 해보려 해도, 처음엔 제대로 된 위치에 탐폰을 끼워 넣을 수가 없었다. 충분히 깊이 넣어야 오히려 이물감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닫기 전까지는 이미 낯설게 느껴지는 감각과 공포를 극복할 길이 없었으므로, 어플리케이터가 미처 다 들어가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으어어 하며 다시 빼버렸던 것이다. 프로모션으로 받은 작은 탐폰 한 상자는, 한 개가 빈 채로 책상 서랍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했다. 그 이후에 다시는 같은 시도를 하지 않았고, 그저 나는 역시 그런 걸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자전거를 타지 않을 방법은 없으니 생리대의 대안을 찾아야 했다.

액티브한 활동에는 탐폰이 유리하다더라. 때마침 한국에서 생리대 파동이 일었다.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적절한 때가 온 것 같았다.


생리를 생리라고 부르지 못하던 유교인에게는, 모국어 대신 다른 언어를 쓰는 일이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큰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생리’라고 발음하는 것은 어쩐지 멋쩍은 일이지만, 그것을 영어로 ‘period’나 ‘menstruation’이라고 부르는 일은 한결 편했다. 내게 외국어를 쓰는 일은 눈이 나쁜데 안경을 쓰지 않고 책을 보는 일과 비슷했다. 대략적인 것은 읽히지만 섬세한 무엇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운 상태. 모국어로 어떤 단어를 이야기하면 그 의미가 때로는 200%의 강도로 와서 귀에 꽂히지만, 외국어로 하는 말은 내게 잘해봐야 80% 정도의 선명함을 줄 뿐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언어를 쓰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좀 더 과감하게 만들었다. 사회적 익명성을 보장받은 기분. 슬프게도 나는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생각에도 사회적 시선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J0QatzktZ0

Say it, "Menstruation!". (말해봐, "생-리!") in <20th Century Women>




유럽의 탐폰은 대게 어플리케이터가 없다. 어플리케이터란 탐폰의 길을 안내해주는 보조 기구 같은 것이다. 재질이 플라스틱이라 그것이 없으면 그만큼 플라스틱 쓰레기가 줄어든다는 이야기지만, 대신 탐폰을 손으로 직접 밀어 넣어야 한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질내 삽입 위치를 찾을 수 없어 금세 이물감을 느껴 다시 빼야 했던 적도 있고, 그게 자궁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안 나오면 어떻게 하지 하는 공포에 신경이 곤두섰다.- 안쪽이 자궁경부로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 산부인과에 방문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포기할 수 없었다. 방향과 깊이를 다시 가늠하고 뺐다 넣기를 여러 번, 멀쩡한 탐폰을 버려가며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관찰했다.


몇 번의 실패와 도전의 경험 끝에 적당한 깊이와 위치, 크기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일단 적응하고 나니, 다시는 생리대를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왜 이런 광명을 이제야 찾았나 하는 마음과 동시에,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아마도 평생 이런 시도를 하지 않고 그냥 익숙한 대로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고,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에 나는 굳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 사회적 시선이 루즈해지면 개인적 도전도 진입 장벽이 낮아진다. 그런데 갑자기 좀 한심한 기분이 되었다. 고작 탐폰을 사용하는 것이 삼십 대인 내가 도전이라 부를 일이던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용기를 조금 더 내어 또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여기서는 생리 컵을 쉽게 온라인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직구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배송비도 싼데,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Why Not? 하는 마음으로 많은 유튜브와 블로그의 후기를 리서치한 끝에 스웨덴 출신의 첫 생리컵 L을 구매했다. 이론적으로라면, 이것으로 나는 더 이상 지구에 일정한 쓰레기 더미를 매달 배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첫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설명서를 읽어도, 유튜브를 보아도, 적어도 손가락 세 개정도의 크기인 생리컵이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다는 건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막상 배송 완료된 생리컵을 받아 들었을 때는, 이게, 내 몸에, 들어간다고? 하는 의구심이 계속 샘솟았다. 하지만 완벽한 것 같았던 탐폰에도 독성 쇼크 위험 때문에 8시간 이상 착용하면 안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극복하고 싶었다. 이것만 성공하면 생활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생리컵의 구체적인 사용법과 후기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생략하겠다.

경험담만을 적자면, 처음 서너 달 (3-4주기) 까지는 그다지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프리랜서로 외부 활동을 조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초기 관찰과 적응도 무난히 할 수 있었다. 생리컵은 탐폰보다 크기가 더 크고 접는 방법이나 이용법도 다양하다. 제자리를 찾기도 어려웠고, 어느 깊이로 넣어야 적절한지, 언제 컵을 갈아야 하는지, 제대로 착용이 된 건지, 한 번에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경험을 통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었다. 매 달, 조금은 결연한 마음으로 생리컵을 소독하고 주기를 시작했다. 매번 넣는 것보다 빼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실리콘의 탄성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근육이 긴장해서인지 한 주기가 끝나고 나면 근육이 뻐근하고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편안해지기 까지는 서너 달의 시간과 연습이 필요했다.


일단 실리콘 컵 이용에 적응되고 나서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소량의 탐폰, 혹은 라이너를 가끔 사용할 뿐, 대부분의 주기를 생리 컵으로 커버했다. 자전거를 타던 그 어떤 활동을 하던, 내게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 쓰레기도 대폭 줄었다. 매번 생리 때만 되면 활동을 피하고 집에만 머물렀던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어쩌면 앞으로 생리를 할 날이 이미 해온 날보다 더 짧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피의 연대기, 2017, 김보람 감독


*인류의 절반이 매달 흘리는 피, 이것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다면 김보람 감독의 영화 <피의 연대기, 2017>를 추천한다. 영어 제목은 <For Vagina‘s Sake> 대략, '질을 위하여' 정도로 해석하면 비슷할까. 이 다큐멘터리는 생리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사회적 터부로 이어지는 시선을 잘 짚어준다. 생리, 그거 여자들이 히스테리로 써먹는 핑계 아냐?라고 아무것도 모르고 헛소리를 날리는 남성들에게도 진지하게 추천한다. 모르면,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한다.




자신의 몸을 알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보람찬 일이다. 컵을 이용하면서 생리주기를 상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어플처럼 매달 날짜를 체크하는 수준이 아니라, 액셀로 표를 만들어 시간 간격으로 기록했다. 패드처럼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컵의 사용법과 용량을 파악하는 데 필요했다. 시간별로 양과 디테일을 기록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날짜별이 아니라 시간별 패턴을 읽을 수 있었다. 제때에 바로 피를 받아 버리다 보니, 질 내부에 남아 있는 양이 얼마 없어서인지 생리 기간이 만 4일 정도로 줄었다. 시간대별 사이클을 알게 되니 구체적인 예측도 가능해졌다. 기록과 확인을 반복하다 보니 꽉 찬 컵은 어떤 느낌인지, 하루에 몇 번쯤 컵을 갈면 되는지, 그래서 전체적인 양은 어느 정도 되는지, 언제 주기가 끝날지가 명확해졌다.


이제는 생리컵 없던 과거를 생각할 수 없다. 지구 상의 모든 여성에게 추천하고 싶은 아이템이다. 그리고 시간대별 기록도. 기록이 쌓이면 임의의 추측이 아니라 명확한 자신의 사이클과 양, 흐름이 예측 가능해진다. 나는 이제 언제 터질지 몰라 생리대를 잔뜩 싸 갖고 다니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고, 깔끔하고 쾌청한 기분으로 운동을 하거나 자전거를 탄다. 안장 위의 젖은 생리대에 주저앉을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보다 내 몸의 메커니즘을 잘 알고, 그만큼 자신감이 생겼다. 생리컵이 금세 꽉 차는 피크는 48시간 정도다. 한 달의 1/4 미궁의 한 주를 할애하는 대신, 48시간만 그럭저럭 견디면 되는 꽤나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십 대까지는 어렵더라도 스무 살의 나에게 당장 달려가 알려주고 싶다.



물론 생리 컵의 부작용을 겪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구매한 컵이 큰 문제없이 잘 맞는 편이었고, 적응도 잘했다. 삶의 질이 훨씬 나아졌고 몸도 가벼워졌다. 이 모든 변화는, 내게 환경과 언어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생각의 변화가 없었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끈기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았던 의지까지. 당신은 당신의 몸과 매달 흐르는 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한 번쯤은 그것을 탐구해 볼 가치가 있다. 당신의 몸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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