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의 탄생 08.] <D.P.>와 <82년생 김지영>의 공통점

by 틂씨





김보통 작가의 톤 앤 매너를 좋아한다. 그가 연재하는 에세이를 꼬박꼬박 읽었고, 만화도 열심히 보았다. 작가 스스로가 밝힌 대로, 그는 늘 존재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그런 태도와 시선이 좋았다. <D.P. 개의 날>은 웹툰이 아닌, 넷플릭스 시리즈로 접했다. 그동안 내게 가장 기억에 남은 군대 이야기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 윤종빈 감독)와 기안 84가 초창기에 그렸던 만화 <노병가>(2009)가 있다. 둘 다 극 사실주의라고 정평이 난 이야기들이다. 이번 <D.P.> 시리즈도 비슷한 평을 듣는다. 극적인 하이퍼 리얼리즘에 다들 PTSD가 올 것 같다고 들 한다.








원작가,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 김보통 님의 인터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11460.html?fbclid=IwAR1qathLk8gb95uV-zRVE2NAdprs5zKJ-rZ4ygJxaFaVkttZMzOhk6bBcrI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이 부분이 가장 눈에 띈다.


착시 현상 - 내가 사고를 당하지 않으면, 사고당한 이의 이야기가 과장처럼 느껴지는 것.


작가는 작품 후기로 사람들에게 '작가가 미필이냐'와 '우리 부대 출신이냐'는 반응을 동시에 들었다고 했다. 한 평가는 너무 고증이 잘 되어서이고, 또 다른 평가는 상황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동시대에 '군대'라는 일정한 코스를 지나온 일정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완전히 상반된 평을 내리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작가는 그것을 '착시 현상'이라고 불렀다. 어떤 상황은 비슷한 일을 겪은 이에게는 공감으로 와닿지만, 그런 일을 경험하지 않은 이에게는 과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작가는 둘 다 아니라고 했다. 에피소드는 당시(2015년)의 실제 기사를 기반으로 한 현실적인 이야기였고, 자신의 D.P. 생활 경험과 주변인이 모티브가 되기는 했지만 창작을 가미했다고. 군탈 체포조로서 경험한 케이스들이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극적일 수 밖에는 없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과장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말 중 어떤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 물론, 특정 시대의 군대를 단순히 일반화 하기에는 너무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대 출신 아니냐' 혹은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고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과장된', '어쩌다 한 번 있는 불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군대라는 폐쇄적이고 한정적인 세계에서 만연한 많은 문제들이 사라지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단 정해진 네모난 상자가 옳든 그르든 간에, 그 상자에 맞지 않는 사람은 구조적으로 도태된다. 그런 시스템 안에서는 개인의 고통은 드러나지 않고, 부조리는 은폐될 뿐이다. 고통받는 자의 목소리 하나로, 구조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_109323769_411e8865-2cf2-47fa-a169-90179f842122.jpeg 82년생 김지영, 2019



아주 비슷한 아이러니를 목격한 적이 있다.

바로 <82년생 김지영>이 나왔을 때다. 그때 여성의 대다수는 '내 이야기가 아니냐'고 했고, 남성의 대다수는 '이건 과거 우리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 아니냐, 요즘 시대에 성차별이 어디 있다고, 과장하거나 일반화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 한번 묻고 싶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통찰력은 사실을 얼마나 포함하고 있을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과 그것을 둘러싼 울타리는, 그 안에 있을 때는 쉽게 느끼지 못하지만 꽤나 단일하고 폐쇄적인 조직이다. 많은 차별적 문제들은 군대에서의 폭력과 비슷하게 이루어진다. 은근하고, 자연스럽게, 모난 돌이 정 맞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차별을 당하거나 상황에 의문을 갖는 순간,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82년생의 김지영과 같은 경험을 한 여성들이 지금도 이렇게나 많은데, 그들이 되어 본 적이 없다고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많은 여성들은 집안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당신 하나만' 참고 희생하면 온 집안이 평화롭다는 이야기를 수긍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세상을 보고 자란 나는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그 어느 곳에서도 그 '너 하나만'에 포함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 한 명의 목소리는 가부장제를 전복시킬 수 없었다. 미친년이 되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당당하게 대응하기 어려웠다.





D.P. 시리즈가 이슈화되자, 군 당국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일'만 모여 벌어질 수는 없다고 언급했다. 물론 시리즈를 위해서 묶이고 엮인 에피소드들이 있겠지만, 많은 일들은 실제로 어딘가에서 벌어졌다. 그 사건들이 한날한시에 일어난 일은 아닐지라도 결코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매우 분명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 내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 이제 좋아졌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냐고 넘어가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였다. 이 시리즈가 사회고발 하이퍼 리얼리즘이 아닌, 야만했던 시절의 판타지와 코미디로 남는 날이 언젠가 오길 바란다고. 그 전에는 여기 현실이 있으니 일단 들여다보라고.


나는 그의 말을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보았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전하고 싶다.

- 내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 이제 좋아졌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냐고 넘어가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수많은 여성들이 동일한/비슷한 일들을 겪고 경험했다고 말한다. 여전히 그 이야기들에 '예전보다 나아졌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으냐고 묻고 싶은가? (내가 겪지 않았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답하기 전에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편견 없이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판단은 그 다음으로 미루어도 늦지 않다. 당신이 불행을 경험하지 않은 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물론 군대와 가부장제가 완전히 같은 선상의 논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어진 특수성이 다르니까. 군대는 제한된 시간과 강제성, 폐쇄성이라는 특수성이 존재하고, 성차별과 가부장제는 평생에 걸쳐서 존재하지만 생활과 사회 전반에 은근하고 깊게 공기처럼 뿌리 박힌 존재랄까. 하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기조는 같다.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문제가 있는 상황을 발견했을 때, 그걸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없었던 일로 취급하거나, 이만하면 나아졌으니 순응해라, 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고쳐나갈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군생활 내내 가혹행위를 행했던 황장수(병장/제대)는 조석봉(일병)의

'나한테 왜 그랬습니까' 묻는 말에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고 답한다.


익숙하지 않은가? 많은 성추행/폭행을 저지른 남성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혹은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 몰랐다', '실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악마라서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되는 줄 알아서, 그래도 괜찮아서, 그렇게 한다. 그들을 개별의 악마로 치부하고 욕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들이 악마가 될 수 있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비단, 군대만의, 여성만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약자의 이야기다. 왕따나 학교 폭력을 당하는 사람, 장애인이나 시설의 학대, 직장에서 문제가 된 사람들이 그렇다. 당신도 언젠가는 어디에서인가 약자가 될 수 있다. 아주 단순하게 예를 들자면, 한국의 이성애자 성인 남성도 유럽 어딘가에서는 그저 '아시안-외국인 노동자'가 될 수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높은 쪽이 언제나 당신의 자리로 정해져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이야기다. 군대에서 전역한 황장수가 다시 사회로 복귀했을 때 편의점 알바가 된 것처럼.


분명,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바뀌어야만 하고.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세상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최소한의 공감능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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