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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 Sep 29. 2022

토닥토닥

산솔에서 나제라티

해가 뜨는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오랫만에 해 뜨기 전부터 길을 나서본다. 조금 있으니 내 등 뒤로 해가 떠오른다. 오늘도 자연은 찬란하고 아름답다.  


밀밭과 포도원을 지나 끝없이 펼쳐진 길을 걷는다. 생각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되는 길이다. 온전치 못한 무릎이 더 아파온다. 나보다 훨씬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도 옆을 쌩쌩 지나가는 데 나의 걸음은 영 부실하다. 사무직으로 책상에 주로 앉아있는 삶을 살다 며칠 간 계속 몇 십 킬로씩을 걸어서인지 몸이 무겁고 무릎 통증은 심해져간다. 배낭의 무게는 실제보다 몇 배는 더 되는 느낌으로 무릎을 누른다. 천천히 나의 속도로 걸으면 되지 하면서도 이건 너무 느리다. 거북이 걸음을 체험하는 날이다. 


느릿느릿 오늘의 중간 지점에 도착해 커피를 마시는데 앞 테이블에 앉은 여자의 뒷모습이 어쩐지 파리지엔느 폴린 같다.그녀가 뒤를 돌았는데 맞다 그녀다! 뒷모습만으로 그녀를 알아보다니 나도 놀란다. 길 위에서 하루 인연이었는데 이리도 반갑다! 


그녀는 오늘까지 일주일의 짧은 일정이 끝난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인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던 그녀가 참 좋았는데 더 이상 길 위에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아쉽다. 꼭 끝이 되어 아쉽기 전에 옆에 있을 때 소중히 여겨야 한다. 말은 쉽지만 우리는 안다. 맨날 같이 하는 회사 동료, 가족에게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항상 같이 있어 더 힘든 당신, 하지만 함께 하는 길이 얼마나 소중한 길인지 떠나면 알게 되는 어리석음을 다시 깨닫는다.

이 길의 묘한 매력은 짧게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을 통해 나를 보고 평상시 보지 못했던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발 냄새나는 퀘퀘한 알베르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의 밤과 비좁음, 찬물의 샤워를 견디게 된다. 언제였던가 이런 생각을 해본 게. 항상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때론 한없이 미워하고 때론 이유 없이 싫어한 사람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본다. 그래도 물론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싫어하고 미워하겠지만 이런 시간을 가지게 된 것에 감사한다.


폴린과의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오늘의 목적지는 두 번째 맞는 도시인 로그로냐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도시가 반가우면서도 싫다. 반가운 건 그동안 살 수 없던 것들이 가득 찬 곳이기에 좋고 싫은 건 도시 속에 우리 여행자는 자유로우면서도 추레한 거지꼴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우리도 도시인이 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작은 마을에서는 어딜 가도 순례자들이기에 반갑게 인사하고 합석하여 하나가 되지만 도시에서는 이방인이 되어 흩어진다.


심해진 무릎 통증에 파스를 맘껏 붙이려고 일인실을 잡았다. 편하기는 한데 벌써 외롭다. 벌써 많은 사람에 익숙해졌나 보다. 스스로를 사회성이 떨어진다 생각하며 살았다. 벽치기, 거리두기는 코로나 전부터 내가 잘하던 것이었다. 그런 내가 놀랍게도 회사라는 조직에서 이십 년 이상을 잘 적응하며 지냈다. 고생했어, 장하다, 대견하다! 그런데 이 길에서도 여전히 나는 벽치기, 거리두기 대장이다. 습관은 천성은 쉽게 안 바뀐다. 그런데 일인실에 있으니 북적북적한 알베르게가 그립다. 막상 가면 싫어하면서 말이다.  


저녁을 먹고 도시 구경을 하다가 성당에 들어갔는데 마침 미사 중이었다. 뜻도 모르는 스페인어 미사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이 쏟아진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무거웠던 어깨에 뜻도 모를 미사는 나를 위로 하는 듯 하다. 다시 한번 토닥토닥, 잘 했어, 괜찮아, 걱정하지 말라고. 

 


로그로뇨에서 나제라티


아침에 눈을 떴는데 너무 기운이 없다. 그래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짐을 다음 도시로 보내주는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아침 여덟 시 마감시간에 맞춰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등록 실패. 바깥 날씨는 너무 차가웠고 무릎은 다시 시렸다. 줸장! 퇴행성관절염, 노화로 인한 무릎 통증? 안 걷다가 무리해서 걸으니 온 통증? 쉽게 인정하기 어렵지만 늙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 그래도 너무 싫다. 이 늙는다는 느낌!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는 마음으로 아침을 먹으려고 간 카페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브라질에서 온 부부가 있다. 그녀도 짐을 부치려다 실패해서 사설 업체를 불렀다며 얼른 배낭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런데 어디로 붙이지? 오늘 갈 곳을 정하지 않았지만 안내장에 있는 다음 추천 코스의 공립 알베르게로 짐을 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를 만나 배낭을 부치게 되다니 운이 좋은 하루라 생각했다.


길을 시작해 보자 하고 나섰는데 열 시도 넘은 시간이라 순례길에는 거의 사람이 없다. 같이 걷는 사람들이 없으니 더 쳐진다. 천천히라도 걸어보는데 춥고 흐린 날씨에 무릎은 더 아파오고... 악, 오늘은 정말이지 걸을 기분과 몸이 아니다. 배낭은 이미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는데 내 몸과 마음은 출발이 안 된다. 배낭 없는 밤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본다. 일인실 호스텔에 가면 옷과 수건, 슬리핑백이 없어도 되니 하룻밤 지낼 수는 있을 테니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그냥 이곳에 있기로. 


결국 나는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들어가 길가를 배회했다. 자라에 가서 따뜻한 티셔츠를 사서 입고 중국인이 하는 일식집에 가서 정체불명의 얼큰한 라면을 시켜 먹어도 우중충한 기분이 영 가시질 않는다. 저녁으로 슈퍼에서 산 바게트에 치즈를 박박 찢어먹으면서 너무나 뜨끈한 김치찌개에 찰진 햇반과 집이 그립다. 잘 풀리지 않는 하루는 빨리 끝내는 게 상책! 내일 눈뜨면 다시 힘이 날 테니 오늘은 얼른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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