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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 Oct 05. 2022

마이 카미노 유어 카미노!

나헤라에서 에스피노사 델 카미노

나헤라에서 그라뇽


어젯밤 공립 알베르게에서 발 냄새 땀 냄새로 마스크까지 쓰고 잤지만 잠을 거의 못 잤다. 아침이 밝아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가다가 오늘은 갑자기 운동 전 스트레칭을 하고 싶다. 동영상을 보며 열심히 따라 하고 출발하니 뿌듯하다. 룰루랄라 삼십 분쯤 걸었나, 뭔가 허전하다. 선글라스가 없다! 스트레칭한 벤치에 그대로 두고 온 것. 이래서 안 하던 거 하면 안 된다. 마침 회사 동료로부터 카톡이 와 있다. 산티아고에 있다니깐 뭐 놓고 다니는 거 아니죠라고 묻는다. 그녀의 촉에 웃음이 난다.


나헤라에서 그라뇽가는 길은 추수가 끝난 밀밭이 광활하면서도 황량하다. 옆과 앞뒤가 뻥 뚫린 길을 걸으니 마음이 다 시원하다. 


중간 마을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순례자로 가득 찬 햇빛 좋은 야외 테이블에 앉으려는데 자리가 없다. 혼자 앉은 여성이 나에게 손짓하며 자기 앞에 앉으라 한다. 그녀가 먹는 빠에야가 먹을만해 보여 나도 똑같은 걸로 주문. 빨갛지만 우리가 아는 빨간 맛이 아니고 짜기만 하다.  


브라질 국적의 미국에서 일한다는 중년의 그녀는 식사 중에도 연신 전화와 메일로 분주했다. 내게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 산티아고까지 가려는데 무릎이 말썽이라 무릎 괜찮은 곳까지 갈 거라 했더니 자기는 넘어져서 턱 밑을 다쳤지만 괜찮단다. 그러고 보니 턱 밑이 시퍼렇게 멍져 있다. 안 괜찮아보이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며 이 것 역시 자신의 카미노라며 이 길은 너의 카미노이니 속도에 연연치 말라 한다. "이 카미노, 유어 카미노"라는 말이 큰 위로가 되며 마음속에 훅 들어온다. 이 길을 다녀간 사람이 수천수만명이겠지만 똑같은 길을 걸은 사람은 없을 거다. 각자만의 카미노가 있을 뿐. 어떤 생각으로 이 길에 들어섰든 이 길은 나만의 마이 카미노가 되는 것.


그라뇽에서 에스피노사 델 카미노


이곳의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아침이 주는 기대감. 오늘도 아침에 눈을 뜨니 어떤 새로운 길이 있을 지 기대감에 벌써 행복해진다. 신나게 길을 걷는데 앞 바람이 가득하고, 선글라스가 없어 자꾸 눈에 작은 무언가가 들어온다. 스트레칭하다 잊어버린 선글라스가 너무 그립다. 


황토색으로 가득한 길을 걷는데 하늘이 심상치 않다. 점심 때가 되어 도착한 빌로라도에서 결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비가 퍼붓는다. 급히 바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시키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보는데 쉽게 그치지 않을 기세다. 마침 이곳에서 얼마 안 남은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해 나머지 구간은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는 동네 여자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에스피노사에 버스가 가냐고 물으니 갈 것 같기는 한데 버스 기사에게 물어보란다. 그러더니 버스가 오자 타자마자 에스피노사에 가는지 묻더니 내게 간다는 손짓을 한다. 기분 좋은 오지랖녀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기분 좋은 스페인식 시에스타를 가지고 저녁을 먹으러 내려가니 호스트가 식탁에서 기다린다. 이곳은 호스트가 만든 저녁을 그들과 한 식탁에서 같이 한다. 호스트는 노년의 독일인 부부로 따뜻하고 유쾌한 스페인 사람이 좋아 결국 스페인에 6년 전 터를 잡았다고 한다. 오늘처럼 가족과 같이 저녁 식사를 전 세계의 순례자들과 함께 한다고 했다. 워낙 작은 규모이다 보니 이런 가족 같은 분위기의 장점이 있는 곳이다. 영어를 못하지만 스페인어를 하는 독일인, 스페인 사람과 나, 독일인 호스트가 함께 저녁을 하다 보니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가 섞여 대화를 하게 된다. 가정식이라며 호스트 할머니가 내 온 수프 맛은 이상했고 파스타도 별로였지만 같이 먹다 보니 뭔가 다 먹어야 예의 인듯한 분위기에 꾸역꾸역 먹는 게 좀 고역이긴 했다.  


한 가지 몸에 변화가 생겼다. 무릎을 보호하려고  무려 50유로나 주고 산 무릎 보호대가 내게 무릎의 안정감이 아닌 허벅지 물집을 선물하였다. 계속 맨살에 부딪히다 보니 씉겨서 생긴 듯하다. 남들은 발에 생긴다는 물집을 허벅지에 갖게 되었다. 아직 가렵지는 않은데 볼 때마다 징그럽다. 쓰지도 않을텐데 50유로나 주고 산 거라 버리기도 애매한 무릎 보호대. 일단 가지고 다니다가 좋은 핑계가 생길 때 후련하게 이별해야겠다. 약국에 가서 물집을 보여주니 빨간 약을 준다. 물집 약이 있을 것 같은데 여기에 빨간 약을 바른다는 게 왠지 못 미덥지만 뭐 한번 믿어보기로. 이 놈의 살은 쓸데없이 연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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