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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테리어브라더스 Apr 04. 2019

연필예찬


ⓒ스튜디오베이스

연필은 힘을 가하는 정도와 심의 굵기에 따라 또는 사용하는 각도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그려진다. 사용하는 사람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숙련된 글씨체는 그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기도 한다. 반면 연필을 대신하는 샤프나 볼펜 등은 굵기나 진하기가 단순해서 건조하고 재미가 없다. 상대적으로 인간적이지 못하다. 컴퓨터로 인쇄된 활자는 오죽할까. 


하지만 불편하게도 연필은 깎아야만 사용할 수가 있다. 물론 연필 깎기가 있지만 연필 깎기로 단정하게 깎여진 연필들은 손으로 깎은 것에 비해 맛이 덜하고 표현이 훨씬 단순해진다. 손으로 깎으면 고의로 뭉툭하게 또는 날카롭게, 심을 길게 또는 짧게 조절이 가능하다. 

ⓒ스튜디오베이스

연필은 진하기에 따라 다양한 종류들이 있기 때문에 용도에 따라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 흑연으로 만들어진 연필심은 검은색이다. 색이 존재하는 순간 그것은 연필이 아닌 색연필의 영역으로 포함된다. 그래서 단일한 무채색의 카리스마가 있다. 흑백사진이 컬러사진에 비해 빛의 깊이를 보다 심도있게 표현해 몰입감을 만들어 주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연필의 재료는 나무와 흑연, 단순한 두 가지 자연소재로 이루어져 있어서 자연스럽고 친밀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원초적이다. 


연필은 손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오른손잡이라면 오른손으로 당연히 연필을 쥐고 왼손은 종이를 받히며 오른손이 가하는 힘의 균형을 맞추게 된다. 왼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글을 써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연필은 엄지, 검지, 중지의 세 손가락으로 쥐고 있지만, 각자의 역할이 있다. 

가로획을 그을 때는 엄지가, 세로획을 그을 때는 검지가 연필을 밀고 나머지 손가락들은 그 힘을 받쳐주거나 제어하며 안정된 글씨와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준다. 새끼손가락의 역할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자동차의 바퀴처럼 가야 할 방향을 잡아준다. 남은 약지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바퀴와 차체의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인 쇼크업쇼버(일명 ‘쇼바’라고 불리우는)가 되는 것이다. 다섯 개의 손가락은 부여받은 역할의 물리학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한다. 연필을 오랜 기간 사용한 사람은 중지 첫마디에 저마다의 굳은살이 붙어있고 손가락은 휘어있기 마련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마음의 훈장이다. 


국민학교 시절 가지고 다니던 하늘색 계열의 반투명한 플라스틱 필통이 있었다. 뚜껑을 열면 필통 내부는 두층으로 나뉘어 위층에는 연필이 아래층에는 지우개와 접이칼, 그리고 작은 자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쉬는 시간에는 필통 뚜껑을 받침 삼아 연필을 깎고 심을 갈았다. 물론 샤프가 있었지만 저학년 때는 가급적 연필을 쓰도록 교육을 받았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곧 바른 사람이라는 사고방식이 가정교육의 하나이기도 했다. 펜글씨나 서예학원에 다니는 것은 그 시대에 필수 사항이었다. 인터넷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으니 이메일이라는 건 있을 수도 없었고 연필로 꾹꾹 눌러쓴 손편지가 서로의 소식이나 마음을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했다. 혹독한 훈련(?)으로 나름 글씨가 제법 잘 쓰는 사람 축에 들었는지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짝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설레는 마음을 편지로 전하고서는 오매불망 우편함만 바라보기도 했다. 편지를 쓸 때는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나름의 글을 다듬어댔다. 지운 흔적조차 당시의 마음이 전달되는 편지의 일부분이 되었다. 

미술학원에 다니며 데생을 그릴 때 사용하던 일본제 톰보우(Tombow) 4B연필. 미대 지망생이었던 나는 볼펜 깍지를 라이터로 달궈 연필을 끼우고 한쪽 눈을 감고 손을 길게 뻗어 석고상을 재며 미래를 꿈꿨다. 화실 한구석에 놓인 커다란 쓰레기통에서 커터칼로 연필을 깎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뉘어 쓰고 세워 쓰며 손목에 힘을 빼고 연하게, 눌러서 진하고 강하게 사용하면서 석고상이 보다 입체적이고 밀도 있게 느껴지도록 노력했다. 환경에 예민한 연필은 흑연에 기름 성분이 있어서 비가 오는 습한 날이면 연필이 종이에 잘 스며들지 않아 애를 먹었다. 물론 습도를 이겨낼 실력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데생이 완성되면 손이며 얼굴이 온통 흑연 가루 범벅이 되곤 했다. 


대학 생활에서의 연필은 대부분 스케치나 제도와 함께했다. 지금처럼 캐드(CAD)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제도판을 사용하고 청사진기(Blue Printer)로 도면을 구웠다.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제도에서 캐드프로그램으로 전환되던 시점이었다. 팔꿈치에 흑연가루가 묻을까봐 토시를 끼고 넥타이를 호주머니에 넣고 도면을 쳤다. 회사에서는 연필의 장점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홀더를 주로 썼다. 


아무리 정교하게 그린 캐드도면도 연필로 그려진 도면의 풍부한 감성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리고 작도자의 이름을 굳이 보지 않아도 누구의 솜씨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잘 그려진 도면은 마치 예술작품 같았다. 캐드 도면의 편리성에 익숙해 있는 지금 세대들에게 설명해주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시간이 걸리고 관리가 불편하지만, 컴퓨터로 그린 도면에는 있을 수가 없는 고유성이 있기 때문이다. 


캐드 프로그램에 능숙한 사람이 그린 도면에도 스타일이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연필로, 직접 손으로 그린 그림을 대체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첨단화되어 가는 이 시점에 연필로 도면을 그리자고 캠페인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문명을 향유하더라도 본질을 인식하는 균형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십 수년간 스튜디오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연필 사용을 강제(?)해 왔다. 항상 손으로 먼저 그리고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했고 심지어는 리포트 과제도 연필로 직접 쓰도록 했다. 적어도 쓰면서 한 번은 읽을 것 아닌가. 러프한 투시도나 평면도를 완성하기 전 레이아웃 과정에서 그리는 평면 스케치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떤 방식들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이다. 그런 과정을 무시한 채 컴퓨터를 이용해 도면화 하다 보면 다분히 제한적이고 이성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스튜디오베이스

시간을 두고 가슴으로 느껴야 할 것을 짧은 시간에 머리로 이해시키려다 보니 거부감을 느끼는 학생들도 물론 있었다. 연필을 눌러 종이 표면의 질감을 느끼며 전달되는 감정을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고 기대한다. 몇 해 전에는 회사에서 연필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목수용 연필을 구입해서 측면에 디자이너의 삶을 살아가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들을 새겨 넣었다. 만든 연필은 클라이언트나 회사에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주는 작은 감사의 선물이며 스튜디오베이스의 언어다. 


진심(Sincere), 태도(Attitude), 진정(Sedate), 공감(Empathy), 분위기(Atmosphere), 생각(Thinking), 기본(Base), 시간(Time), 균형(Balance), 온도(Temperature), 정제(Refinement), 긴장(Tension)

딸아이에게도 어릴 때부터 스스로 연필을 깎고 사용하도록 가르쳤다. 현재 고등학생인 딸은 연필을 사용하는데 거부감이 없다. 물론 글씨는 나보다 잘 쓴다. 자연스럽게 글을 많이 읽고 쓰는 것에도 익숙하다. 컴퓨터도 자주 활용하지만 그만큼 연필도 사용한다. 어릴 적 나를 반추해보면 상대적으로 사고가 넓고 체계적이다. 물론 복합적인 영향이 있었겠지만, 연필의 나비효과라면 과장된 걸까. 다소 극단적이고 단호한 나의 태도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성이 상실되기 쉬운 시대에 애교 섞인 나의 작은 외침이다.


글 | 전범진(스튜디오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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