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eosu
문 앞을 서성였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밀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 문 앞에 서서 <율리시스>의 다음 문구를 명상했다. “어떠한 물건이든 세심하게 관찰해 보면 신들의 불멸의 영겁에로 접근하는 문이 될 수 있지.” 그러나 사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인생의 눈금이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다. 안다. 나도 안다. 발걸음을 떼지 않으면 그 무엇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 외줄에 매달린 강아지마냥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소년이 입문식에서 얻었던 조언이 내게도 힘을 준다.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어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천천히 가자. 카프카의 말처럼 “초조해하는 것은 죄”일지니, 이를 후렴구 삼아 문을 연다.
답답했다. 분명 한 때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 있다가도 다시 고개 들어보면 제자리이거나 일보후퇴이다. 한 때는 심장이 터질 듯 희망에 부풀었다가도 다시 풀 죽은 강아지마냥 한숨만 내쉬는 형편이다. 무엇이 희망을 꺽는 것일까. 계속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일까.
나를 가로막는 장벽은 ‘완벽함에 대한 욕구’, ‘재능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다. 무언가를 표현하는데 관심이 있었음에도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린 적도, 사진을 찍은 적도, 짧은 단편 영화 한편 만들어 본적도 없다. 정작 가장 하고 싶은 일들은 뒤로 자꾸만 미루고, 남이 보기에 모나지 않고, 무난해 보이는 일들만을 하고 있었다. 그런 비겁한 타협의 결과가 바로 지금의 나이다. 언젠가 이렇게 적었다.
난 안다. 내가 내 길을 가지 못한 책임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님을.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어떤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나만의 몫임을 난 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가졌는데도, 행복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어리석은 염려 때문이었다. 정녕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했는데도 잘해내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며 불안해하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음 때문이었다.
여전히 내 안에는 그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이 두려웠다. 최선을 다한 후 아무런 여력도 남아 있지 않은 그 텅 빈 허공이 싫었다. 그 캄캄한 틈새 사이의 심연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비겁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모든 것을 바쳐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일말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내 비겁한 삶의 기술이라면 기술이다.
길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길에 대해 이런 저런 추측을 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며 최적의 루트를 별견할 수도, 가장 빠른 지름길을 그려볼 수도 있다. 그러나 길을 떠나보면 그 모든 추측과 번민의 시간들이 부차적이거나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결국 길 위에서의 모든 여정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길은 우리가 걸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길 위에서 새롭게 만나고, 다르게 시도하고, 끊임없이 실패하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향하게 된다. 어쩌면 알게 되리라.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하나 뿐임을.
*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 장자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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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때마다 실패했다. 늘, 다시 시도했다.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좀더 세련되게" - 사뮈엘 베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