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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4. 2022

푸른 바다

@ 남해


갓 서른이 되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흐린 날씨였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르렀던 남해 바다를 등지고 선 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여러분이 읽는 책이 선생일 것이고 여러분 동료가 여러분의 선생일 텐데, 여러분을 무척 많이 도와주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의 바다를 제대로 보는 데 나처럼 이렇게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어. 그게 섞여 있어. 결국 여러분이 봐야하는 것은 저기야.”


“그렇지만 1년 동안은 이쪽을 봐야해. 이쪽을 향해서 보고, 여기에 서있는 다른 사람들의 등 뒤를 보고, 그리고 여러분한테 계속 물어야 해.”


“그게 지금까지는 한 3명 정도 되지? 에릭 홉스봄이 이 자리에 서 있을 때도 있었고 … 조안 시울라가 서 있을 때도 있었고, 알랜 치넨이 자리에 서 있을 때도 있었어.”


“우리가 보려고 하는 건 이 뒤야. 바다야. 여러분들의 바다.”


“이게 1년 정도 끝나면 여러분 혼자 책을 써야 해. 혼자 책을 쓴다는 뜻은 뭐냐하면 이렇게 내가 없어지는 거야.”


(그가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눈 앞에 바다가 출렁인다)


“잘 보이지? 그게 2년차 수업이야.”


(잠시, 침묵 뒤)


“배고프지, 이제?”




첫번째 수업이 끝나고, ‘2년차 수업’에 접어든지 어느새 십여년이 훌쩍 지났다. 나의 스승은 돌아가셨고, 나는 그에게 약속했던 푸른 바다를 보여드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 땐 그 말의 무거움을 몰랐다. 2년차 수업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것, 자신의 질문을 창조해내는 과정이라는 그 말의 뜻을.


스승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이후의 무수한 헤맴과 방황은 없었으리라. 그런 시절이 있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과 따라야 할 규칙을 알려주는, 또 그런 때가 있다. 사회가 알려주는 삶의 규칙을 벗어나 자신이 걷는 길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 <배신당한 유언들>에는 어린 시절 만난 스승과의 아름다운 일화가 담겨 있다. 그의 스승은 2차 세계 대전 중의 유대인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잔혹한 여행을 떠났다.  


"수업이 끝난 뒤 그가 나를 바래다주다가 문 가까이에서 멈춰서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 “베토벤에게는 놀라울 만치 약한 이행부들이 많아. 하지만 센 이행부들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약한 이행부들이야. 잔디밭처럼 말이야. 잔디밭이 없으면 우리는 그 위로 솟아나는 아름다운 나무에게서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을 거야.” 

묘한 생각이다. 그것이 나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묘하다. 아마도 내가 스승의 내밀한 고백 하나를, 어떤 비밀, 오직 터득한 자들만이 알 권리를 갖는 한 가지 위대한 꾀를 듣게 된 걸 명예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스승님의 그 짧은 성찰은 일생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 그 성찰이 없었던들 분명 이 글은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그 바다로 향하는 길목에서의 만남들, 여기 저기를 서성이고 헤매이며 만났던 스승과 사이의 풍경과 접힌 페이지들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러니 이 책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으로 흐르는 강의 노래이자, 나의 푸른 바다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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