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ean
서해의 밤, 회사의 주말 워크샵에 참석한 그는 다들 술에 취해 부르는 시끌벅적한 노래와 끊임없이 잔 부딪히는 소리로 흥건히 젖은 숙소를 빠져나와 바다를 향해 걸었다. 서해의 기다란 해안가는 썰물이 빠진 자리에 검고 매끄러운 몸뚱이를 드러낸 채 길게 누워 있었다. 넓은 모래 사장을 지나 바다에 도착한 그는 신발을 벗고 잔잔한 수면에 발을 담궜다.
아직 낮의 온기를 간직한 바다는 거대한 몸뚱이를 일렁이며 그의 발목을 미지근하게 감싸 안았다. 잔잔하게 출렁이는 파도와 부드러운 모래의 촉감을 발 끝으로 느끼며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자신과 물결이 만드는 파동과 미세한 모래 알갱이의 감촉에 취해 어둠 속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던 그는 어느덧 무릎 위까지 물이 차오르자 갑자기 끝을 알 수 없는 캄캄한 밤바다 속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불현듯 고개를 돌려 자신이 떠나온 해안가를 돌아보았다.
바다 속에서 바라보는 저 먼 해안가는 여전히 화려한 조명과 가로등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시끄럽고 번잡하지만 따뜻하고 익숙하고 그리운 세상이다. 다시 자신이 향하던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육지의 조명을 품은 밤 바다는 희미하지만 낮고 깊게, 검은 뱀처럼 굼실거리고 있었다. 깊은 바다를 향해 조금 더 나아갈지, 이제는 다시 익숙한 땅으로 돌아갈지 망설이던 그는 어둠 속에 몸을 담근 채 한동안 바다와 육지 사이를 서성였다.
우리는 익숙하기에 여기에 머무른다. 그리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다행히도 이를 뒷받침해주는 이유들은 자꾸만 생각난다. 갓 태어난 아기와 가족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의 학원비와 늘어나기만 하는 마이너스 통장 같은 것들. 삶은 끊임없이 흔들리게 마련이지만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은 라벨과 가격이 붙여진 채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고, 또 어딘가에는 문제를 해결해 줄 레디메이드와 전문가의 맞춤 솔루션이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그것들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벌러 가는 것. 그렇게 미처 어딘가로 떠나보지도 못한 채 우리의 삶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 시대는 효율성과 유용함을 강조한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어딘가 모자란 인간이란 징표이자 부덕함의 소치이다. 그보다는 여기와 저기를 최단 거리로 연결하고 가장 빠르게 도착하는 것, 당장 돈으로 환산되는 것들과 먹고 살 수 있는 것, 수치화하고 계량화하여 쉽게 교환할 수 있는 것들로 삶을 매끈하게 채워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알지 못하는 숲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이쪽 저쪽으로 헤매며 돌아다니지 말고, 한자리에 머무는 일은 더욱 하지 말도록 하며, 언제나 가능한 한 한쪽으로 똑바로 걸어가고, 절대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방향을 바꾸지 말라. (…) 왜냐하면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정확히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는 못 갈지라도 적어도 숲 한가운데 있게 되는 것보다는 나을 어느 장소에 도착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근대의 시작을 열었던 합리성의 철학자다운 명쾌한 조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지’이고, 그 도착 장소가 어디든지 ‘숲 한가운데’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그런 효율성과 이성에 대한 맹신과 조급함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 온 것은 아닐까? 오히려 세상은 그보다 넓고 깊고 복잡한 어떤 것이리라. 이는 그저 어느 맑은 밤, 문명의 불이 꺼진 숲의 어둠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저 광대하고 불규칙한 별을 품고 있는 불완전하지만 위대한 존재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한다.
“숲에서 길을 잃는 경험은 언제나 놀랍고 기억에 남고 더군다나 값진 경험이다. 우리는 길을 완전히 잃은 뒤에야, 더 간단히는 뒤로 돌아선 뒤에야(이런 세상에서는 눈을 질끈 감고 한 바퀴만 뒤로 돌아도 쉽게 길을 잃으니까) 자연의 방대함과 이상함을 진정으로 음미할 수 있다. 우리는 길을 잃고 세상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자신이 있는 곳을 깨우치고, 자신과 세상이 무한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는다.” **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자기 몸뚱이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갓난아기가 엄마의 사랑을 먹고, 옹알이를 하고, 첫 마디를 떼고, 걸음마를 하고, 그렇게 보살핌 아래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독특한 존재가 되어 간다. 그러니 너무 빨리 정신차리지 말자. 우리의 삶은 남의 손을 빌려 재빨리 풀어버려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직접 체험하고 겪어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어쩌면 삶의 비밀은 우리가 걷고 있는 깔끔하게 포장된 이 길이 아니라, 저 멀리 에둘러 가는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샛길’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검은 밤 바다를 향해 한걸음을 더 옮겨본다.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