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to
어느 아침 잠에서 깬 요제프 K는 영문도 모른 채 체포 당한다. 더욱 황당한 것은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K가 소송을 당한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때 전도 유망했던 은행원 K는 그 날 이후 답답한 공기로 가득 찬 좁고 낡은 법원의 입구를 찾아 헤매게 된다. 자신의 힘 또는 인맥을 통해 소송에 대응할 여러 방도를 모색해보지만 그 어디에도 빠져 나가는 문은 없어 보인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입구를 모르니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안개가 싸인 듯 애매모호한 법률과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변호사의 조언들과 씨름하던 어느날 문득 결말은 느닷없이 찾아 온다. 서른 한번째 생일 전날 저녁 9시 무렵, 두 남자가 K의 집을 찾아와 그의 양팔을 끼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한 채 밖으로 데려나간다. 세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된 채 도시를 빠져나가 도착한 채석장에서 한 명은 K를 땅에 앉힌 뒤 그의 머리를 돌 위에 올려놓고, 또 다른 한 명은 정육점 칼을 꺼내 K의 심장을 찌르고는 두 번 돌렸다. 그렇게 상급 법원을 가보기는 커녕 판사도 제대로 한번 만나보지 못한채 K는 숨을 거둔다. *
삶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있다. 오히려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이 최악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곤 한다. <소송>의 주인공 K는 그 누구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한다. 심지어 죽음에 직면한 순간에도 채석장 맞은 편 창문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혹시 자신을 구해주지는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어 보기도 한다.
아마도 그를 죽인 것은 알지도 못하는 그의 죄가 아니라, 소송이 해결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나 허황된 말들로 그를 현혹시킨 주위의 보이지 않는 적들이다. 아니, 무엇보다 "며칠 동안 만이라도" 하면서 "맨 아래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듯 자신의 문제를 자꾸만 뒤로 미룬 그의 잘못이리라. 카프카의 유머는 잔인하다. “도끼로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듯”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아!” 쥐가 말했다. “세상은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에는 하도 넓어서 겁이 났지만 자꾸 달리다 보니 드디어 좌우로 벽이 보여서 행복했지. 하지만 이 긴 벽이 어찌나 빨리 좁혀드는지 나는 어느새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에는 덫이 있어, 내가 그리로 달려 들어가고 있구나.” “네가 방향을 바꾸면 돼.” 고양이는 이렇게 말하고 쥐를 잡아 먹었다." **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던 젊음의 왕관을 벗고 나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은 급속하게 쪼그라든다. 누구나 마지막 순간에는 깨닫는다고 하지만 문제는 죽기 전에 아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본인의 행동을 보지 못하고, 미처 알지도 못한 채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 믿으며, 그렇게 남을 속이고,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낯선 자아의 풍경 속에서 헤매 다닌다.
라디오헤드는 <No Surprises>***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심장은 쓰레기장처럼 가득 차고, 일은 천천히 너를 죽이고, 상처는 낫지 않는다"고. 그리고 우리는 "경고도 놀라움도 없이" 죽어간다. 역사는 저절로 진보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말했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 준다.”
그들의 말에 잠시 잠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인공지능(AI)에, 4차 산업이다, 메타버스다 다들 떠들썩 하지만 유사 이래 정작 우리 자신은 그닥 바뀐 게 없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유인원이 세상을 다 아는 인간인 척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생존을 위협받는 큰 위기가 닥쳐오지 않는 한 인간은 되도록 현재의 적당한 만족 상태(satisficing)****를 최대한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한 세상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따뜻한 물에 뭉근하게 삶겨진 개구리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선, 아무런 놀라움도 없이 서서히 죽어가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수 밖에 없다.
때 이른 벗꽃이 한창이다. 평온해 보이는 온 세상에 분홍빛 알람이 울려 퍼진다. 꽃들이 ‘비상! 비상! 비상!’이라 외치며 팝콘처럼 피어 오른다. 생각해보면 저 눈부신 꽃들 중 제 몸으로 피지 않는 꽃은 단 한송이도 없다.
* 프란츠 카프카, <소송>의 짧은 줄거리
** 프란츠 카프카, <작은 우화> _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에서 재인용
*** 라디오헤드, <OK, Coumputer> 앨범의 10번 트랙
**** 미국의 심리학자 허버트 사이먼이 satisfiy'와 '충분하다 suffice'라는 두 단어를 합쳐 만든 조어로 적당히 만족하다(satisfice)라는 뜻. '적당히 만족하기satisficing'란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대신에 적당한 기준을 충족하는 해결책을 찾는 의사결정 전략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