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mazawa Koen
한 남자가 공원 한복판에 서 있었다. 생전 처음 세상을 본다는 듯, 어린아이가 막대 사탕을 핥으며 황홀하게 단맛을 음미하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있었다. 그는 지금껏 집 밖을 거의 나와 본 적이 없다. 창 밖 세상은 어릴 적 낯선 이의 손에 이끌려 무언가를 피해 끝없이 달아나던, 심장이 터질 듯 가쁜 숨소리와 기분나쁘고 질척한 땀으로 기억되었을 뿐.
그가 지니고 있던 형체없는 두려움을 자세히 설명할 순 없겠으나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또 다른 무게와 이름으로 지니고 있는 그 무엇이다. 여태껏 그는 자신을 집 밖으로 이끌어 줄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했고, 어느덧 늘어가는 주름살과 함께 피지도 못한 채 져 버리는 인생에 대한 원망도 들었다. 그런데 그저 한걸음 문 밖으로 나서고 보니, '아, 세상은 온통 유혹이었다.'
땡땡이 벽화가 말을 걸었다. 꽃돼지가 은은한 미소를 날렸다. 텅 빈 미끄럼틀이 다시 돌아올 아이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나지막하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콩당콩당, 바로 오늘이 시작하기 좋은 날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어느 오후. 잔뜩 보풀이 인 베이지색 니트와 물빠진 남빛 면바지를 입은 한 남자는 그렇게 고장난 시계 바늘처럼 한참을 멈춰서 있다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다시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시작의 장소가 집 앞 공원일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언제나 할 수 있는게 시작이라고 생각했기에 늘 뒤로 미루었다. 수습도 못할 거창한 꿈을 꾸며 출발은 자꾸만 연기되었다. 시작하지 못한 시작들. 어느 때부턴가 놓쳐버리기 시작한 시작들이 치우지 못한 눈처럼 한데 쌓여 소화불량에 걸렸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말했다. "당신의 평범한 날은 1,440분이고, 이는 다시 86,400초로 구성된다. 한 달을 평균 30일로 잡을 때 이것은 2,592,200초이고, 다시 한 해를 30일이 12번 반복되는 것으로 할 때 이는 31,104,000초다. 이제 나의 36세 생일이 다가오고 있으니 나는 실은 단지 1,088,640,000초를 살아온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는 팔만 육천 사백초. 만약 무언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데 필요한 순간이 단 1초라고 가정해 본다면 오늘 하루에도 팔만 육천 사백번의 새로운 시작의 기회가 있는 셈이다.
그러니 되도록 가볍게 마음 먹기로 하자.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어떤 특별한 날도 아닌 듯 가까운 곳으로 훌쩍 산책을 나서는 것, 그런 작은 일탈이 오히려 시작에 어울린다. 누군가에게 불필요한 책임도 묻지 않고, 거대한 시스템이나 허접한 세상 탓도 잠시 접어두고, 집 앞 공원으로 바람 쐬러 나가듯이 자신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보자. 세상을 뒤바꿀 원대한 목표 같은 건 위대한 이들에게 맡겨두고 그저 자기다운 하루를 살 수 있다면 그 뿐.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은 참 시작하기 좋은 날이다.
*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 _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1955년 젊음이 넘치던 시절, 평화로운 바흐의 선율을 38분 만에 휘몰아치듯 연주하였다. 그리고 한번 녹음한 곡은 다시 녹음하지 않는다는 자신 만의 원칙을 깨고 1981년 51분에 걸쳐 이 곡을 연주했다. 이듬해인 1982년 쉰 살의 나이에 깜깜한 자신의 방에서 눈을 감았다.
** 크리스토퍼 듀드니, <세상의 혼>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