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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2. 2024

끝과 시작

@Roppongi


새벽 2시, 롯본기의 츠타야(Tsutaya)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주문한 뒤 자리를 잡았다. 잡지 몇 권과 책을 가져다 놓고 이리저리 뒤적인다. 늦은 시각이라 눈이 뻑뻑하다. 글을 읽는다라기 보다는 그림들을 훑으면서 무의식 중에 책장을 넘긴다. 창 밖에는 물기 어린 새벽이 흐른다.  


새벽 3시 50분, 아침 7시의 오픈을 준비하기 위해 문을 닫는 서점을 빠져나와 어두운 거리를 걷는다. 아직 전철이 다니기 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는 취객들 곁을 스쳐 지난다. 그러고 보니 도쿄에 온 지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침이 일찍 시작된다는 핑계로 해가 뜨는 풍경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교차로에 잠시 멈추어 섰다가 롯본기 힐즈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새벽 5시 23분, 해가 뜨고 새가 날았다. 그렇게 무언가의 끝이자 또 다른 어떤 것의 시작이 찾아왔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롯본기 츠타야(Tsutaya)에서 밤을 지새웠다. 무슨 책을 뒤적였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데 서점을 나선 뒤 몸을 감쌌던 습기 머금은 공기 같은 것은 지금도 내 몸 어딘가에 달라 붙어 있는 느낌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그런데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끝이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경우가 많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할 요량으로 거창한 포부를 품어 보기도 하지만, 끝은 언제나 계획과는 달리 느닷없이 찾아오곤 한다.


“시작은 언제?”
“내가 아침에 눈을 뜰 때”
“끝은 뭐지?”
“내가 두 번 다시 아침에 눈을 뜰 수 없게 되었을 때”
“아주 좋다. 시작과 끝 사이는 뭐지?”
“나” *


위 아빠와 아들의 대화처럼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끝 사이의 나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 만사가 '나'의 뜻과 노력 만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는 우리를 둘러싼 또다른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하던대로 하고 살던대로 산다. 삶의 방식에는 일종의 관성이 생기게 마련이다.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은 모든 물질이 물리력의 지배를 받듯이, 인간의 행동 또한 특정한 힘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변수를 우리를 둘러싼 상황으로 보았고 다음과 같은 등식으로 정리했다.


B(행동)=f{P(사람), E(상황/환경)}


그에 따르면 인간 행동의 변화는 상황과 환경 변수의 영향 아래에서 작용(추진력)과 반작용(억제력 , 마찰력)의 역학 관계에 따라 다음의 3단계에 걸쳐 일어난다. 1단계 '해동(unfreezing)'은 기존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변화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2단계 '혼란(moving)'은 예전의 방식과 새로운 방식이 충돌을 일으켜 어수선하고 정신 없는 과도기를 거치는 것을 의미한다. 3단계는 다시 '재동결(refreezing)'의 단계로 새로운 생각과 변화가 삶 속으로 들어와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잡는 과정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 할 때 우리는 흔히 일을 '시작'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의 '끝'을 맺는 것이다.  "이전과 똑같은 방식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말처럼,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기존의 방식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지상의 로켓이 우주 공간으로 나가기 위해선 우선 지구 중력의 힘을 벗어나야만 한다.


다시 한번,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세상의 이야기들은 모두 시작과 끝의 푸가(Fugue)이고, 나와 시간과 세상이 한데 어울려 추는 왈츠이자 탱고이다.  





* 윌리엄 살로안, <파파 유어 크레이지>


** "Insanity: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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