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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Jun 05. 2020

깊고 맑고 푸른

@ 신대방동


푸른 새벽, 잠에서 깼다. 꿈 속에서 나는 차원을 접었다 펼치며 새로운 형상을 빚고 있었다. 그 형상은 내가 되었다가 또 다른 형태의 다면체로 변했다가 그렇게 자꾸만 모양을 바꾸어갔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되었고, 내일의 내가 다시 오늘의 내가 되었다. 순간, 찰나의 이미지가 몸통을 꿰뚫고 지나갔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그 형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영감은 그렇게 번개의 섬광처럼 찾아 왔다가 긴 여운을 남긴 채 사라졌다. 다시 잠들지 못한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가 걸었던 길이자 스쳐 지났던 풍경들이다.

내가 살아온 어떤 날들이며, 꿈꾸었던 순간들이다.”




삼십대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하릴없이 청춘을 흘려 보냈으나 서른의 초입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한 스승을 만났고, 길을 나설때면 불안정한 습관처럼 노트와 카메라를 지니곤 했다.  


산다는 건 꿈과 현실 사이의 진창길을 걷는 일. 영혼의 중심을 향하는 길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마구 뒤얽혀 있어 미숙한 초행자는 쉽게 방향을 잃었고 허방을 딛고 나뒹구는 일이 일상이었다. 무엇을 찾아 헤매었던걸까. 굳이 말하자면 모든 것이 어슴프레 뒤섞인 검을 현玄*의 한 켠에 놓인 한없이 푸른 욕망 같은 것들.  


어릴 적의 나는 낡고 불투명한 창문에 어른이는 불빛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오래된 벽지의 희미한 무늬와 같이 딱히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해가 지고 별이 돋아나는 사이의 깜한 시간과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의 골목길에서 가로등이 반짝 눈을 뜨는 순간, 막 눈이 내리기 전의 어둑어둑한 하늘빛처럼 가슴 설레고 미묘하고 깨어지기 쉬운 조짐들. 그렇게 창 밖에 뿌옇게 어린 그 길을 따라가보고 싶었는데 어느덧 그 흔적들은 사라지고, 다락방에서 창 밖을 보며 몽상에 잠기던 아이는 하루살이가 팍팍한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었다. 


"꿈 속에서 파란 유리조각이 눈 안에 박혔다. 쨍, 하며 금이 간 세상의 가장자리 너머 푸른 선 한 줄기 흘러간다.”


창 밖의 고요한 풍경 아래로 새벽이 소리없이 술렁인다. 조용한 수면 아래에서 일렁이는 맑고 투명한 것들, 눈에 닿는 가장 먼 곳의 어슴푸레한 수평선처럼 “깊고 맑고 푸른 그 무언가”**를 찾아, 네 눈 속의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미처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떤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

“검을 '현'자는 까만 색깔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어슴푸레하고 어둑한 상태를 나타낸다. 너무 멀어서 아득한 상태도 표현한다. 이것과 저것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은 상태. 유가 무가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구분되어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존하여 섞여 있는 상태.” -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 김광석, <불행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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