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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Jun 25. 2020

때론 얼버무리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길에 들어서면 온갖 냄새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쌓아올리고 시간이 발효시킨 톡특한 향들. 원래 그 골목에 배여있는 고유의 체취는 물론이고, 비가 흩뿌리면 체육 시간 뒤의 땀냄새같은 흙냄새와 이끼 냄새가 확 피어오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얼굴 모를 취객이 흩뿌린 민망한 냄새를 맡아야 할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저녁 무렵이 되면 창문 틈으로 된장찌개, 김치찌개, 고등어 구이 등 그날 저녁의 반찬 냄새가 뒤섞여 작은 뷔페와 같은 어지러운 향연을 벌이기도 했다.


골목길을 지난다는 것은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상해보는 일이자, 누군가의 소소한 일상을 떠올려 보는 일. 문 틈으로 새어나온 대화 소리와 고함 소리, 아기 울음 소리들로 자연스럽게 어떤 가족들의 삶을 그려보게 되고, 허술한 벽과 문 틈 사이로 삐져나온 가재도구들을 통해 다른 이들의 세월을 엿보게 된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순간은 낯선 골목의 모퉁이를 막 돌아설 때였다. 구멍가게 앞에 이리저리 떨어진 과자 봉지와 늦은 오후 동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한바탕 놀이 마당을 지나 새로운 길의 어귀에 들어설 때면 심장이 콩닥거렸다. 약간 어두운 골목길의 초입은 야시장 귀퉁이에서 번쩍거리던 마법의 성 입구 같기도 했고,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골목길을 들어설 때면 쭈뼛쭈뼛 민망해져 괜시리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혼자 만의 골목길 탐험은 다시 눈에 익은 길을 만났을 때 돌연히 끝나곤 했다.


낯선 골목길을 헤매는 그 버릇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하다. 어딘가 새로운 도시를 가면 집들의 틈새가 나를 유혹한다. 도시의 주름 같은 저 골목길 안에는 어떤 삶과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까. 누가 살고, 또 무엇이 있을까. 이젠 우리들 삶의 이야기가 그리 크게 다르지도,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체념할 나이가 되었건만, 어찌하랴. 좁고 어두운 골목길의 초입에 들어서면 가슴이 설레는 것을. 골목의 수많은 갈래길들이 미처 가보지 못한 또 다른 삶의 페이지이자 어떤 가능성들의 입구인 듯 느껴지는 것을.




‘삶은 때로 골목길을 헤매는 일과도 같다’라고 말하면 개똥 철학 같은 헛소리에 불과하겠지만, 내게 삶은 아직 출구를 알지 못하는 미로를 헤매는 것과 비슷하다. 보다 젊은 날에 삶이란 A에서 B로 향해가는 것이라 믿었다. 마치 비행기에 몸을 싣고 도시와 도시를 오가듯 되도록 목적지에 빠르게 다다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잘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생의 한 순간, 길을 잃고 나니 무엇 하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이었다.


길을 잃었을 때 비로서 여행은 시작된다. 아니, 사실 아직도 진짜 여행은 시작되지 않은 지도 모른다. 어쩌다 이른 아침, 출근 시간 무렵 전철을 타게 되었을 때 출근을 서두르는 이들이 나와는 반대 방향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무리를 헤쳐 나가다 얼핏 생각했다. '아, 나는 아직 저들 속에 있구나. 몸은 비록 다른 곳을 향해 가지만 마음은 아직도 여기에 묶여 있구나.'


삶의 여행은 직장을 그만둔다고 시작되는 건 아니다. 새 명함을 만들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고 시작되지도 않는다. 다른 이들의 시선, 사회적 지위와 성공적인 비즈니스와 같은 기존의 통념을 신경쓰며 살아간다며 당신은 아직도 자신의 영혼이 아닌 타자의 욕망과 질서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하, 빠져나갈 길이 없구나.’ 그런 슬프고도 아픈 자각을 할 때, 삶의 갈림길에 멈춰서서 어디로 향해야 할지 막막해질 때, 길 떠난 뒤 아직 머물 곳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벌써 날이 저물 때, 이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눈치없이 배는 고파와 서글퍼 질 때, 그렇게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졌을 때야 우리는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삶이란 어차피 예측할 수 없는 것, 골목길처럼 여러 갈래이고, 끝날 듯 하면 다시 이어지고 익숙한 듯 하면 낯선 길이 나타나는 법. 그러니 결코 방심하지 말 것.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굴지도 말 것. 사랑이 그러하듯 산책과 같은 것. 여기에서 저기로 곧장 가는 것만이 아닌, 그 곳으로 향하는 길 위의 여정을 즐기는 것. 때로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방향을 얼버무리"*며 걸어 가는 것.























* 이병률의 시, <사랑은 산책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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