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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Jun 28. 2020

기미(幾微)

@카구라자카


어떤 낌새의 목록들.


저녁 그림자, 네 눈 속 풍경, 쌉싸름한 촉감. 서걱이는 풀잎과 낡은 종이 냄새, 낯선 길모퉁이. 계절 사이를 스치는 별빛. 아릿한 추억. 한층 깊어진 물색(色). 고요한 달의 뒷편. 골목과 골목을 헤매던 바람. 간밤의 숙취가 가실 무렵 올려다 본 아득한 하늘. 담벼락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차분한 침묵과 어색한 웃음. 부슬부슬 내리는 빗자국. 한없이 고요하고 투명한 무늬.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의 이유 모를 설렘과 목덜미를 스쳐가는 가을의 기미(幾微). 


조금씩 가을 냄새가 난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여름도 이제 아침 저녁으로 살짝 꼬리를 낮췄다. 목덜미를 스쳐가는 가을의 조짐, 제법 시원해진 바람을 한 모금 들이킨다. 




시작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체 시작(始作)이란 대체 무엇일까?


"<설문해자>에 따르면 시始는 여지초女之初, 즉 ‘여자의 처음 상태’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처음(初)를 말하는가? 처음(初)은 또 옷감과 가위가 합쳐진 글자이다. 여자가 옷감을 자르려고 가위를 대는 작업이 바로 ‘처음’의 의미이다.” *


철학자 최진석에 따르면 가위와 옷감이 만나는 순간, 갈라지는 틈이 생기는 찰나, 그 교차점이 바로 처음(始)이다. 100m 달리기 경주를 할 때, 선수들은 ‘제자리에 - 차려 - 출발(탕)’란 신호와 함께 출발하게 되는데 이 때 ’탕’이란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달리는’ 사이의 어떤 순간이 처음이다. 서로 다른 성질과 상태, 질감, 형태, 느낌을 지닌 무언가가 교차하는 순간.


처음(始)에 지을 작(作)이란 글자가 붙어 있으니 처음을 짓거나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이 시작이다.


시작이란 어떤 완성된 형태를 지닌 구조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길바닥의 갈라진 틈새, 시간의 엇갈림, 일상의 균열과 같이 미묘하고 사소한 것이다. 어쩌면 한여름 무더위가 한창인 8월의 초저녁, 가을의 예감처럼 목덜미를 스치는 한줄기 서늘한 바람과 익숙한 세상살이에 잊혀졌으나, 제 안의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문득 터져나온 빨간 석류 알갱이 같은 욕망과 한바탕 진눈깨비가 흩뿌리기 전 잔뜩 찌푸린 하늘의 예감에 더욱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시작은 어떤 떨림과 함께 다가온다. 만일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순간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이 글은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저기 끄적인 글들을 모아 하나의 형체를 부여해보리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 책은 시작되지 않았으리라.


무언가는 그렇게 시작된다. 어떤 예감에 나름의 의도가 더해져, 여기와 저기 사이의 낮은 목소리에서, 잔잔한 수면 위에 떨어진 물방울의 파동같은 작은 조짐들**과 미세한 마음의 흔들림 같은 어떤 예감으로부터 그렇게, 그렇게. 점에서 선으로, 마음에서 행동으로, 우연에서 필연으로, 그렇게, 그렇게.




*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

合抱之木(합포지목) : 아름드리나무도

生於毫末(생어호말) : 아주 작은 싹에서 나오고

九層之臺(구층지대) : 구층 높은 누각도

起於累土(기어루토) : 한 줌 흙이 쌓여 세워지며

千里之行(천리지행) : 천릿길도

始於足下(시어족하) : 한 걸음 발 밑에서 시작된다.


- 노자, <도덕경> 64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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