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자
장마가 끝난 것일까. 일상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고, 늘상 찌푸려있던 하늘이 간만에 개였다. 전날의 늦은 회식으로 힘든 하루를 보냈기에 황급히 전철역을 향하다, 맑은 하늘에 마음이 설레여 발길 닿는대로 걸어본다. 무거운 마음과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무작정 걷는다.
높은 빌딩 숲 사이로 해는 저물어가고 저녁의 뭉게 구름은 언젠가 품었던 보라빛의 꿈처럼 물들어 있다. 아름다운 저녁이 저무는지 마는 지 상관 없다는 듯 모두들 어딘가로 바삐 향해 가는 사이, 이제는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듯 길게 내린 검은 그림자들이 밤의 우산을 타고 날아오른다.
위의 글과 사진은 내가 지닌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이다. 모두 자기가 잘난 맛에 산다고 말하자면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스타일이라고 하기에는 얕디 얕다. 오랜만에 날씨는 개였고, 하늘의 색깔의 색깔이 예뻤고, 우연히 빌딩의 전광판에서 우산을 든 사람들의 이미지가 날아올라 그 순간을 남겼으나 그 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감탄사 너머로 나아가진 못했다. 어쩌면 그저 똥폼을 잡고 있는 것 뿐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기본적인 배선(配線)과 함께 주변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본적인 ‘내’가 세팅된다. 물이 땅 위의 홈을 따라 흐르듯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채 일종의 경로를 따라 살아간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이다.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다. 내 아이폰, 내 집, 내 차, 내 가족… 그러나 보통은 숨 쉬듯이, 물을 마시듯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모르고 살듯이 말이다.
이처럼 우리가 퉁, 치고 넘어가는 것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짧은 글을 모은 <문화와 가치>란 책에서 독백처럼 이런 말을 던진다. “우리들은 근본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우리들은 물음표를 충분히 깊게 던지지 않는다.”
자신이 갇혀 있는 세상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선, 아마도 당연한 듯 여기는 모든 것들에 물음표를 붙여보는 수 밖에 없으리라. 비록 ‘언덕 위의 바보(Fool on the hill)’*가 될 지라도 익숙한 모든 것들에 괄호를 치고 다시 생각하는 것, 뻔한 말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이유일 것이다.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자기다운 삶의 스타일과 향기를 지닌, 제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는 유일한 ‘나’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로.
*
Day after day, alone on the hill
The man with the foolish grin
Is keeping perfectly still
But nobody wants to know him
They can see that he's just a fool
And he never gives an answer
But a fool on the hill
Sees the sun going down
And the eyes in his head
Sees the world spinning around
매일매일, 언덕에 혼자서
바보같은 미소를 띤 남자는
가만히 멈춰 서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알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가 바보인 걸 아니까요.
그도 대꾸하지 않죠.
그저 언덕 위의 바보는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머리 속의 눈으로
세상(지구)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죠.
- 비틀스, <Fool on the hill>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