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일이었다.
외출 준비를 하려고 화장대 앞에 앉아서 부지런히 얼굴에 이것저것 찍어바르고 있는데 등 뒤 TV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심장에 콕!하고 박혔다. 평소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아니면 TV에 집중하질 못하는 편이라 TV에서 나오는 소리의 대부분은 BGM같은 것이었다. 단지 가끔 조용한 것이 무서워서 틀어놓는 것 뿐인데, 무방비 상태로 있던 내게, 화면 속 할머니의 한마디가, 내가 어떻게 막아볼 겨를도 없이, 내 안으로 침투한 것이다.
"저 어린 것들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한숨)" (정확한 대사는 아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켰다.
KBS에서 방영하는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조금 귀를 기울여 대략 파악한 내용은 이랬다.
어떤 시골마을에 13살, 14살 짜리 형제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부모님이 이혼을 하면서 형제가 이 곳에 오게 된 것 같았다. 할머니는 연신 한숨을 쉬시며, 저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부모가 보고싶을 것이냐고,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들이 저런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지독히 마음아파하셨다. 이런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형제는 동네의 길고양이 두마리에게 매일 밥을 챙겨주며 살뜰히도 챙긴다. 고양이 두 마리도 부모에게 버림 당했을 지 모른다며 자기들이 챙겨야 한단다.
두 형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게 틀림없다. 고양이를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과 함께 아이들의 얼굴에 보이는 어떤 그늘이 저 여린 형제를 덮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문득 그래도 저 아이들에겐 자신들을 밤낮으로 걱정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내안으로 파고든 할머니의 대사가 다시금 떠오른 것이다.
나는 반찬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반찬에 해당되는 건 아니고,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 만들어진 후 냉장고를 방문하고 난 반찬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단지 음식의 온도나 맛 때문은 아니고 어떤 심리적인 원인인데..
사람들이 도대체 왜 냉장고에서 나온 반찬을 먹지 않느냐 물으면 일단 나도 당황스럽다.
꼭 먹어야 하는 상황이면 먹을 수는 있지만, 음식을 삼킬 때마다 마음속의 무겁고 찝찝한 정체불명의 어떤 것을 함께 삼켜야 해서 먹지 않는다는 이유를 말하기가 어쩐지 이상하게 들릴테니 "그냥..." 하고 마는 것이다.
나도 얼마전 그 이유가 궁금해서 그 정체불명의 어떤 것이 뭘까 생각을 하다보니 짐작 가는 게 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할머니가 우리 남매를 키우신 셈이다. 오빠와 나는 집에서 먼 곳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다. 당연히 새벽에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해야했다. 부모님은 잠들어 계시는 시간이고, 할머니는 아침 잠이 없으셨으니 우리 남매의 아침은 할머니께서 차려주셨다. 이런 패턴은 오빠와 내가 각각 고등학교 기숙사, 타 지역의 학교로 전학을 갈 때까지 계속 됐는데 그 몇년 동안 늘 따뜻하고 갓 요리된 맛있는 반찬들은 오빠에게, 오빠가 남겼거나 남긴 게 별로 없어서 냉장고에서 나온 오래된 반찬들은 나에게 배당 되었다.
지금의 나라면 반항이라도 했을 것이다. 왜 오빠만 따뜻하고 맛있는 반찬 주냐고 분명 소리라도 쳤을 것이다.
왜인지 그 때의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먹으라니 먹었고, 혀 끝에 닿는 그 오래된 차가움을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됐을 때 나는 냉장고에서 나온 음식들에 손을 대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고 오랜 시간이 흘러 그게 내 식생활로 자리를 잡았고 차가운 음식은 그저 트라우마 같은 어떤 것으로 남은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오래 되었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매정한 손녀가 된다.
세상에 당신의 하난 뿐인 친손녀인데 굳이 나를 미워하셨을 리 만무하지만, 할머니의 친손자에 대한 내리사랑은 너무도 커서 나에게는 상대적 박탈감만이 돌덩이로 남아, 차가운 음식을 먹을 때면 함께 삼켜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매정한 손녀가 맞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어떤 감정적 지지를 받아본 기억이 한 번도 없다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티비에서 흘러나온 대사 한마디에 출처를 알 수 없는 한 마디가 따라 올라온 것이다.
"속이 상하냐?"
정말이지 당황스러웠다. 밑도 끝도 없이 속이 상하냐니. 앞 뒤 문맥도 파악되지 않는 저 한마디는 어디 꽁꽁 숨어있다가 내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튀어나온 걸까.
내 기억이 정확한 지는 모르겠다.
어떤 속상한 일을 겪었던 것 같은데(친구랑 싸운 것 같기도하고..) 할머니가 평소의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를 하시고는 누운 쪽 바닥에 있는 팔을 굽혀 머리에 받치시고, 나를 보며 그래서 속이 상하냐고 묻는 장면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내가 속이 상할까 걱정하셨던 걸까. 나는 왜 할머니와의 감정적 공유를 하나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걸까. 매정한 손녀.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잠근 것은 나였다.
그 때, 할머니에게 섭섭하다고 나도 따뜻한 반찬 달라고, 나도 이뻐해 달라고 울고 불고 떼라도 쓸 걸 그랬다.
지금 생각하니 왜 아무말도 하지 않아는 지 억울하기만 하다. 만약 그 때의 내 감정을 어떤식으로든 표현했더라면, 내가 그리 혼자서 말도 없이 마음의 문을 닫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나도 그 때, 티비속의 저 따뜻한 형제들처럼, 지금 고양이 한 마리가 사라져서 너무 속상해 울고 있는 저 아이처럼, 좀 더 따뜻한 사람으로 자랐을려나.
기억이 아득했다. 속이 상하냐는 할머니의 말이 진짜 였는지도, 내가 만들어낸 왜곡인 지도 헷갈렸다.
더욱 또렷이 기억해보려 할 수록 진실은 모습을 감추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티비 속에서 흘러나온 많은 대사 중에 유독 그 한마디가 내게 들어온 것도,
동시에 이십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던 낯선 한 마디가 내 안에서 불쑥 존재를 드러낸 것도,
아무런 이유가 없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