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 쏙 빠지는 일주일을 보내고 맞은 토요일이었다.
친구와 저녁을 먹고 적당히 시원한 날씨에 걸맞은 여유를 부리고 싶은 마음에, 근처 바다가 보이는 카페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테라스에서 항구를 내다보며 물에 비친 불빛이 꼭 고흐의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같다는 얘기를 하며
머리를 비워내고 있을 때 바로 눈 앞의 난간이 시야로 들어왔다
포커스가 맞춰진 곳은 작은 거미 한 마리가 난간 사이에 엮어놓은 집이었다.
문득 그 작은 거미집이 두 난간 사이에 걸터있는 모습이 야무지게 느껴져 셔터를 연신 눌러대는데,
친구가 한마디 던졌다
"저 거미줄 중에 첫 줄이 어느 줄일까?"
글쎄.. 첫 줄이 어느 줄일까.. 가장 위에 있는 줄이 첫 줄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치는 동시에
한 가지 물음표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최소 다섯 번쯤은 궁금했던 그것.
여러 번 궁금했음에도 그 답을 한 번도 찾아보려 하지 않았던 그것.
친구의 말에 대답을 하려 했는데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도대체 거미는 첫 줄을 어떻게 치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데 허공에 어떻게 치는 거지?"
황당하지만 우리에게 온 뜻밖의 고민을 피할 길이 없었다.
"거미가 여기서 저기로 줄을 연결할 건데, 정면으로 가면서 엉덩이에서 줄을 빼는 건 말도 안 되잖아? 한 발짝만 가도 추락할 테니까..? 그렇다고 후진으로 가면서 줄을 뺀다? 그것도 당연히 추락할 거고? "
"스파이더맨처럼 줄을 촥 던지나??"
"..."
결국 친구가 검색을 통해 거미집의 비밀을 알아내고 난 후에야 고등교육까지 받은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깨달았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거미가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는 첫 줄을 '기초줄'이라고 한다.
이 기초줄은 집 짓기에서 가장 어려운 단계이다. 연결할 때는 엉덩이에서 실을 빼서 적당한 바람에 날린다.
놀라운 건, 목적지에 기초줄을 날릴 때 먹이를 잘 잡기 위한 최적의 위치와 각도를 고려한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거미는 계획이 다 있었다)
기초줄이 단번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번의 던지기를 시도한다.
맘에 들지 않을 경우 단백질로 이루어진 소중한 자원인 실을 다시 회수하기도 한단다...
그렇게 맘에 드는 위치에 실을 고정시키면, 그 실을 타고 반대편으로 건너간다.
반대편에서는 풀 역할을 하는 다른 거미줄을 엉덩이에서 빼내 기둥에 기초줄을 단단히 붙이는 작업을 한다.
집을 잘 짓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기초가 되는 기초줄이 튼튼해야 하므로 보강공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 분)은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무계획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계획이라고 했다. 영화를 볼 때는 '오... 그럴 수도!'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사실 동의하긴 힘들다.
누군가는 계획한 것을 이루어냈고, 누군가는 계획대로 되지 않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계획을 만들어 나갔다.
인생은 수많은 이벤트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계획대로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연속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적어도 내가 오늘 본 그 콩알만 한 거미는 기택과는 다른 얘기를 했다.
던지기 위해 줄을 만들었고, 던질 각도를 정하고 적당한 바람을 기다렸으며 원하던 목적지가 아니라고 해서 "이번 줄은 망했어.."라며 줄을 내팽개치지 않았다는 그런 얘기를.
5일간의 지독한 스트레스를 견디고 잠시 비운 머리를 작은 거미 한 마리가 도로 채워버렸지만,
그런 내 상태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시원하고 맑은 공기에 살포시 얹혀 있는 왕좌에서 작은 거미가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자기 몸의 딱 반 만한 크기의 벌레 열댓 마리를 거미줄에 가둬놓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