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채 May 12. 2018

어릴 땐 누가 훈남이 될지 알 수 없다

와이츠 형제, <어바웃 어 보이>

“그런데 무슨 일을 하신다고 했죠?” 

“음… 아무 일도 안 합니다.” 

“아무것도요?” 

“넵, 아무것도요.” 


 

철없는 어른 윌(휴 그랜트), 그는 딱히 하는 일 없는 백수지만, 스타일리시한 삶을 이어나갑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히트시킨 아버지의 유산 덕분인데, 캐럴이 들릴 때마다 저작권이 쏠쏠하게 들어오니 혼자서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원 히트 원더’의 축복이자 폐해입니다. 진중함이나 책임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는 연애를 즐기지만 진지한 관계를 질색하고, 결혼이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 상대와 헤어져 새로운 상대를 구합니다. 매번 헤어지고 새로운 상대를 만나는 일마저 부담스럽게 느낀 윌은 방법을 궁리하던 중 핫한 싱글맘들에게 주목합니다. 자유연애의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모임’에 기웃거린 그는 싱글맘 수지에게 접근합니다. 윌은 깃털만큼 가벼운 남자, 하나의 ‘섬’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 상담사이지만 정작 본인이 우울증에 빠진 싱글맘 피오나 품에서 자라는 소년 마커스가 윌 앞에 나타납니다. 남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마커스는 바르고 생각이 깊은 아이지만, 또래 아이들과 잘 섞이지 못합니다. 수업 중엔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엉뚱한 행동으로 놀림을 받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 때문이긴 하지만 피오나가 해주는 대로 순순히 괴이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하고 다닌 것도 한몫을 합니다. 여느 십 대처럼 유행을 따라가지 않을뿐더러 원체 센스라곤 없습니다. 또래와의 공감대가 결여된 소년은 또 하나의 ‘섬’입니다.  


수지와 데이트 약속을 한 윌 앞에 딸려온 것이 마커스였습니다. 피오나의 친구였던 수지가 마커스를 맡긴 것이죠. 윌은 떨떠름합니다. 마커스는 부담 없는 싱글맘과의 데이트를 꿈꾸던 그가 예상 못했던 복병입니다. 한없이 가벼운 모습을 보여주는 윌에게 수지는 실망을 거듭하고 데이트는 실패합니다. 잔머리를 굴린 만큼 허탕을 친 윌은 마지못해 수지와 마커스를 데려다줍니다. 마커스의 집에 이를 무렵, 자살시도를 한 채 쓰러진 피오나를 발견합니다. 

 

다행히도 피오나는 회복합니다. 그러나 엄마가 걱정된 마커스는 엄마를 돌봐줄 새로운 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대상으로 하필 윌을 낙점합니다. 윌이 수지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안 마커스는 ‘엄마와의 데이트 아니면 폭로'를 주장하며 수시로 윌의 집을 찾아 협박합니다. 끈질긴 마커스의 공략에도 혼자만의 '섬'을 수성하던 윌은 끝내 마커스를 집 안에 들이고 자신의 일상 속에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섬’과 ‘섬’이 만납니다. 이것이 철없던 저의 청춘 시절부터 아껴온 영화 <어바웃 어 보이(About a Boy)>의 이야기입니다. 



<어바웃 어 보이>는 코미디 드라마입니다. 보고 또 보았듯 늘 좋아해 온 영화지만, 가슴 시린 걸작이나 마음에 꼽아온 다른 명화들을 대할 때보다는 가볍고 유쾌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찾습니다. 그런 의미에선 주인공 윌처럼 좀 부담 없고 가벼운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벼움 속엔 적절한 진지함도 묻어납니다. 가만 보면 윌이라는 인물이 단지 가벼움을 상징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외롭고 공허한 인물입니다. 소소하고 개인적인 삶에 집착하는 점에선 일면 오늘날 키덜트의 초기 버전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는 유복하고 이기적이며 어처구니 없는 잘못도 저지르지만, 마커스를 성장시킵니다. 고립된 마커스는 윌을 만나며 서서히 자신만의 섬 밖으로 나섭니다. 마커스 또한 윌에게 영향을 줍니다. 윌은 마커스로 인해 좀 더 책임감 있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소년 마커스가 소년 윌을 일깨우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윌과 마커스, 어른인 소년과 아이인 소년, 둘 모두의 성장기로, 혼자는 부족한 인간이지만 둘 혹은 여럿일 때 서로 결여된 것을 채우며 좀 더 완전해진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만약 누군가 제 인생 최고의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꼽아 보라면 곤란해집니다. 아마도 꽤나 멋들어진 작품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시네마 천국>, <죽은 시인의 사회>, <잉글리시 페이션트>, <파니 핑크>, <베티 블루 37.2>, <르 글랑 블루>, <트레인스포팅>, <원스 어폰 어 타임 아메리카>, <대부>, <아마데우스>, <플래툰>, <러브레터>, <아비정전>… 계속 읊어도 끝이 없습니다. 당장 그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참 난감합니다. 감독이나 배우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가 결정 장애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간 수집한 눈앞의 DVD 타이틀을 훑어봅니다. 저만의 명예의 전당입니다. 그만큼 기억하고 싶고, 소유할 순 없지만 가지고 싶은 영화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바웃 어 보이>도 꽂혀 있습니다. 

 

조금 의외인 듯합니다. 하지만 <어바웃 어 보이>는 분명 제가 가장 아끼는 영화입니다, 이사를 가고 전근을 떠나면서도 항상 지니고 다녔습니다. 누군가 DVD를 빌려가 돌려주지 않자 다시금 사서 보관한 유일무이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고백건대, 제가 윌의 라이프스타일을 부러워했던 건 숨길 수 없을 듯합니다. 인물의 느낌과 스타일이 괜찮은 영화입니다. 윌은 분명 헐렁한 면이 있는 인물이고 그 결말은 곧 깨달음과 성숙일 뿐일 테지만, 그럼에도 매력이 있습니다. 보고 있으며 흐뭇해집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휴 그랜트답습니다. 사생활은 그다지 성숙하지 못해도 <노팅 힐>,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러브 액츄얼리>, <브리짓 존슨의 일기> 등에서 보여주었듯 어떤 질량이 보증되는 듯합니다.  


끝이 뻔한 이야기이지만, 유쾌한 해피엔딩이 환영받을 매우 깔끔한 영화입니다. 의외는 없습니다. 사실 진짜 의외는 마커스 역의 니콜라스 홀트입니다. <어바웃 어 보이>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어느 기사를 접했습니다. 사진을 보자 낯이 익은데 긴가민가했습니다. 마커스는 기억해도 사실 니콜라스 홀트란 이름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역 배우가 휴 그랜트와 쌍두마차를 이루는 역할을 곧잘 해냈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남다른 면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사례로 볼 때 아역배우의 재능이란 좀 더 긴 시간 지켜봐야 하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마커스의 경우 외모 면에선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연기이지만, 은연중에 ‘연기는 좋은데 저런 평범한 친구가…’하며 그저 역할에 딱 맡는 외모의 캐스팅이라고 봤습니다.  


기사 내용을 읽자 니콜라스 홀트가 마커스라는 기억의 블록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기사는 이십 대에 이른 그의 사진과 함께 근황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정변’ 아역배우의 사례로 최근 주목받는 가장 핫한 배우라는 것입니다. 섹시라는 낱말도 여기저기 쓰여 있었습니다. <킬링 미 소프틀리>를 부르던 마커스였으니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가 주연한 <웜 바디>를 보았습니다. 사랑의 감정을 느낀 좀비가 다시 심장이 뛴다는 좀비 멜로물이었습니다. 그런 단출한 영화가 오로지 배우 한 명의 힘으로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꼬맹이 마커스가 커서 섹시 남이 다됐네!” 어릴 땐 누가 진짜 훈남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바웃 어 보이>의 두 주인공은 영국의 신구 섹시 배우인 셈입니다.  

# 과거와 현재


마커스의 변신을 본 이후로 자꾸만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그런다고 바뀌진 않습니다. 저의 외모는 원작과 각색이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한편, 영화 <어바웃 어 보이>는 닉 혼비의 동명 소설(1998년)을 원작으로 했습니다. 소설 원작과 더불어 훌륭한 각색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높습니다. 또 한 가지 매력은 배경음악입니다. 브릿팝의 팬이라면 Badly drawn boys의 OST, 집요하게 윌을 공략하는 ‘마커스의 침공’ 장면에 흐르는 U2의 Zoo staion 등을 들으며 귀가 솔깃해지고 반가울 것입니다. 


영화는 ‘혼자는 외롭고 함께 어울리면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함께 하고 싶어도 녹록지 않은 세상입니다. 노력해도 쉽지 않으니 아예 마음을 닫고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 버립니다. 혼자인 것이 차라리 편하지만 엄습해오는 고립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혼자인 시간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꽤 성장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소년입니다. 때론 제 자신이 실망스럽습니다. 그럴 때 저는 가끔 <어바웃 어 보이>를 꺼내어 봅니다. 소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철없는 소년이지만, 아직 소년이니까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되뇝니다. 

 

No man is an island(누구나 혼자가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첫 사랑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