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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May 05. 2018

첫 사랑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

주세페 토르나토레, <시네마 천국>

“알프레도가 누구야?” 

늦은 밤 집에 귀가한 살바토레, 그는 알프레도의 부음을 전해 듣습니다. 고향 시실리의 가족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알프레도, 마음에 품었지만 오랜 세월 부르지 않았던 이름입니다. 이젠 로마의 유명 영화감독이 되어 성공가도를 달리는 그는 지난 30년 동안 고향을 잊은 채 살아왔습니다. 오직 출세만을 위해서 달려온 길. 하지만 알프레도… 살바토레는 잠을 청하며 모로 돌아누워 보지만, 그의 눈이 세차게 흔들립니다. 알프레도의 죽음. 그는 고향 시실리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아직 살바토레가 토토였던 시절, 앞만 보기로 다짐했던 그는 비로소 시간의 옛 그림자를 뒤돌아봅니다. 이것이 영화 <시네마 천국>의 이야기입니다. 


 

액자 속 영화의 무대는 2차 세계 대전 전후 시실리의 어느 마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장난꾸러기 소년 토토는 전쟁 중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 어린 여동생과 함께 살아갑니다. 상영 필름 속 키스신과 베드신을 몽땅 잘라내며 영화 검열을 하던 신부를 돕던 토토는 희뿌연 빛이 뿜어 나오는 영사실에 호기심을 품고, 그곳에서 영사기사 알프레도와 만납니다. 위험하고 귀찮다며 처음엔 토토를 쫓아내던 알프레도는 똘망똘망한 눈의 개구쟁이 소년을 끝내 거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연 그는 점차 영사실의 문도 열어줍니다. 토토는 글을 모르던 알프레도의 검정 시험을 컨닝으로 돕고, 대신 영사실에 들어간 토토는 알프레도로부터 영사 기술을 전수받습니다.  


 

토토와 알프레도 아저씨의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갑니다. 하지만 영화로 아름다워지는 순간, 알프레도는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영화의 시간도 점프해 소년이었던 토토는 청년이 됩니다. 성장한 청년 토토는 이제 알프레도의 뒤를 이어 극장의 영사기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운명의 사랑 엘레나가 들어옵니다. 토토가 엘레나를 훔쳐보며 눈을 떼지 못하는 순간, 토토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제 인생도 달라졌습니다. 전 이제 갗 십 대를 맞이한 열 살짜리 꼬마였습니다. 어느 날 난데없이 아버지의 직장으로 견학을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직장에 무슨 바람이 분지 몰라도 늘 있을만한 일은 아닌데,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미 사춘기에 접어든 형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어머니는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원래 꼬맹이 손을 잡고 이끄는 스타일은 아니셨죠. 하지만 월급을 받는 이상 무조건 한 명은 가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아버지 직장 동료의 가족에 딸려 회사를 견학했습니다. 그들은 저보다 좀 나이가 많은 남매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처음 본 사람이고 이름이 무엇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이젠 알 길 없습니다. 직장 견학도 그랬습니다. 아침만 해도 가기 싫다고 떼를 써서 혼난 참이었죠. 그날의 마지막에 이른 곳이 호암아트홀이라는 극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의 영화는 모두 그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 같은 아이들이 통째로 극장을 점거했습니다. 시끌벅적했죠. 떠들고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상영이 시작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저는 2층의 발코니 좌석에 앉았습니다. 마침내 극장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시네마 천국>입니다. 

 


지금은 나름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지만, 사실 그 시절 만해도 극장과 저의 인연은 무척 얕았습니다. 고사리 손을 이끌려 <로보캅>과 <구니스>를 보았고, 이후로도 <엑설런트 어드벤처>에 웃은 날, <레비아탄>을 보고 후회했을 뿐입니다. 가끔 허락을 받으면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주말의 영화’를 보았지만, 그나마 중요한 키스신과 베드신이 나오면 민망한 나머지 눈을 가려야 했습니다. 지금보단 보수적이었던 그 시절, 키스는 제게 우주선과 달 착륙선의 도킹 같은 얘기였습니다. 그러니 사실상 <시네마 천국>이 제겐 제대로 된 최초의 영화 감상이었습니다. 


 

물론 <시네마 천국>도 아직 영화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릴 때 본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감동 이전에 영화관은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중반쯤 흐르자 몇몇 흥미를 잃은 아이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 흥미진진하다고 느끼기엔 어렵기 마련입니다. 극장 어딘가에서 토토와 엘레나를 보고 얼레리 꼴레리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아직 아이들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아직 이 영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정상이고, 오히려 그런 것이 순진한 아이다워 다행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저는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멀지 않아 멜로의 고전으로 꼽힐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는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애틋하며 회한이 가득했습니다. 토토의 짝사랑, 그 순수한 사랑에 응한 엘레나, 그 한없이 설레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영화의 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꼭 청춘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뿐 아니라 알프레도와 토토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은 무수한 명장면을 남겼습니다. 알프레도는 사실상 아버지 없는 토토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어줍니다.  


 

한편 오늘날 추억 팔이라는 표현이 있듯, 지나치게 추억을 미화하며 감성에 기댄 게 아니냐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추억 팔이라 해도 그중에 으뜸인 마스터 피스라고 해야겠습니다. 심금을 울릴 만큼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건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사실이니까요. 아마도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손꼽을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전형적인 이야기를 지루해하고 새롭고 빠르며 시원하고 경쾌한 것을 좋아하는 오늘날, 당장은 낡고 오래된 멜로 영화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돌고 도는 시대의 유행과 달리, 고전에 대한 평가는 변치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 언제 누군가는 반드시 사랑할 작품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처음 볼 당시 갗 열 살인 저도 세세한 이 모든 감정을 느낀 건 아닙니다. 당시로써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고, 뭔지 모를 덩어리 통째의 감각을 느꼈을 뿐입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도 그랬습니다. 잊기 어려운 선율이지만 누구의 솜씨인지 이름도 몰랐습니다. 한 마디로 ‘좋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듬성한 느낌 이후로 생각날 때마다 찾아보았고 어느새 <시네마 천국>은 오래도록 제 마음의 영화 중 일 순위로 남아있습니다.  


 

그날 아침 강제 견학에 불만을 품었던 것과 달리,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행복했습니다. 영화에 집중했고, 스스로 토토가 되며 엘레나에게 흠뻑 빠졌습니다. 무리 속의 고독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주변의 소음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극장에 홀로 앉은 토토, 그러니까 살바토레가 알프레도가 남긴 ‘키스 몽타주’를 보며 머리 뒤로 깍지를 끼울 때 저도 깍지를 끼우는 척 손을 올려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달래야 했습니다. 이대로 극장을 나서면 놀림을 당할 게 뻔했습니다. 부끄럽게 느낄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때 전 처음으로 영화라는 장르를 사랑하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극장이 밝아지자 왠지 막 설레며 그런 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그 날 저도 잠시 어른이 되는 <빅>의 마법에 걸렸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네마 천국>은 토토의 행복한 눈물로 끝납니다. 길이 남을 유명한 엔딩이죠. 하지만 그것은 극장판이고, 사실 <시네마 천국>의 숨은 이야기는 거기서 좀 더 나갑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디렉터스 컷을 본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현재의 토토, 살바토레가 기어이 엘레나와 재회하는 것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턴 어른 멜로입니다. 그걸 보고 처음엔 저도 실망했습니다. 사족 같은 기분이 들었고 차라리 보지 않은 눈을 사고 싶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을까?”  


 

하지만 또다시 좀 더 나이가 들어 지금 다시 보니 납득이 되는 것입니다. 감독은 아름다운 추억만이 아닌 현실까지 보여줍니다. ‘만약 그때의 첫사랑을 지금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의문에 충실한 답을 제시한 셈입니다. 분명 영화의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했다가 그 부분을 보면 선뜻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영화를 보고 내심 ‘엘레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토토가 엘레나와 잘되었으면 좋겠는데’하는 마음을 품지 않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렉터스 컷은 궁금했던 모든 이야기를 담습니다. 일면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연상시킵니다. 어른 사랑의 모든 것 아니, 사랑의 모든 측면을 포괄한 것입니다. 이로써 <시네마 천국>은 멜로의 A-Z까지 모든 걸을 담은 멜로의 전당에 입성하게 됩니다. 일부에 그치지 않은 완결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영화를 대하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 셈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에 그칠지, 후일담까지 볼지.  


 

<시네마 천국>을 본 이후로 짝사랑에 눈을 뜬 저는 십 대 시절, 그러니까 사랑의 후일담, 현실 사랑을 보기 전까지 헤맨 것이 사실입니다. 너무 토토적 감성에 이입된 것입니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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