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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Aug 21. 2018

그녀의 귀‘향’살이

리틀 포레스트

수북이 눈 쌓인 시골의 어느 밤, 혜원은 터벅터벅 걸어 고향집으로 돌아옵니다. 임용 고시에 낙방한 그녀는 타향살이에 지쳤고, 열패감 속에 채워지지 못한 배고픔을 채우며 잠시 몸을 웅크릴 곳이 필요합니다.  


집엔 아무도 없습니다. 혜원의 어머니는 그녀가 대학 입시를 마치자 예정된 듯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렸죠. 세상 둘도 없던 모녀 사인데… 혜원은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곳을 떠나 도시에서 독립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건 오히려 혜원이었는데 말이죠. 어쨌든 당찬 혜원 또한 개의치 않고 상경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정말 쿨 내 진동하는 모녀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혜원이 고향집을 돌아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곳은 원래 아버지의 고향입니다. 어릴 적 와병 중인 아버지의 요양을 위해 귀향했고, 아버지를 여읜 이후로도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왔습니다. 이제 이곳은 그녀의 뿌리와 같은 장소인 것입니다. 독립한다며 멀리 가지를 뻗었지만 귀로에 접어든다면 결국 그 끝에 이를 곳이죠.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닙니다. 도시 생활을 접고 귀농을 결정한 것도 아닙니다. 잠시 쉬어갈 뿐입니다. 때문에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실패, 낙오… 자존심도 상합니다. 아직 헤어지지 못한 도시의 남자 친구는 이번에 임용 고시에 먼저 합격했죠. 막연한 현실에 대한 곤란한 질문들은 받기 싫습니다. 잠시 유보해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이 오히려 숨어들기 어렵습니다. 모두들 금방 그녀의 귀환을 알아내죠. 


오랜 친구 재하와 은숙이 그녀를 반깁니다. 재하도 혜원처럼 도시로 나갔다가 먼저 귀향했고, 은숙은 도시 탈출을 꿈꾸며 계속 이곳에 머물러왔습니다. 각자 사정은 달라도 오랜 친구에게 긴 시간의 어색함이란 불필요합니다. 셋은 어릴 적처럼 뭉칩니다. 타박도 받지만 근처에 사는 고모와 이웃들의 도움도 받죠. 새로운 식구 오구와 닭도 생깁니다. 농사일을 돕고 하루하루 소박하지만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습니다. 군침이 도는 먹방이 연이어지고, 잠깐 머문다던 그녀의 귀‘향’살이도 길어집니다. 겨울에서 봄, 봄에서 여름 다시 가을 그리고 겨울로…



이렇듯 사계절 동안 이어지는 이야기가 <리틀 포레스트>입니다. 영화가 좋다는 소릴 많이 들었지만 조금 미루다가 뒤늦게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자연스러운 끌림에 따른 것이지만, 어떤 면에선 흔한 먹방을 곁들이며 귀농의 환상을 자극하지 않을까 지레짐작한 부분이 있었던 듯합니다. 과연 그 짐작이 틀리진 않아 <리틀 포레스트>는 시골의 자연 풍광 속에 깨끗한 먹거리를 아무런 거리낌 없는 오랜 친구들과 나누는 내용입니다. 그 이면에 가족과 청춘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여 성장 드라마의 의미를 더했습니다. 하나하나는 신선하다고 말하기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틀 포레스트>는 옳았습니다. 흔한 재료도 어떻게 조화되느냐에 따라 달랐습니다. 


또한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려 잔뜩 힘을 주고 어떤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좋다는 느낌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제대로 보여준다면 충분했습니다. 영화는 정적이지만 그 느림 속에 행간의 여유가 있고, 관객은 그 흐름 속에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함께 쉬어갑니다. 복잡한 사정이 있어도 굳이 구구절절 풀어놓지 않는 이 영화는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고, 이미 알아서 편하며, 뻔해도 큰 위로가 되어줍니다. 영화 속 아름다운 풍경과 먹거리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일깨운다고도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 자체로 ‘치유’가 된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감동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한편 영화의 결말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두고 있습니다. 완전히 돌아온 게 아닌 혜원은 다시 한 발자국 나아가기 위한 인생의 ‘아주 심기’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그 결말을 해석하는 건 관객 각자의 선택입니다. 아마도 모두 나름의 시각에서 혜원의 선택에 공감할 것이지만, 중요한 건 가만히 내버려두면 해결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며 좀 쉬어가도 되지만, 마냥 제쳐두어선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반드시 귀농의 삶을 찬미하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어떤 다른 삶의 변곡점에 서서 변화를 택할 때도 ‘아주 심기’는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저만의 작은 숲을 찾아 저를 아주 심길 원하는 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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