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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Jan 21. 2019

새롭지 않은 신세계 발견

바스쿠의 희망은 없다


빈번히 인도를 드나든 술탄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혹 이 길이 아닌가?”

말 그대로 물리적 길이든, 어떤 사명을 띤 길이든, 그 길을 가다가 순간 길치가 된 듯 방향을 잃는다. 어디로 가야 할까… 막막한데, 때마침 누군가 나서 길을 이끌어준다. 다행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그 귀인이 끝에 이런 말을 덧붙인다. “역시 난 콜럼버스라니까!” 그러자, 고맙긴 한데 자꾸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제발… 콜럼버스 아니라니까!’


인도의 콜럼버스는 바스쿠 다 가마다. 키워드를 무조건 달달 외던 주입식 교육의 흔적 탓에 바스쿠 다 가마 하면 곧장 희망봉부터 떠오른다. 희망봉, 인도 항로 개척.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다를 바 없다. 이게 아닌데… 무언가 어긋났지만, 한번 머릿속에 각인된 걸 지우자니 오랜 습관을 버리듯 번거롭다.


신항로 발견 - ZUM 학습백과


콜럼버스와 바스쿠 다 가마, 유럽의 '위대한' 두 탐험가는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1492년 대서양을 통해 서쪽으로 향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0-1506년)는 아메리카 대륙에, 1497년 동쪽으로 떠난 바스쿠 다 가마(1469-1524년)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넘어 인도에 닿는다. 이미 인도로 가는 길은 있지만 그들만의 길을 찾는 여정이었다. 선박 건조 기술이 뒷받침된 시대, 소문의 근원지를 쫓아 ‘가보면 나오겠지 식 항해'로 바닷길을 더듬는 험난한 여정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순수한 열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세운 명분은 많아도 목적은 하나, 인도의 향신료였다.


그들은 가로막힌 육로를 피해 인도와 직거래를 트려고 했다. 오늘날 세계 무역의 일대 전환점으로 기억될 만한 일이다. 문제는 상도의가 없었다. 자극적인 소문으로 키운 막연한 환상과 기대 속에 바닷길이 열렸고, 탐험의 깃발 아래 무분별한 탐욕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타 문명에 대한 이해와 존중 없이 욕망의 크기는 컸다. ‘엘도라도의 황금’이 그랬다. 토착민은 황금의 가치를 물질적으로 보지 않아 종교의식에 쓰며 호수와 강물에 투척했는데, 이를 본 서구인들이 그 의미를 곡해하고 와전해 ‘엘도라도엔 금이 흔하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후 맹목적인 골드러시가 이뤄졌고, 전염병까지 퍼뜨려 평화로운 삶을 살던 토착민들은 거의 멸절되다시피 했다. 당연하지만, 그러고도 그들은 엘도라도에서 황금을 찾지 못했다. 황금 자체가 많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와 흡사한 사례가 당시 그들이 발견한 '전혀 새롭지 않은 신세계' 도처에서 발생했다. 물론 실제로 '황금'을 손에 넣는 경우도 있었다. 그곳이 바로 인도였는데, 당시 인도의 황금이란 '검은 보석'으로 알려진 후추 등 향신료였다. 인도인들은 바스쿠 다 가마가 희망봉을 넘은 일이 그리 희망적이지 않단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그건 불행의 서막이었다.


바스쿠 다 가(져가)마는 1460년 포르투갈 남서부에서 군인(지방 사령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항해 기술을 배우고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점차 선원으로 명성을 얻었고, 국왕 마누엘 1세와 왕자 엔히크의 지원을 받아 항로 개척에 나섰다. 원정대를 꾸린 그는 1497년 7월 상 가브리엘 호 등 4척의 선박, 170여 명의 선원을 인솔해 리스본을 떠났고,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이듬해 5월 인도 캘리컷(現 코지코드)에 도착했다.


인도 캘리컷에 상륙하는 바스쿠 다 가마의 원정대(좌), 캘리컷의 자모린을 알현하는 바스쿠 다 가마(우)


이미 아랍과 무역을 하던 캘리컷도 처음엔 그를 환대했다. 인도의 입장에서도 아랍 상인에 의존하지 않는 시장 다변화는 바람직했다. 무역 증가를 원하는 입장에선 가능성을 열어 놓는 법이고, 포르투갈과의 관계가 새로운 자극제가 되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바스쿠 다 가마의 속내는 좀 달랐다. 바스쿠 다 가마가 찾아오자 캘리컷을 다스리던 자모린이 물었다.

“그래,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고?”

“저희에게 후추나무 종자를 내주십시오!”  

아예 후추나무 종자를 가져가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자모린이 바스쿠의 무지를 일깨우며 답한다.

“내줄 수야 있겠지, 다만 이곳의 기후까지 얻어갈 순 없을 텐데?”


후추 재배를 위해선 종자뿐 아니라 적합한 인도의 기후(현지 몬순 기후)가 필요했다. 이제 방법은 인도에 거점을 만들고 캘리컷과 무역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문제는 경쟁자들이었다. 경쟁자인 아랍 상인들은 캘리컷과 이미 독점적인 무역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아랍에 비해 포르투갈은 인도에 내줄 것이 없었다. 보잘것없는 포르투갈 원산품으로는 거래가 성사될 리 없음에도 캘리컷과 아랍의 관계를 깨는 것이 숙제였다. 첫 수가 막혔지만, 바스쿠 다 가마는 실망하지 않았다. 시장 동향을 파악한 그는 틈새를 만들어낼 복안을 강구하는데, 주제 파악을 못했던들 어려운 임무는 수행해낼 수완이 있었다.


마침 그에겐 향신료 확보 외에 다른 미션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선교 활동이었다. 하나가 답이 안 보이면 둘을 함께 놓고 본다. 십자군 전쟁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은 오랜 앙숙 관계니, 종교를 명분 삼아 아랍 상인들과 의도적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해 당시 캘리컷과 경쟁 관계에 있는 코친을 이용해 캘리컷을 견제하며 압박했다. 아랍을 밀어내고 기존 무역 질서를 흔드는 데 성공한 그는 마침내 후추 무역의 주도권을 쥐고 금의환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1497년부터 1499년까지의 1차 원정이었다. 여행은 가는 길보다 돌아가는 게 힘들어 귀국길(계절 상 길어진 인도양 횡단)에 선원의 반을 잃는 불상사를 겪지만, 후추로 만선을 이룬 그는 국가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작위를 하사 받는다.


1502년 그는 군함 등 총 스무 척의 선박을 이끌고 재차 인도로 향한다. 아랍 상선을 봉쇄하고 그 함선을 격퇴해 해상 무역로의 주도권을 공고히 한 것이다.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 디우 및 아랍 연합군과 벌인 디우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고아(1510년), 디우(1535년), 다만(1558년) 지역을 차례대로 식민 거점화해 나간다. 수적으로는 아랍과 인도의 연합군이 우세했으나, 무기의 질이 달랐다. 물론 포르투갈의 득세도 오래가진 못한다. 골드러시의 장점은 선착순의 일확천금이지만, 단점은 누구나 노려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포르투갈의 대박을 곁에서 바라본 유럽 국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곧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이 가세했다. <문명의 충돌>에서 새뮤얼 헌팅턴은 ‘정복은 교역을 동반하지 않을 수 있지만 힘은 거의 예외 없이 문화를 동반한다.'라고 했는데, 그들은 교역으로 인도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차례로 인도 해안에 닻을 내린 그들은 주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그 최종 승자는 영국이 될 것이었다.


인도로 떠난 선단(좌), 남아공의 희망봉(우)


15-18세기 유럽인들이 세계를 탐험하며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시대, 그들은 그 시절을 일컬어 '대항해 시대' 또는 '대발견 시대'라고 한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은 포르투갈인에겐 막대한 이익을 안겼다.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니 그들에게 바스쿠 다 가마는 영웅이다. 하지만 그 밖의 시선에선 그를 미화할 근거가 별로 없다. 배 좀 탔다면 모를까…  종교, 국가라는 어떤 숭고한 목적 이전에 개인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후추를 향한 흑심을 관철했다. 그는 (공정한 무역을 하던) 아랍과 이권 싸움을 벌였고 평화로운 인도에 혼란을 야기했으며 식민지 시대의 빗장을 열었다.


선교의 목적이 있었다지만 인도 문화에 문외한 포르투갈의 방식은 거칠고 강압적이었다. 순순히 따르지 않은 인도인들은 억압받고 삶의 터전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인도가 독립한 이후까지도 영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인도 서해안의 고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끝까지 반환을 거부하자 인도는 1961년 무력을 동원(비자이 작전)해 실지를 회복에 나섰고, 고아는 무려 451년 만에 인도의 품으로 돌아왔다. 인도인의 자존심을 회복한 사건이었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엑조틱'이란 표현을 즐겨 쓰는 휴양지 고아는 이처럼 이국적인 아름다움 이면에 식민지 역사의 그늘을 품고 있는 것이다.


비자이(승리) 작전(좌), 포르투갈 군 포로(우)


선교의 관점에서 인도로 떠난 인물을 꼽자면, 1542년 고아로 들어가 대학을 설립하고 선교 활동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이후 일본까지 건너간 스페인 출신 가톨릭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년)가 있다. 또한 그 바탕 위에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벌인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 로베르트 드노빌리(1577-1656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인도인을 우상 숭배자로 보지 않았고 그 문화를 보다 존중한 접근법을 시도하며 스스로 브라만을 자처했다. 그 노력의 결실이 오늘날 이어져 남인도에는 교회와 성당, 기독교인을 심심치 않게 마주한다. 더불어 독일 출신의 영국 철학자로 인도 사상을 연구하며 베다를 성경과 동일선상에 놓고 본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1823-1900년)를 되새기면, 인도로 떠난 서구인들 가운데 인도와 진득한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있는 만큼, 그들 스스로 길을 선점한 인물의 업적을 지나치게 과장해 상찬 일색일 이유가 없단 생각이 든다. 


(좌로부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브라만으로 행동한 로베르트 드노빌리,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그럼에도 포르투갈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500주년 행사를 추진하며 자신들만의 영웅을 기리려 했다.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인도인에게 결코 환대받을 리 없는 그의 기념행사를 반대하며 인도에선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물론 부정적인 역사일지언정 지울 순 없다. 다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위대한 ‘대’ 항해 시대는 없고, '대' 발견이란 더더욱 없으며, 바스쿠의 희망은 없다.


서쪽으로 향한 콜럼버스 또한 오류가 많은 인물이다. 콜럼버스가 ‘그들’ 중 첫째가 아닐 가능성도 높다. 신대륙이 아닐뿐더러 그 이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한 서구인은 바이킹이란 주장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야만인보다 왕실의 후원, 종교의 후광을 업은 인물에게 무게를 실어준 건 (그들 간의) 또 다른 논란거리다. 어쨌든 현지인이 아는 맛집을 본인이 처음 갔다고 새로운 맛집의 발견이라니… 그건 맛집의 재발견일 뿐이다. 애초 콜럼버스는 어떤 사명감 이전에 탐험과 발견의 대가로 돌아올 자기 몫을 미리 약조해둔 위탁 탐험가였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만들어낸 영웅일 뿐이다. 


어릴 적 그들의 이야기에 설레고 우러러보며 새로운 곳을 향할 때면 거의 본능적으로 떠올렸으니, 그런 만큼 배신감도 든다. 더 이상 그들에게서 영감을 받긴 어렵지 않을까? 타 문명을 파괴하고 공존 대신 역병을 퍼뜨린 그들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의 역병이기도 했다. 인도 또한 그로 인해 다시 한번 면역력을 길러야 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건, 좋든 싫든 그들이 넓힌 네트워크가 지금의 세계로 이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좌로부터) 나이 든 바스쿠 다 가마, 그의 고향에 세워진 동상, 포르투갈에 세워진 대항해 시대 기념탑


후추를 얻은 바스쿠 다 가마는 고국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금의환향했다. 그렇다면 그 끝은 어땠을까? 바스쿠 다 가마는 일생에 걸쳐 총 세 차례 인도 원정길에 올랐다. 앞선 두 번의 원정길에 이어 마지막 원정은 1524 년이었다. 이미 백작의 자리에 오른 그는 당시 무능함을 비난받던 인도 총독을 대신하라는 국왕의 명을 받들어 고아로 향한다. 하지만 그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말라리아에 걸린 바스쿠 다 가마는 그해 12월 코친에서 사망한다.


한편 인도를 찾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총 네 차례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했고, 바스쿠 다 가마와 달리 제 명이 다할 때까지 살았다. 그러나 그가 내려선 땅은 인도가 아니었고, 그토록 고대하던 후추도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신대륙'에서 일확천금을 거머쥐지 못했다. 원래 이탈리아 제노바 사람인 콜럼버스는 스페인 여왕의 총애로 왕실의 후원을 받아 탐험을 진행했는데,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최초의 낭보와 달리 막상 기대한 성과가 없자, 실망한 왕실의 반응은 이내 시큰둥해졌고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성과에 혈안이 된 그는 토착민을 착취하고 노예화했다. 피폐해진 삶 속에 전염병까지 옮은 토착민 인구는 이후 급격히 줄어들었다. 콜럼버스 또한 재산과 지위를 빼앗기고 사기꾼이란 냉대 속에 비참한 말년을 보내다가 숨을 거둔다.


그가 사망한 뒤에야 스페인은 황금시대를 연 공로를 치켜세워 그 묘를 세비아 대성당에 두었다. 그러나 생전에 당한 멸시에 죽어서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던 그의 유언대로 유해는 세비아 대성당의 묘가 아닌, 여러 곳으로 나뉘어 진짜 무덤은 오늘날 쿠바 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 까닭인지 특이하게도 세비아 대성당의 관은 발 없는 새처럼 공중에 떠 있다. 유해가 그 아래 바닥에 있다고 믿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땅이 진짜 인도라고 믿었는데, 죽어서는 원하던 곳에 가보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와 같은 운명이라면 남미와 동남아에 이른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1521년)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동남아에서 원주민과 전투를 벌이다 창으로 난도질당한 채 최후를 맞이했다. 마젤란은 그 스스로의 이름으로 명명한 마젤란 해협을 거쳐 태평양과 대서양을 항해한 기록을 남겼으나, 세계일주를 완성하지도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지도 못했다. 바다 사나이는 바다에서… 그보다는 (인도로 떠난 사람답게) 결국 자신의 업보 속에 잠들었다 할 것이다.


(좌로부터) 바스쿠 다 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페르디난드 마젤란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의 불청객, 식민지 시대의 길잡이였다. 돈 벌 궁리로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탐험해온 건 인류의 오랜 습성이니, 이익 추구의 욕망 자체를 비난할 순 없다. 누구나 목적을 가지고 인도로 향한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며 단지 인도를 몹시 사랑해 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그것대로 언젠가 달게 평가받을 일이다. 다만, 희망 없는 바스쿠를 돌아보고도 습관처럼 대항해 시대, 대발견 시대, 신세계 개척, 신대륙 발견… 이란 말을 끊지 못하면 부끄러울 것 같다. 인도인이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고의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표현을 부지불식 간에 쓰진 않았을까? 


적어도 인도를 두고 '신시장', '발견', '개척' 이란 표현을 쓰는 건 결례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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