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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Jan 28. 2019

지상 최대의 찻집을 개업한 스파이

여왕의 보석

코이누르의 행방


“네 눈을 내놓을래, 보석을 내놓을래?”

나라면 당장 보석을 내놓겠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눈을 잃으면 보지 못할 아름다움이거늘, 자신의 두 눈 대신 보석을 선택한 것이다. 곧이어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들린다.

"악, 아악!" 코이누르가 뭐길래…


페르시아어로 ‘빛의 산’을 뜻하는 코이누르는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186 캐럿)다. 인도 골콘다(現 안드라프라데시)의 광산에서 채굴된 것으로 14세기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데, 원래 말와의 소유였던 것이 남인도 칼카티야 왕조에게 넘어갔다가 노예 왕조, 할지, 투글루크, 델리 술탄조 그리고 무굴 제국을 거쳐 노예 출신의 왕 나디르 샤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야말로 역사를 관통하며 권력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으니, 코이누르를 가진 자 세상을 얻는다고 했다.


코이누르로 장식한 공작 왕좌에 앉은 나디르 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보물이니 그것을 차지하는 과정 또한 무수한 피로 얼룩졌다. 그 일화들이 회자되며 절대 권력의 보석은 저주받은 보석으로도 여겨지게 된다. 곧 '코이누르의 저주'다. 무굴 제국이 쇠퇴할 무렵 코이누르는 나디르 샤의 손에 넘어갔지만, 나디르 샤가 암살되자 그 행방은 묘연해진다. 나디르 샤를 배신한 자가 취했을 것이지만, 나디르 샤의 왕자들이 권좌를 되찾았을 땐 이미 어딘가로 빼돌린 뒤였다. 반역자는 눈을 파내는 고문 속에도 입을 다물었다(당시 시력을 뺏는 건 권력을 잃은 자를 집단에서 내치며 가하는 형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반역자는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실력자 아메드 샤의 중재로 풀려나고, 석방을 중재 해준 고마움을 표하며 그에게 코이누르를 선물한다.


이것을 펀잡의 란지트 싱이 사들이며 코이누르는 잠시 다시 인도의 품으로 돌아온다(1813년). 그리고 그는 보석을 힌두 사원에 봉납하라는 유언을 남기지만, 계승자인 둘리프 싱은 인도의 주인이 된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다이아몬드를 바친다(1851년). 이제 여왕의 손에 보석이 들어왔으니 어떤가? 코이누르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고, 저주 가득한 요물이기도 했다. 둘리프 싱이 어떤 의도로 여왕에게 준 것일지, 여왕은 그 저주를 알고도 코이누르를 받은 것일지 모르지만, 전설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란 참 절묘하다. 이제 코이누르는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그것을 손에 넣은 자 세상을 얻지만, 그 모든 불행까지 떠안으니, 오직 신과 여인들 만은 무사할 것이다.'  


코이누르를 다시 인도로 가져온 란지트 싱(좌), 코이누르를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친 아들 둘리프 싱(우)


그러니까 코이누르는 남자가 만지면 큰일 난다. 하지만 이미 7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보석이 진짜 그 보석 인지 아닌지 확신하기도 어렵듯, 다이아몬드에 대한 전설도 그저 흥미로운 가십거리일 뿐이다. 보석은 보석일 뿐이고, 절대 보석의 신묘함이 있다한들 이미 시들해졌을지 모른다. 또한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인간이 초래한 것, 인간의 욕망이 아름다움을 만나 지금에 이른 과정이니 보석보다 인간이 의미심장하다. 여왕도 코이누르의 영광과 저주를 모를 리 없지만, 인간은 믿고 싶은 걸 믿는 것 아닐까? 독립 이후 반환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제국의 향수 그 미련을 붙잡아두는 듯 코이누르는 여전히 영국에 머물러 있다.


한편 '빛'을 잃은 무굴 제국의 운명도 저물어간다. 타지마할을 세우는 등 샤자한 대에 그 절정의 화려함을 구가했지만, 그만큼 제국의 힘은 소모되어가고, 아우랑제브 대에 이르러 민생과 종교 등에 관용적이지 못한 정책을 펼치며 쇠퇴의 길을 걷는다. 결국 극심한 빈곤이 문제였다. 힌두교인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며 인도는 혼란기에 접어들고, 인도 중부의 토후국들이 연합한 마라타 동맹과 시크 왕국 등이 세를 결집해 점차 무굴 제국을 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혼란을 틈 타 이번에는 바다를 둘러싼 새로운 세력이 인도를 탐내는데, 포르투갈에 이어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바닷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15-18세기 경쟁적으로 인도에 진출한 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각축을 벌인다. 당시 각국을 대표해 식민지 건설의 첨병에 선 영국의 로버트 클라이브(1725-1774년)와 프랑스의 조셉 프랑수아 뒤플렉스(1697-1763년)는 장군 멍군 세를 불려 나가는데, 그 방식은 매우 교묘했다. 가령, 인도의 토후국 간에 분쟁을 빚거나, 토후국 내 왕위 계승의 문제로 갈등을 겪을 경우, 프랑스가 한쪽을 지원하면 영국이 이에 질세라 다른 한쪽을 지원하며 그 지원의 대가로 착취에 가까운 이득을 얻어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15년 간(1746-1761년) 이런 방식으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다가 점차 영국이 우위를 점한다. 해상을 장악하고 동인도 회사를 중심으로 정부와 의회의 안정적인 지원을 받던 영국이 루이 15세의 프랑스에 비해 유리했다. 결국 1757년 플라시 전투를 기점으로 전세는 영국 쪽으로 기울었다. 아무쪼록 다이아몬드는 여왕의 친구. 바야흐로 영국 식민지 시대의 도래다.



암호명 포춘


사실 인도의 진정한 보석은 코이누르가 아닌 그 토양과 기후에서 자란 자원이었다. 이미 후추와 같은 향신료가 그랬지만, 식민지 시대 인도는 홍차의 재배지로 성장한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할 대항마로 인도를 주목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인도를 고려하는 건 다를 바 없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종자를 가져와 인도에 심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당시 종자는 오늘날의 최첨단 산업 특허 기술과도 같았으니, 그 이면에서 역사를 움직인 건 역시 치열한 첩보전이었다.


로버트 포춘(1812-1880년)은 ‘포춘’이란 이름이 붙은 식물에서 알 수 있듯 영국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이자 채집가다. 그리고… 그는 스파이였다. 중국에 머물며 동인도 회사를 위해 중국의 차나무 종자와 재배 기술을 빼돌린 인물로, 최첨단 기술의 유출을 시도하기 위해 그는 중국옷을 입고 금지된 지역으로 들어가 산업 스파이 임무를 수행했다.


(좌측부터 시계 방향으로) 로버트 포춘, 그 저서 속 권두 삽화, 삽화2, 삽화3 불법으로 중국을 탐험한 그가 발견한 식물 중 하나인 금귤


홍차 무역을 전적으로 중국에 의지하던 상황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대안이 필요했다. 일찍이 인도 아삼 지방에서 자생하는 차나무를 발견해 시험 재배했지만, 1848년까지 그 평가는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돌파구를 고심하던 동인도 회사는 로버트 포춘을 고용해 중국으로 보냈고, 1848년 중국에 위장 잠입한 그는 시행착오 끝에 1851년 종자와 재배 기술을 빼오는 데 성공했다. 인도 동북부 다르질링의 기후와 토양이 중국과 유사하다는 것을 안 그는 그곳에 중국의 종자를 뿌렸고, 그것이 적중해 상업화에 성공하며 영국으로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전을 거듭한 아삼 차종의 재배 또한 점차 개선되어 대량 생산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중국 홍차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인도는 중국을 견제한 차 재배지로 급부상하고, 인도의 차 생산은 점차 중국을 추월한다. 인도 전역을 잇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철로도 홍차 등 인도에서 재배된 자원을 무역항으로 빠르게 운송 위한 수단으로 건설된 것이었다.


이는 단지 중국의 종자를 인도에 옮겨 심고 기술을 전수한 게 아닌, 차에 대한 새로운 관심, 차 문화 자체를 옮겨 심은 것이었다. 처음에 인도에서 재배된 차는 주로 수출용이었다. 인도인들은 아직 차를 마시는 습관이 없었는데, 1차 세계 대전 이후 홍차 수출이 부진하자 그 상황이 바뀐다. 1903년 인도 조세 위원회(Indian Cess Committee)는 인도 내수 시장 진작을 전폭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오늘날 마트의 무료 시식 코너나 다름없는 방식이었다. 공공기관 및 기업의 식당은 물론 철로를 따라 곳곳에 다관을 설치해 4~5개월 동안 무료로 차를 제공했다. 대대적인 무료 시음회였는데, 휴식 시간에 짜이(인도식 밀크 티)를 마시는 ‘짜이 타임’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깨랄라의 차 재배지 (좌),  짜이타임을 즐기는 인도인들 - Photo by Jacek Reszko (우)


'자, 한번 잡숴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냐!' 과연 한번 맛본 차 맛은 잊기 어려웠다. 판촉 활동이 적중해 인도에도 차 문화가 자리 잡았다. 처음엔 판매가 부진한 재고품과 등급이 떨어지는 찻잎을 소비하려던 것이 발전해 인도 차 연합(Indian Tea Association)이 설립되었고, 연구 시설이 마련되는 등 제반 시스템이 갖춰져 1947년 독립 시엔 이미 연간 28만 톤의 산량에 달하게 된다. 또한 인도의 차는 점차 인도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었는데 그 결과물이 오늘날의 짜이다.


그렇다고 무료 차에 중독된 것이 인도에 차 문화가 자리 잡은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는데, 인도의 환경이 마침 그 조건에 잘 부합했다. 혈관 질환을 예방하고 신진대사 촉진하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건 익히 잘 알려진 효험이거니와 인도의 식수 환경을 고려하면 인도의 ‘짜이 타임’은 권장할 만한 건강한 식 문화다. 게다가 그 각성 효과는 커피보다 강해, 때론 마치 신이 내린 시험에 든 듯한  무더운 날씨 속에 혼탁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가뭄 속 단(비와 같은) 맛’이다. 이를 대체할 음식 문화(탕류)가 거의 없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인도인들은 짜이를 마시며 생활의 리듬과 심리적 균형을 찾는다.


그런 이유로 인도인들은 찻잔에서 손을 뗄 수 없다. 짜이는 일상 음료가 되어 일어나 마시고, 출근 전후와 출근하는 사이에 마시며 식후는 물론 일하는 사이사이에도 즐긴다. 직장이라면 직원에게 하루 몇 잔의 짜이를 제공하는 건 기본적인 직원 복지라고 할 것이다. 차만 마시다가 하루가 간다. 그러니 ‘짜이 타임’도 허투루 낭비할 시간은 아니다. 외국인의 경우 잦은 ‘짜이 타임’에 질릴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사양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참해볼 일이다. 중국인이 상대에게 담배를 던지면 그것이 호의이듯 함께 동참하는 게 바람직하다. 어차피 인도인들은 상대가 어떻든 때가 되면 자신의 찻잔을 비울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바로 전날 이제는 더 이상 짜이를 못 마시겠다고 했건만, 직원은 다음날 또다시 짜이 잔을 내미는 것이다. '예스 오어 예스'라던가? 즉, '마실래 아니면 마실래?'의 문제로 인도에 머문다면 익숙해져야 할 무해한 현지 문화 가운데 하나다. 또한 간단한 문제 하나도 온갖 이견이 오가는 인도에서 모두가 동의하며 공유하는 몇 안 되는 시간이 ‘짜이 타임’이란 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면 짜이를 마시는 것도 일의 일부분인데, 누군가의 말처럼 짜이를 마시는 것의 일부가 일인지도 모르겠다.


짜이왈라 - Photo by Aditya Chinchure (좌), 일회용 도기 잔 (우)

그렇다고 인도인들이 중국과 영국처럼 다도에 예민한 건 아니다. 무엇이 좋은 짜이인지 아닌지 맛을 알고 음미하지만, 격식을 따지거나 그럴싸한 찻집을 찾는 건 아니어서 길거리 어디서든 선 채로 마시는 것이다. 시장통이나 길거리에서 이동 다관과 짜이 왈라(차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를 쉽게 찾을 수 있고, 차를 우려낸 주전자를 든 짜이 왈라가 수시로 돌아다니며 짜이를 '배급'하기도 한다. 길거리 이동 다관에서는 대개 일회용 컵을 쓰는데, 특히 일회용 도기로 마시는 것이 제 맛이다. 그 잔으로 마셔야 진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도기 잔은 세 번을 마시면 그 향이 소실되어 최후의 한 잔을 마신 뒤 바닥에 던져 부순다.


물론 인도 또한 시대에 발맞추어 변해간다. 짜이 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할 순 없어 (아직 가격이 서민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큰 도시의 마트에선 커피를 쉽게 구할 수 있고, 프랜차이즈 등 커피숍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커피맛을 본 인도인은 또 다르다. 새로운 별미에 눈이 동그래지며 커피 한 잔에 화색이 돈다. 사실 남인도의 경우 짜이 이상으로 커피를 즐겨 북인도는 짜이, 남인도는 커피라고 할 만하다. 따지고 보면 남인도의 커피는 짜이보다 더 역사가 오래되었다. 17세기 메카 순례를 떠났던 인도-무슬림 사제 바바 부단이 예멘에서  맛 본 커피를 도저히 잊을 수 없어, 당시 반출이 엄격히 금지된 원두 일곱 개를 허리춤에 몰래 숨기고 남인도까지 들여왔던 게 인도 커피의 유래다. 이후 인도에서도 원두가 생산되고, 교역량이 많은 건 아니지만 산지 특유의 토양과 기후를 만나 인도는 세계 원두 생산국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예멘의 커피 상인(좌), 최초로 인도에 커피를 들여온 바바 부단(우)


인도엔 로버트 포춘의 차가 있다면, 바바 부단의 커피도 있다. 그럼에도 만약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인도는 짜이가 아닐까 싶다. 짜이는 싼값에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대체 불가의 국민 음료다. 그럴싸한 찻집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바꾸어 말하면 인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찻집이나 마찬가지다. 그 문화가 자리 잡게 된 의도와 과정까지 아름답진 않지만, 인도답게 재해석되어 오늘날 인도의 특색 있는 문화로 꼽힌다.


한편, 암호명 더블 오 세븐은 이미 그 시절부터 존재한 셈이다. 다만 살인 면허가 아닌 식물 면허를 가진 스파이로, 로버트 포춘은 영국과 중국 그리고 인도에서 각기 상반된 평가를 받을 인물이다. 임무가 없을 때 아름다운 여인 대신 식물을 사랑한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한 탐험가이자 식물학자로 다양한 식물을 세상에 알린 뒤 인생의 여정을 마치고 1880년 런던에서 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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