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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Feb 04. 2019

백작의 국경선

식민지 시대의 철도, 영어, 국경선

인도에서 얻은 자원(홍차, 목화, 아편 등)을 주요 항구로 이동하던 수단이 인도 철도였다. 영국은 그 광활한 대륙을 동서남북 철길로 연결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자원을 수탈하고 인도를 식민 지배할 수 있었다. 당시 건설된 철로를 기본으로 확장된 현재의 철도 시스템은 국내 운송 및 물류의 핵심으로, 선로의 길이는 총 11만 5천 킬로미터에 이르고, 역사는 7200여 개에 육박한다. 매일 2천만 명, 연간 80억 명이 이용하는 지상 최대 규모의 철로다.


인도의 철도 시대는 1853년 뭄바이 광역을 잇는 노선이 개통하며 개막된다. 영국의 철로 기술과 엔지니어, 그리고 인도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노선이 확장되다가 1870년 뭄바이와 콜카타를 잇는 노선이 개통되며 인도의 동서를 연결했다. 주요 항구 도시를 잇는 선로가 구축되었고, 1895년부터 인도가 독자적으로 노선을 증설하기 시작해 1900년부터는 인도 정부에 귀속되었다. 1920년대에 이미 7만 킬로미터에 육박했다. 초창기 철로 규격이 각기 달랐으나, 1992년 이래 단일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인도 전역을 가로지르는 기차(좌), 전국 철도망(우)


전국 방방곡곡 대륙의 혈을 뚫기에 철로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다른 운송 수단도 나날이 발전할 것이다. 다만 광활한 대륙을 잇는 운송 수단을 갖추는 건 많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고, 발전의 속도는 인내의 시간을 추월하니, 불과 반세기 만에 철로를 갖춘 건 놀라운 일이다.


물론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이다. 가져갈 건 많은데 빠르게 옮길 마땅한 수단이 없어 만든 철로는 불순한 의도로 탄생했고, 험준한 산맥을 관통하는 위험한 작업에 많은 인도인들이 참여해 목숨을 담보로 피를 흘렸으니, 실로 인도의 동맥과 같다.


영국 식민지 시대 농작물 재배지 현황 (1911년)

기찻길을 열었다고 당시 인도의 발전에 진정한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 이전 인도는 가내 수공업에 머물렀으나, 영국이 아니었다면(다소 지연되었을 수는 있더라도) 자원을 갖춘 인도가 일찍이 공업국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인도인의 시각에선 당시 산업화 세계의 리더를 자처한 영국이 오히려 인도의 잠재력을 두려워했고, 자원을 수탈하며 인도를 1차 산업의 농업국에 묶어둔 것이라고 본다. 독립 이후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 속에 인도의 산업 구조는 변모하고 있지만, 여전히 농업의 비중(종사 인구)이 크다.


한편, 인도의 주도권을 거머쥔 영국의 전성기는 정점에 달한다. 작은 섬나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고수처럼 지구 상 어디로든 신출귀몰한 멀티를 했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전성기는 세계 대전까지 이어진다.


영국인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그 시대, 그들은 영악한 전략으로 인도를 잠식해 나갔다. 꽂은 빨대의 구멍은 점차 커졌고, 그 유지를 위해 고유한 문명을 가진 인도에 영국의 사회 체제를 도입했다. 늘 그렇듯 여기엔 정당화를 위한 일종의 명분이 가미되는데, 그건 바로 식민지를 ‘문명화’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영국의 사학자 토마스 바빙턴 매컬레이 경(1800-1859년)은 식민지 사람들을 교육해 영국과 인도 사이 통역의 가교로 만드는 것이 그들이 당면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들의 관점에서) 영국과 인도인 간에도 기호, 관념, 도덕, 지력 등에서 서로 소통 가능한 인도인 집단을 양성하고, 영국식 문화와 시스템을 주입해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일깨우겠다는 것이었다. 메컬레이는 1834년 인도로 건너가 1838년까지 주 인도 자문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산스크리트어 교육 등을 영어 교육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고, 영어를 구사하는 인도인 교사를 교육 현장에 배치하도록 했다. 전통 방식의 교육도 서구식 교육으로 대체되었다.


토마스 바빙턴 매컬레이 경(좌), 인도의 영어 교육(우)


철도가 그랬듯 영어 교육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곧 구직에 있어 영어 구사력은 필수 조건이 되었다. 또한 영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도 이식되어 공무원, 교사, 회계사, 법률가, 기자 등과 같은 직업이 등장했다. 인도의 독립을 이끈 간디와 네루 같은 인물도 결국 법을 전공하기 위해 젊은 시절 영국으로 떠난 유학파였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도인들은 빠르게 사회의 중산층으로 성장해 간다. 의식주에 이르는 생활 문화 전반에 영향을 받은 중산층을 중심으로 영국의 문화는 인도에 정착했고(복식, 차 문화 등), 영국의 뜻대로 인도는 영국 최대의 시장이 되며, 그 영향력이 막대해진 영국은 인도의 정치 군사적인 역량도 흡수하기에 이른다.


젊은 시절 간디(좌)와 네루(우)


그런데 중산층의 성장은 또 다른 변화를 초래한다. 본국과 식민지 간의 차별을 체감한 그들에게 반영 정서가 싹튼 것이다. 과도한 세금 부과 등 양국 관계의 이익을 영국이 편취하자 각성한 인도인들은 저항하기 시작하고, 독립에 대한 열망이 무르익는다. 인도 전역을 연결한 철도 또한 인도를 하나로 묶는데 일조한다. 독립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는 명실상부 인도를 상징하게 되고, 자와할랄 네루는 독립 이후 국가의 초석을 다진 인도의 국부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정치계에 몸담으며 현대 인도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 명문가로 자리 잡는다.


간디와 네루, 이미 언급했듯 이들은 젊은 시절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교육받은 인물들이다. 봉건사회로부터 탈피하던 시대, 법률가는 기존 엘리트 가문의 자손들이 과거에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인의 의식을 가진 이들은 그곳에서 차별을 경험하고 각성해 독립을 이끄는데, 실은 누구보다 영국 문화와 시스템에 익숙한 인물들이기도 했다. 비약하자면 영국인의 사명감은 도리어 인도의 정체성과 인도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일깨운 셈이다.


인도를 대표해온 정당인 ‘인도 국민 회의(INC)’도 원래 그 시작은 지주, 상인,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한 친영 단체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창당했고, 그 이면엔 영국의 입김이 작용했다. 그런데 이후 반영 운동에 앞장서며 독립을 이끌어 냈고, 이후 네루家를 중심으로 장기 집권하며 현대 인도를 조각해왔으니 간디와 네루는 더욱 빛났다.


인도 독립의 영웅들 (좌로부터) 자와할랄 네루, 마하트마 간디, 철인 파텔, 바가트 싱


반면 상대 진영에서는 간디와 네루를 치켜세우면 라이벌(인도 국민 회의)을 지지하는 꼴이니 그 아성을 깨기 위해선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가령 간디의 모순점을 논하고, 바가트 싱(인도의 안중근 의사)처럼 유혈 투쟁을 벌인 인물을 재조명하며 간디가 그를 부정적으로 평했다는 것을 언급한다. 종교 간 화합을 주장한 간디, 네루와 달리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는데, 정권에 따라 어떤 인물의 기념행사에 참여하냐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철인 파텔의 거대 동상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사르다르 발라브라이 파텔(1875-1950년) 또한 인도의 국부로 못지않게 존경받는 인물이니 꼭 간디여야만 하냐는 의미다(그 역시 인도 국민 회의 출신이나 국가 화합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사실 인도 전국이 그런 상징물의 총합과 다름없어, 비판은 있되 헛된 우상화나 낭비로만 본다면 아쉽다. 기부금으로 세워진 동상이거니와, 어떤 의미심장한 이의 제기이기도 하다. 간디는 변함없는 간디지만, 파텔도 있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높이의 철인 파텔의 동상


결국 인도의 중산층이 인도의 독립과 독립 이후 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주도한다. 영국의 영향은 유효해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상당수 영국풍을 계승했다. 심지어 관료주의까지… 영어의 병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법조인, 경제학자,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로 1대 대통령 직을 역임한 라젠드라 프라사드(1884-1963년)는 “우리의 감정이 어떻든 기초 헌법의 대부분은 인도어보다 영어로 서술하는 편이 훨씬 유창 하단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1947년 8월 14일 자정 무렵 네루가 인도의 독립을 선포할 당시 그가 사용한 언어도 영어였다.  


영국이 아닌 유효한 시스템을 따른 것이다. 영국이 아니더라도 그에 상당한 시스템을 갖춰야 했는데, 이미 유효한 것이 있다면 굳이 버릴 필요는 없었다. 독립을 앞둔 인도는 562개 토후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통일되지 않은 인종, 언어, 종교, 문화… 시스템 속에 ‘하나의 인도’를 디자인하기란 쉽지 않았고, 영국의 교육을 받은 지도자들에게 그 시스템은 합리적이었다. 청산해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식민지 시대의 지명과 명칭 등), 손에 잡힌 굳은살처럼 안고 가야 할 것들도 있었다. 철로를 파괴하고 짜이 타임을 금지할 수 없듯 영어 또한 그 다양한 언어 속에 무리 없이 더해졌다. 내성이 강한 인도는 그 본질을 유지하며 변화를 포용했다.


마운트 배튼 백작(좌), 간디와 마운트 배튼(우) - spiritualpilgrim.net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는 건 마운트배튼의 국경선이었다. 독립의 형태를 두고 힌두와 무슬림의 갈등이 극한에 치닫던 시기, 인도의 마지막 총독인 마운트배튼 백작(1900-1979년)은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의 중재자로 나섰고, 매우 손쉬운 방식으로 분할의 지침을 내려 양측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그것이 불씨로 남아 지금까지도 봉합 못할 갈등을 초래했으니 바람직한 중재자가 아니었다.


마운트배튼의 논리는 매우 단순했다. 당시 인도를 구성하던 562여 개 토후국 중 지리적 인접성과 종교 분포에 따라 나누고, 각각 힌두 중심의 인도 혹은 이슬람 국가의 파키스탄을 선택하라고 했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고 당사자들도 기본 합의사항에는 동의했지만, 결국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미봉책이었다. 어차피 이젠 영국의 손에서 떠날 참이니… 사안에 대한 신중함이 결여되었다.


혹자는 그가 무슬림(파키스탄)보단 힌두(인도)에 기울었다고 하지만, 결국 마운트배튼의 관심사는 영국의 이득이었다. 복잡다단한 현지 문제를 간단히 해결 및 봉합하고, 영국은 책임을 피한 채 손을 씻은 것이다. 더불어 향후 관계에 가치 있는 방향까지 고려했다. 영국의 입장에선 어쨌거나 성가신 일을 매듭 한 해결사였다.


마운트 배튼 백작 부인의 담뱃불을 붙여주는 네루


마운트배튼은 영국 왕실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이름이다. 군주제가 몰락하고 세계 대전의 격동기에 접어들며 영향력이 줄어든 영국의 왕실도 생존을 고심하던 시기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인 마운트배튼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해군 제독 출신으로 정치적 야망이 있었고, 왕실에 입김을 불어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했다. 그 작품이 지금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의 결혼인데, 바로 필립 공은 마운트배튼의 조카다. 사실 필립 공은 군대 체질로 해군 경력을 소중히 여겼고 가능한 군 경력을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조지 6세(영화 <킹스 스피치>의 말더듬이 왕 버티)가 일찍 세상을 뜨자, 일찌감치 자신의 야망을 버리고 여왕의 그림자가 되었다. '아! 삼촌…'


헌신적인 필립 공은 아내로부터 몇 걸음 뒤로 물러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아이가 누구 성을 따를 것이냐인데, 원래대로라면 남편의 성을 따르지만, 아내가 여왕이니 그 상황이 좀 애매했다. 필립 공은 다 포기해도 남편이고 아버지니 왕실의 이름만은 마운트배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숙부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의 입김이 있었다. 하지만 윈저 왕가가 어떤 곳인가? 유럽의 다른 모든 왕가가 몰락해도 (이름을 바꿔서라도) 왕가를 지켜낸 사람들이고, 필립 공의 요구는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엔 여왕뿐 아니라 윈저가의 대모인 조지 6세의 왕비도 눈을 부릅뜨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여왕이 세 번째 아이를 낳자 상황은 달라진다. 결국 타협점을 찾아 왕가의 성(性)은 마운트배튼-윈저가 된다. 마지막 인도 총독의 이름은 이렇게 왕실 속에 자리 잡는 것이다. '오! 숙부…'


마운트배튼의 영향력은 찰스 황태자에게까지 이른다. 바쁜 어머니(여왕)와 엄격한 아버지(더 이상 야망을 펼칠 일 없는 군인) 사이에서 방황하던 찰스의 멘토로 나선 그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의 충고는 찰스 황태자에게 많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필립 공에게 그런 것처럼 그는 찰스 황태자에게도 배필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번엔 서로 짝이 맞지 않았다.


인도 파키스탄 분리 독립 전후의 혼란 - spiritualpilgrim.net


여러 가지 족적을 남겼지만, 어쩌면 그는 이 글에서 언급한 인도로 떠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범치 못한 인물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차 한 잔에 곁들인 케이크 조각 자르듯 그가 손쉽게 내놓은 분리 독립의 해법은 결코 묘안이 아니었고, 이후 인도는 피가 낭자하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 갈등은 종교 간 유혈사태, 테러, 인도 파키스탄의 긴장 관계 등으로 악순환되며 이어져 왔다. 마치 인도의 복잡한 세금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당장 명쾌해 보이는 건 결국 더 곤란한 문제로 되돌아온다.


물론 모든 책임을 영국이나 마운트배튼에게 넘기긴 어렵다. 그 이전에 당사자인 인도가 풀어야 할 갈등이었다. 중재할 자리를 만들었다면 현명한 복안을 내놓고 타협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간의 업을 생각한다면) 좀 더 책임감 있는 영국의 결자해지가 필요했다. 힌두와 무슬림을 이간질하며 그 관계를 식민 통치에 요긴하게 이용하던 그들이었다. 갈등을 부추기지 않았다면, 의미 없는 피를 흘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 난장판을 만들고… 킹 메이커가 되려던 인도의 마지막 총독이다. 인도, 티베트, 중국이 합의한 국경선인 맥마흔 라인도 유사하다. 당시 중재를 맡은 영국 대표의 이름이 맥마흔이었는데, 뭐든 이름부터 붙이길 좋아한 듯하다.


마운트 배튼 경의 죽음 - 텔레그래프


마운트배튼 백작의 끝은 좋지 못했다. 어느 주말, 가족과 함께 평소 애착을 가진 북아일랜드의 작은 항구를 찾은 그는 낚시 보트를 타던 중 폭사하고 만다. 당시 그곳은 위험 지대였지만 그는 고집했고, IRA(Irish Republican Army)는 자신들의 테러라고 밝혔다. 한 인간의 그러한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식민지 시대 마지막 총독의 어딘가 익숙하고 씁쓸한 운명이기도 하다. 마운트배튼의 죽음으로 멘토를 잃은 찰스 황태자는 큰 상실감에 빠졌다. 조급해진 그는 배필을 만나려 서둘렀고, 이는 곧 찰스와 다이애나의 세기적인 결혼과 비극으로 이어진다.


서둘러 그은 백작의 국경선과 함께 인도는 독립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는 철도, 영어, 국경선을 인도에 남겼지만, 남긴 것이라면 혼란과 상처 또한 컸다. 그 불순함에 저항하고 버티며 오늘의 인도가 깨어났다.

그럼에도 오늘날 인도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영국의 시선, 그것을 고스란히 옮긴 기사를 보면 때로 ‘그렇게 얼렁뚱땅 헤어진 녀석이... 또 뭘 잘했다고 지금도 가까운 척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얄밉다. 얄밉지만 외세의 명멸이라면 수없이 겪어온 인도다. 미워한다면 역사의 어느 지점부터 미워해야 할까... 다만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고 인도는 의연하다. 늘 그렇듯 받고 또 다음 시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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