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라의 목소리
아득한 과거에서 출발한 '인도로 떠난 사람들'은 어느덧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 긴 호흡으로 보면 동시대에 이른다. 동시대 인물은 불완전하다. 신화와 전설 속 인물은 흐릿한 기억 속에 장단을 맞추고, 먼 역사의 인물은 시간의 단련을 거치지만, 동시대의 인물은 설익고 평가는 이르다. 그럼에도 이 또한 역사의 최종 판결에 이르는 상소 과정이라 믿고, 여러 번 주저하며 계속 이어나간다. 누군가는 그 우여곡절 끝에 적절한 선고를 내릴 것이다. 그런 핑계 삼아 이미 몇몇 인물의 심기도 불편케 했으니, 이제 다음 이야기는 어디로 향할까…
헤세의 인도는 ○다
심한 중이병을 앓던 시절, 서가 속에 우연히 눈에 들어온 소설이 헤르만 헤세(1877-1962년)의 <싯다르타>였다. 아직 인도와 내외하던 터라 이리저리 뒤적이다 다시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맙소사! 그땐 이해도 못하면서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방에 넣고 다녔으니… 꽤나 호시절이다. 여하튼 그런 계기로 내게 헤르만 헤세는 인도와 떼어놓을 수 없는 작가로 각인되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를 만나기 위해 출가해 깨달음을 얻는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싯다르타(1922년)>는 내용 그대로 인도에서 영감 받은 작품이다. 인도가 그를 낳진 않았으나 그 작품엔 인도의 피가 진하게 스몄다. 그 자체로 탁월한 작가지만 인도라는 모티브 없이 탄생하지 못할 작품을 썼는데, 당시로는 신선한 소재를 빨리 캐치한 영민함도 돋보인다. 아무쪼록 모두가 그 문학적 성취를 흠모하듯,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작가가 먼저냐 인도가 먼저냐 따위로 실랑이를 벌일 필요 없다. 그보다는 어떻게 독일계 스위스 인(독일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고, 그 역시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함)이 인도의 피를 수혈받았냐가 궁금해진다.
헤세는 1911년 서른 중반의 나이에 인도로 향했다. 유럽풍이 인도를 한바탕 휩쓸고 지났으니 문학가의 인도행도 특별할 건 없다. 일종의 정신 승리랄까? 침략과 정복 다음엔 문화… 문학가의 ‘정신적 성찰’도 뒤따른다. 그렇게 서구의 많은 지성인들이 인도로 향했고, 인도를 발판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인도라는 아이템의 선점이기도 했다. 그것이 함량 미달의 카피 또는 변형이냐,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하냐, 깊이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창작이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일단 순발력은 인정할 만하다. 그 영감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떠나 인도는 많은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성공적인 창작물은 다시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그 업적이 남달라 인도를 떠난 전과 후로 문학 세계가 나뉘는 경우도 있는데, 헤르만 헤세가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는 인도를 다녀온 후 발표한 <데미안(1919년)>, <유리알 유희(1944년)> 등에서 빛나는 문학적 성취를 이룬다.
헤세는 어릴 적부터 인도를 동경했다. 가족의 영향이 컸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했고, 그의 외삼촌 역시 일본에서 활동한 불교 연구가였는데,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가 태어나 성장했던 곳이 다름 아닌 인도였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그곳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고 집에는 이국적인 물품들이 가득했다. 동양사상에 심취할 만한 배경을 타고났는데, 그는 인도를 일컬어 '영혼의 본향(本鄕)'이라고 했다.
인도에 최적화된 환경과 달리 그는 혹독한 성장기를 거쳤다.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에 실패했고 신경쇠약에 걸려 중퇴했다. 사유는 ‘시인 외엔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짝사랑의 몸살과 자살 기도, 학업 중단과 요양원 입원 등 극심한 ‘성장통’을 앓았고, 작가의 길에서 멀어져 시계공장의 수습생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듯 꿈을 꿀수록 가파른 좌절의 벽과 마주했던 그가 훗날 위대한 문호가 되리란 징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동경한 인도로 가는 길 또한 요원했을 뿐이다.
방황하던 그가 전환점을 맞은 건 서점 직원으로 일하면서였다. 글 속에 파묻혀 글을 쓰며 비로소 작가가 되었다. 시인이자 소설가로 이름을 알린 헤세는 인도로 떠날 결심을 한다. 그건 어머니의 발자취를 쫓은 여정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헤세가 첫 시집을 낼 무렵 사망(1902년)했고, 엄마 찾아 삼만리 같은 인도행으로 어머니를 그리며 자신의 근원과 마주하려 했다. 또한 인도에 대해 이미 상당한 이론적 지식을 쌓은 그가 그 지식을 현실과 접목할 기회이기도 했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출판사로부터 선수금을 받아낸 그는 인도로 출발했다. 그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이었고, 그 여정의 결실이 곧 <헤르만 헤세의 인도 기행(원제 '인도에서', 1913년)>이다.
하지만 여행은 기대와 달랐다. 1914년 9월 여행을 시작한 그는 수에즈 운하를 거쳐 실론(現 스리랑카)에 이르고,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일대에 머무르다가 다시 실론의 콜롬보에 돌아온 것이 11월 초였다. 이후 귀국길에 오르는데, 인도의 전모를 보겠다고 나선 거창한 계획과 달리 불과 3개월 만에 여행을 접었다. 요약하자면 '친구 따라 인도 간다더니, 동남아더라'라는 여정이다. 결국 인도 본토는 밟지도 못하고 그 언저리를 맴돌았는데, 그마저도 꿈꾸고 상상한 것과 실제는 달랐다. 특히 열악한 환경은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매료되거나,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거나… 오늘날 인도 여행자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듯 헤세도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인도를 좋아할 순 없다. 다만 허위는 없어야 한다. 계획과 다른 여행이었지만, 선수금을 받은 까닭에 헤세는 기행문을 썼다. 내용엔 정작 인도가 없는데, 여행의 고단함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기행이다. 너그럽게 봐도 유사 문화권 체험이니, 사실 헤세의 <인도 기행>는 그 제목을 <동남아 기행(유랑)>으로 정정했어야 했다. 다만 그 고충은 십분 이해된다. 도스토옙스키도 그랬던가? 가난한 작가에게 선수금이란 빚의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못된 버릇과 같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생명수다.
아쉬운 여행과 달리 그의 문학은 만개한다. 여행이 그런 것 아닐까? 어떤 마법 같은 직접적인 영향보단 그 자체로 머릿속에 맴돌던 복잡한 생각을 다스리고, 풀리지 않던 의문들도 다소간 해갈할 기회다. 그 경험은 내적 성장으로 이어져 헤세의 경우 인도를 보지 못했고 동양의 모습에도 적잖이 실망했으나, 동양 문화의 가치를 깊이 재고해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작가 생애에 정점을 찍는 원숙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양차 세계 대전 시기엔 전쟁에 회의적인 태도로 독일인에게 비난받고 활동을 제약받는 등 고초도 겪었지만, 시련에 피어난 꽃처럼 집필 활동을 이어가 맹목적인 애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담은 <데미안>을 썼고, 걸작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1946년)을 수상했다. 그 여정이 어떻든 인도를 향해 떠난 작가였고, 혹자는 그의 작품을 통해 인도를 만난다.
하지만 그를 통해서만 인도를 만나면 아쉽다. 해박한 지식과 작가적 역량으로 큰 성취를 이뤘지만, 그의 시각이 모든 걸 포괄하진 못한다. <싯다르타>는 심오한 것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풀어내지만, 충분히 깊은가에 대한 의문도 든다. 때론 헤세도 어쩔 수 없는 유럽인이란 생각도 한다. 인도는 깊게 다루자니 복잡하고, 간결하자니 듬성듬성하다. 쉽고 분명한 건 좋지만, 쉽고 분명한 게 답은 아니어서 단정과 일반화는 본질을 왜곡하며, 인도를 향한 편견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건 우월한 자(?)의 오만으로 비칠 수도 있다. <둔황>을 쓴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도 가보지 못한 둔황의 모습을 소설 속에 묘사했는데(실제 답사한 건 소설을 발표한 지 한참이 지난 뒤였다), 가보지 않고도 멀리 상상하는 건 무언가 연상되는 바가 있다. 신제국주의 시대는 끝나도 여전히 정신은 얽매여, 서구 혹은 그 질서에 동참한 세계는 우월감을 느낀 채 그 밖의 세계를 내려다본다. 그러나 그것은 우월한 자가 아닌,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오만일 수 있다. 그 허위와 빈약함은 결국 적나라하게 드러나겠지만, 애초 접한 시각이 치우친다면 그것을 돌이키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헤세는 '그들'과 달리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정수에 이르렀는가? 그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그 해답이 아닌 그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냐는 자체에 있을 듯하다. 존경해 마지않는 대문호에게 유감은 없다. 다만 한 가지 관점이 세상을 바라보는 만능키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작가의 필력은 찬미하되, 그대로 단정하기보단 그 황홀한 글귀 속의 행간을 되새기고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고 감히 말한다. 헤세도 그렇게 말했다. "아무도 자신이 살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이해할 수는 없다."
내 바람과 달리 아마 제목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인도 기행> 일 것이다. 육중한 작가의 그림자란 그렇다. 실로 (인도로 떠나 인도에 대해 쓴 작가 중에) 그에 필적할 만한 작가도 그리 많진 않다. 인도 봄베이 (現 뭄바이)에서 태어나 학업을 마치고 다시 인도로 돌아와 <정글북>을 쓴 키플링이 있고, <인도로 가는 길>을 쓰고 20세기 영국 문학을 대표하며 당시 영미 문학계에서 각광받은 E.M. 포스터도 있지만, 세월이 흘러 그 관점에 있어 시대의 혼령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평을 면하기 어려웠다. 키플링의 경우, 인도 비하르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동물농장>, <1984>를 쓴 작가 조지 오웰이 그를 일컬어 ‘영국 제국주의의 선지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조지 오웰 본인은 수년간 인도 제국 경찰이 되어 미얀마에 근무했으나, 그 일을 후회하며 식민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자양분으로 삼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기행문을 보자면 그 숫자는 무수해도 세월이 흐를수록 (왕래가 편해졌음에도) 내용과 깊이는 더욱 아쉽다. 그 장대함에 있어선 옛 탐험가들을 넘어서기 어려운데 주관적 감상, 감성적 접근에 다소 치우친 경향도 있어, 그런 의미에선 헤세의 기행도 나무랄 정도는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인도로 떠나며 헤세의 <인도 기행>을 챙겼다.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맨 여행에 벗이 되어줄 단 한 권의 책을 고른 것인데, 막상 현지에서 펼쳐보니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게다가 헤세의 불평불만은 갈 길이 먼 입장에서 좀 성가시게 느껴졌다. 인도가 좋다고 그 환경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인도가 마음에 닿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걸 감내할 만하다고 여길뿐이다. '이 양반 너무 투정이 많군!' 모기를 쫓으며 읽다가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배낭 밑에 넣어두었다. 솔직히 한 권 마음의 양식조차 무겁게 느껴진 그 여정 동안 여러 번 연을 끊을 뻔했다. 그래도 헤세의 작품이니… 갈등하면서도 여행 내내 나 자신에게서 책을 지켜냈고, 다행히 그 책은 여전히 서가에 남아 있다.
인도로 떠난 히피들
서양의 대문호가 가보지 못한 인도를 이야기했다면, 그 후손들은 신비한 인도를 노래 불렀다. 장본인은 20세기 중후반 인도로 떠난 히피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정신을 이어나갈 지상의 낙원으로 인도를 꼽았다. 물질문화에 환멸을 느끼고 정신세계를 갈망하던 때 그 탈출구로 인도를 주목한 것인데, 선대의 문화를 거부한다면서 동양에 대한 막연한 환상으로 인도를 쫓았으니, 실로 그 나물의 그 밥 같은 후손들이다. 마침 힌두교의 세계화 추세와 맞물려 해외 강연회가 열리는 등 인도에 대한 호기심은 증폭되고 구루(종교 스승, 지도자)와 요기(요가 수행자)들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며 그 수행법인 요가 또한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생전 듣고 보도 못한 구루와 요기의 언행에 감흥을 얻은 그들은 성지를 순례하고 명상과 요가 등 수행법을 배울 겸 인도로 향했다. 달리 말해 인도는 저렴한 여비로 장기간 체류하며 값싼 마약을 구해 환각 상태에 머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히피와 궁합이 잘 맞았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전 세계적인 인도 여행의 바람도 이때 불기 시작했다. 인도 입장에서도 여행객이 몰리니 처음엔 환영했다. 인도 도처가 히피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분방하고 무절제한 행동에 보수적인 인도인들은 점차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고, 사회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는 우려 속에 히피는 점차 처치 곤란의 골치 덩어리로 여겨진다.
히피와 함께 인도는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신비한 곳으로 과장된다. 환각에 빠진 히피의 입장에선 과언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 이전에 인도는 온갖 사람이 살아가는 인간 세상이다. 낯선 문화에 신앙심이 강한 곳이긴 해도 13억 인구(세계 인구의 약 6분의 1)가 살아가는 곳이 신비하기만 해서는 제정신에 살아갈 수 없다. 정작 우리 자신에겐 기대하기 어려울 모습을 인도에 투영하는 것 또한 무리다. 하지만 인도는 그곳을 찾은 이방인들이 원하는 이미지 속에 갇혀 수렴되었고, 그것이 인도의 전모인 양, 신비 이미지는 오묘한 관광지의 자극적인 매력 포인트가 되어 무수히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 사이 인도에 대한 실질적이고 다양한 화두, 깊이 들여다봐야 할 신비 이면의 인도는 난해하고 어렵다는 거리감 속에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한편 히피의 인도행에 불을 붙인 건 60년대 등장한 영국의 록 밴드 비틀스였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그들은 전설로 향하는 길목에서 잠시 인도를 거쳐 갔다. 북인도의 성지 리시케시를 방문할 때면 그들의 음악이 마치 주제가처럼 들리는데, 인도의 성지에서 록이라니 얼핏 맥락 없는 록 스피릿 같지만, 필시 연결되는 건 그곳이 바로 인도와 비틀스의 접점이기 때문이다.
비틀스는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에 이끌려 초월 명상법을 창시한 마하리시 마헤쉬(1917-2008년)의 강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처음엔 억지로 참석한 것이지만 호기심이 많은 멤버들은 이내 흠뻑 빠져들었다. 저간의 사정도 그럴 만했다. 상업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그만큼 부담도 컸다. 주변의 기대 속에 성공을 이어나가야 했지만 대중성만큼 음악성의 추구 또한 그들에겐 중요했다. 그런 가운데 사건사고가 잇따라 터졌다. 반항적 이미지와 치솟는 인기에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되며 온갖 논란과 의도치 않은 스캔들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별 다를 것 없이 반복되던 공연에 염증도 느끼던 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매니저인 브라이언 앱스타인마저 사망하는데, 든든한 조력자를 잃은 건 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버팀목이 필요한 때, 비틀스는 마헤쉬를 찾았다. 인도 리시케시로 떠난 그들은 석 달간 머무르며 요기의 가르침을 얻고,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충전하며 앨범 <더 화이트 앨범>의 수록 곡 대부분을 작곡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수행자가 아닌 이상) 점차 정신 수행과 일상생활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데… 다시 말해 인도의 성지는 유흥거리가 일체 없는 지루한 곳이었다. 버티지 못한 링고 스타는 열흘 만에 떠났고, 매카트니 또한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채 한 달이 되자 인도를 떠났다.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은 계속 머물렀지만, 마헤쉬가 그들 뒤에서 조종한다는 의심에 성 추문까지 나돌자, 결국 등을 돌렸다(존 레넌은 그를 비판하는 곡까지 쓰게 된다). 꼭 마헤쉬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당시 스승을 자처한 자들 가운데 진정한 구루나 요기가 있는 반면, 돈벌이를 목적으로 뭇사람들을 현혹한 가짜도 있었다. 인도 역시 세속 사회고 물질 사회이며 그 기회를 십분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깨달음 장사’다. 그처럼 허상을 쫓아 인도로 갔다가 회의감을 가지고 돌아온 인물 가운데엔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도 있었다. 그도 한때 히피였던 것이다.
마헤쉬에 얽힌 소문에 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솔직히 그만큼 그가 인도를 대표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비틀스의 명성을 이용하고 싶었고, 그에게 빠진 비틀스는 결국 지극히 물질적인 인간의 한계를 보며 환멸을 느꼈다. 그 또한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일거수일투족 주목받던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휴식과 안정을 취하며 창작의 영감을 받았으니 비틀스도 딱히 잃은 건 없었다. 일종의 창작 여행이고, 결국 그들도 인도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얻고 싶은 것을 얻어간 것이니… 생각해 보면 겨우 석 달의 시간 동안 그 이상의 것을 얻기엔 빠듯할 듯하다.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비틀스도 인도에서 영감을 받았다. 인도가 신묘하기보다는 이국적인 환경 탓으로 표피를 긁어내도 색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른 한편으로 비틀스가 인도를 찾은 건 결국 상실감 때문이란 생각도 해본다. 인기의 덧없음, 조력자의 죽음… 잠시 상처 입고 웅크린 곳, 그곳이 비틀스의 인도였다. 아무쪼록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뒀음에도 인도로 떠나 실험을 거듭한 그들의 열정은 대단하다. 그들이 곧 문화였던 시절, 그들을 우상으로 삼은 많은 이들이 뒤따라 인도로 향했고, 신비한 인도에 대한 환상을 더하는데 일조했다.
영감의 인도
대중음악을 얘기했으니 인도하면 영화도 빼놓을 수 없다. 인도는 세계 최대 규모의 영화 시장으로, 그 자체로 영화 산업이 발전했지만, 많은 영화인들이 영감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면, 콜카타의 빈민가를 담은 <시티 오브 조이>, 프랑스령이었던 퐁디셰리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파이 이야기>(소설 원작 포함), 뭄바이 빈민가의 소년이 퀴즈왕이 된다는 내용의 <슬럼독 밀리어네어>, 세 형제의 좌충우돌 인도 여행기 <다즐링 주식회사>, 발리우드를 꿈꾸는 여배우들의 여정을 그린 브라질 영화 <발리우드 드림>, 우다이푸르를 배경으로 한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인도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담아낸 <더 폴> 등 다양하고, 한국에도 인도에서 만난 첫사랑을 찾는 내용인 <김동욱 찾기>, 바라나시를 배경으로 한 <시바, 인생을 던져> 등이 있다.
인도는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받아왔다. 이국적인 환경과 더불어 영화 산업의 발전으로 현지 인프라 수급이 용이하기 때문이고(촬영 시설과 장비 및 배우 및 영어 구사 인력 등 인적 자원), 지리적 유사성으로 중동 등 현지 촬영이 어려운 지역의 대체 장소로도 꼽힌다. 가령 배트맨 시리즈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라자스탄을 방문했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꼭 집어 직접 조드푸르를 촬영지로 택했고, 007 시리즈 <옥토퍼시>는 우다이푸르, <본 슈프리머시>는 고아, <미션 임파서블 4>는 뭄바이를 촬영지로 삼았다. 빈 라덴 검거를 다룬 <제로 다크 서티>도 파키스탄 대신 찬디가르에서 촬영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한 장면에서 인도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더 나아가 인도 사상을 영화의 세계관에 접목하기도 한다. 가령,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의 경우 그 제목 자체가 화신을 의미하는 아바타르에서 비롯되고, 그가 애착을 가지고 제작한 영화 <알리타>의 원작인 키시로 유키토의 <총몽>도 인연과 업(카르마)을 세계관으로 삼았다. 극 중 인물들이 이마에 점 하나씩 찍고 등장하는 모습도 보인다. 인도를 배경으로 삼든, 촬영지로 쓰든, 사상과 철학을 모방하든, 인도는 도처에 흔하게 활용되며 그 모두를 합한 흥행 성적 또한 상당할 것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자양분으로 삼아왔다. 언급된 작품과 인물 외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창작품에 영감을 준 인도다. 낯설기 효과가 있음은 물론 그 안에 반만 년간 축적된 정교한 논리가 있으니 탐낼 만하다. 표절이 아닌 이상 창조는 모방에서 출발하지만, 표면적인 모방에 그치느냐, 깊은 세계관까지 투영하느냐는 관전 포인트인데, 여전히 신비한 인도, 감성의 인도 등 피상적인 면모에 치우친 경향은 있다.
인도에서 얻은 영감이 발산된 또 다른 사례도 존재한다. 아프리카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파로크 불사라(1946-1991년)는 영국 식민지 총독부 공무원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는 인도 국적의 페르시아 계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 인도로 떠나 뭄바이의 기숙학교에서 지냈는데, 잔지바르 독립 이후 혼란을 피해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했다(인도행은 그가 완강히 거부했다). 영국의 예술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뮤지션을 꿈꿨고, 1970년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를 만나 록 밴드를 결성했다. 이때 이국적인 본명을 버리고 개명했으니, 바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다.
1973년 데뷔 앨범을 발표한 뒤 1990년 초 이른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퀸'의 일원으로 최초의 뮤직 비디오를 만들고, 최초로 공산권 국가(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공연한 서방 록 밴드가 되는 등 대중 음악사에 족적을 남겼다. 다양한 장르를 접목한 음악적 실험으로 한때 록인지 팝인지 모르겠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사랑받고, 특히 호소력 짙은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와 가창력에 대해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인도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침내 그 이국적인 외모는 물론 변화무쌍한 멜로디의 <보헤미안 랩소디>와 그 속에 흐르던 드라마틱한 목소리의 근원도 이해될 듯했다. 행복 회로가 돈다. 그에겐 인도는 물론 아프리카와 영국의 색깔도 더해졌다. 그가 출신을 감추고 개명한 것을 두고 핏줄을 부정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보수적인 환경에서 태어나 사춘기를 인도의 기숙학교에서 보낸 인물의 내적 갈등과 들끓던 재능으로 성공을 꿈꾼 이방인의 선택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해본다. 성공을 위해 개명한 아티스트는 그만이 아니다. 다만 미인박명,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던 그는 끝내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
인도로 떠나고 인도를 떠난 그는 사후에도 무덤의 소재를 두고 온갖 이야기가 오갔는데, 어쩐지 닿을 곳 없이 외롭게 날던 '발 없는 새'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가 성장한 이후 다시 인도로 간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가 인도인의 피가 진하게 흐르는, 인도에서 청춘을 보낸 파로크 불사라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정작 그는 부정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의도든 본능이든 한 곡의 음악 안에 온갖 다양함이 조화롭게 섞인 모습이야말로 가장 인도적인, 인도에서 얻을 수 있는 영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