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채 Feb 18. 2019

인도를 사랑한 여인들

빈자의 어머니와 이미지


모두가 정복자, 침략자, 탐험가는 아니듯, 힘과 완력 대신 부드러움, 욕심과 야망보다 사랑으로 인도로 떠난 이들이 있었다. 칼 대신 펜을 잡고 영감을 얻어간 것이 예술가들이라면, 이들은 스스로 인도와 세계에 영감을 주었다. 히피들은 허상을 쫓았지만 모두가 가짜 스승을 만난 건 아니었으며, 참된 스승과 우상을 쫓은 그들은 인도로 떠난 여인들이었다.


영국인 여성 마거릿 노블(1867-1911년)은 런던의 한 강연회에서 스와미 비베카난다(1863-1902년)를 만나 그에게 매료되었다. 비베카난다는 ‘라마크리슈나 선교회’를 세우고 전 세계에 힌두교를 알린 종교 지도자로, 그는 사별과 사랑의 배신이란 속세의 내상에 신음하던 마거릿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주었다. 아일랜드 출신  목사의 딸로 원래 교사로 일했지만, 새로운 인생길을 찾아 스물여덟의 나이에 인도로 향했다.


비베카난다로부터 니베디타(신께 헌신하는 사람)란 새로운 이름을 얻고 콜카타에 정착한 마거릿은 ‘라마크리슈나 선교회’의 일원으로 빈민 구호와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녀는 비베카난다를 흠모하고 비베카난다 또한 그녀의 헌신을 높이 샀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두 사람은 애틋함 속에 사랑과 질투의 줄다리기를 하기도 했는데, 이뤄질 수 없는 관계, 종교 지도자인 자신만큼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여인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오갔을 듯하다. 안타깝게도 둘의 관계는 사랑이나 질투가 아닌 죽음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일찍 병을 얻은 비베카난다가 서른여덟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좌로부터) 마거릿 노블 일명 니베디타, 스와미 비베카난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사진


스승 어쩌면 평생의 사랑을 잃은 그녀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인도에서도 또다시 속세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다만 이번엔 인도에서 또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사리지 않고 봉사 활동에 매진했고, 건강이 악화된 그녀 또한 이른 나이에 비베카난다의 길을 뒤따랐다. 니베디타란 이름답게 그녀는 인도인들에게 존경받는 이방인 여성이 되었다.


한 사람에 대한 동경이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영국 해군 제독의 딸 마들렌 슬레이드(1892-1982년) 또한 그랬다. 상류층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로맹 롤랑(<마하트마 간디>의 작가) 등과 교류하다가 간디에 대해 접하고 크게 감화받았는데, 십 대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 머물기도 했던 그녀는 간디와 만날 기회를 꿈꾸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다가 마침내 간디의 아시람(거주 및 수행 장소)에 초대받기에 이르렀다.


마하트마 간디와 미라 벨(마들렌 슬레이드)


서른셋의 나이에 인도로 떠난 마들렌은 간디에게서 미라 벨이란 이름을 얻고, 이후 간디의 제자이자 비서로 그가 운명을 다할 때까지 지근거리에 머물렀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반영 운동에 함께 참여해 투옥되기도 했다. 영국 제독의 딸이 동경한 인물을 따라 영국에 반기를 들었다. 둘은 서로를 신뢰하며 무수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플라토닉의 아슬아슬한 선은 지켰다. 이후 인도는 독립하고 간디는 암살당했다. 간디를 잃은 그녀는 삼십여 년 간 인도에 머물렀고, 독립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위대한 인물에 대한 흠모는 인도와의 인연으로 이어져 종국엔 인도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 시작부터 인도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었던 여인도 있었다. 아그네스(1910-1997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자녀인 그녀는 유복한 환경을 뒤로하고 어려서 일찌감치 출가를 결심했다. 1928년 아일랜드에서 수녀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이듬해 처음 인도로 향했고, 이후 구호활동에 매진해 콜카타에 ‘죽어가는 이들의 집(또는 순결한 마음의 장소)’을 세웠다. 또한 그녀가 1950년 혈혈단신으로 시작한 ‘사랑의 선교회’는 훗날 130개국으로 뻗어나간다. 아그네스의 또 다른 이름은 테레사. 즉 빈자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 수녀다.


평생의 공로를 인정받은 테레사 수녀는 노벨 평화상(1979년), 인도 최고의 시민 훈장 ‘바라트 라트마(1980년)’, 영국 명예 훈장인 ‘메리트(1983년)’ 훈장을 수여받았다. 노벨 평화상도 영예롭지만, 이방인이 인도에서 인도인에게 인정받는 건 무엇보다 큰 명예가 아닐 수 없다. 그녀가 콜카타에서 선종하자 인도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아그네스는 가톨릭 성녀의 반열에 오른다. 분야를 떠나 인도로 떠난 무수한 사람들 중에 인도에서 무언가를 얻으려 한 경우는 많아도 평생을 주고 베푼 사람은 드물다. 그녀의 생애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좌로부터) 가족과 함께 한 아그네스, 수녀가 되기 전의 모습, 아일랜드에서 수녀 생활을 시작한 테레사 수녀


숱한 찬사 뒤엔 비판적인 시각도 뒤따르기 마련이다. 테레사 수녀의 저격수는 크리스토퍼 히친스(1949-2011년)였다. 반종교 주의자였던 그는 저서 <자비를 팔다>에서 교회의 정치화, 선전 도구화에 대해 비판했는데, 그 주장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의 구호 시설은 구호와 치료가 아닌 병자를 한 데 모아 격리한 데 불과하고, 비전문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운영(진단 소홀, 물자 부족, 기부금 사용의 불투명함 등)으로 빈민 구호보다 선교 사업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지적했다.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 개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 게 아닌, 우상화로 그 이면의 진실을 보지 못함을 꼬집으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그녀가 ‘부자들의 성녀’라는 비판도 있다. 구조적 모순과 가난을 풀어야 할 사회 문제로 보지 않고 하늘의 뜻이라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 “가난은 아름답다”란 말은 곧 가난을 순순히 받아들이라는 뜻이고, 이는 부자와 기득권의 관점에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해주기에 부자들이 그녀를 선호한다는 주장이다. 후원금 모금을 위해 유명인과 정치인과 어울렸고, 특히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 등 문제적 인물들과 함께한 사진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다만 비판 속에 잊지 말아야 할 건, 그녀의 헌신이다. 비판은 눈길을 끌고, 비난이 있다면 직면할 일이다. 다만 필요 이상으로 비틀어 볼 이유는 없다. 전문성, 체계, 논리… 좋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가 머문 곳은 인도의 빈민가였다. 현장을 알아야 비판의 논리도 무게가 실리는데, 인도에서 일을 하면 때로 원칙에서 벗어나 융통성을 발휘하고, 그것을 원칙대로 환산하면 의혹이 잇따른다. 현장을 엿보면 이해할 일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 사명을 다하려던 수녀의 이미지도 의도치 않게 쓰일  수 있다. 부주의했거나 불가피했거나… 몇몇 논란은 결국 인도식으로 말하면 업(카르마)이다. 그녀에겐 무엇이 가장 중요했을까? 평생을 헌신한 그녀의 업보란 이미 당사자인 인도인들이 인정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좌), 마더 테레사 수녀의 장례식(우)


비판이 아닌 아쉬움은 있다. 테레사 수녀의 세계적 명성으로 인도는 영원한 빈국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아픔과 부조리가 있으나 인도는 어두운 면만 가진 곳은 아니다(세상의 다른 곳만큼 가졌다). 하지만 수녀의 사진엔 항상 죽어가는 사람들, 찢어지게 가난한 모습만 나온다. 그렇게 기부를 재촉하는 이미지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또 다른 인도의 모습을 간과하게 만들고, 긍정의 인도까지 동정의 담요 아래 덮는다. 세세히 살피기 전에 본능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지 않는가? 식민지 시대를 거친 동시대 다른 곳이라고 인도보다 딱히 사정이 낫진 않았다. 다만 크고 많고 다양한 인도의 변화는 더뎠다. 13억의 행복으로 가는 길은 아직 머나먼 도정에 있다. 대신 긍정적인 면이 많고 잠재력도 큰 곳이다.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지녔고, 국민은 국가를 사랑하며 자부심을 느낀다. 그 아픔과 부조리라면 인도인들이 더 잘 안다. 누군가의 관심과 헌신에 감사하지만, 크나큰 호의가 때론 극복하기 어려울 빚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이제 더 나은 미래로 향하며 가난한 곳, 도움받아야 할 이미지를 벗는 건 결국 인도의 앞날에 주어진 숙제가 될 것이다. 시간이 걸릴 일이다.


감사할 뿐 헌신을 탓할 순 없다. 다만 인도에 대한 이미지의 균형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어두운 게 관심을 끌지만 그것만으로 공정한 시선을 기대하긴 어렵다. 예를 들어, 부유층의 결혼식을 두고도 빈민의 박탈감을 느끼게 만드는 낭비며 사치라고 꼬집는데, 그 결혼식이 결국 주변의 일거리를 창출한다는 건 고려하지 않는다. 미담보다 자극적인 사건사고에 기댈 만큼 절박한 시대지만, 그것이 독재자가 수녀의 이미지를 악용한 것과 무엇이 다를지 생각해볼 일이다. 관심 있는 척 일회성으로 소비된 인도에서 가치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없고, 그것이 유일한 판단 근거일 경우 뻔한 편견을 부를 뿐이다(반대로 신비한 이미지도 인도에 공정할 리 없다). 무엇보다 그 편견을 접한 인도인들 또한 편견을 가질 수 있다. 이미 모두가 미디어고, 모두가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다. 타인 앞에 떳떳하려면, 먼저 스스로 균형감을 가지고 타인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 (사진가 매리 앨런 마크 Mary Ellen Mark의 작품)


이미지를 논하자면 테레사 수녀는 훌륭한 수완을 가진 인물이었다. 가령 흰색의 사리를 유니폼으로 삼은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관례와 방식을 고수하지 않으며, 가장 대중적이고 정결한 색상의 전통 의상으로 이질감 없이 인도 사회에 스며들 줄 알았다. 흡사 브라만을 자처하며 그들의 의상을 입고 선교 활동을 벌인 이탈리아의 선교사 로베르트 드노빌리(1577-1656년)가 다시금 떠오르는 대목이다. 또한 그녀는 뛰어난 연설가로 이슈를 만들 줄 알았다. 독재자와의 사진으로 비판도 받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사진에 찍힐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생전 테레사 수녀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매리 앨런 마크(1940-2015년)는 그녀가 카메라 앞에서 제대로 포즈를 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평생의 과업으로 몸에 밴 습관처럼 주목을 받을 줄 알았고 홍보에도 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모습은 만들어진 이미지일까? 이에 대해 인도로 떠난 테레사 수녀는 다른 곳이 아닌 인도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말로 답을 대신해야 할 것이다. 사진 속에 남은 키 150센티미터의 거대한 여인은 그곳에 존재한 자체가 삶의 목적과 의도라고 말하는 듯하다.


인도로 떠난, 인도를 사랑한 여인들… 부드럽지만 강렬한 자취를 남겼다.   

이전 10화 신비한 인도 만들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