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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Jan 14. 2019

제국을 향한 꿈은 이루어진다

무굴 삼대

인도 역사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이슬람은 점차 그 절정기에 접어들어 제국 건설의 꿈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그 꿈은 무굴 제국 시대에 이르러 만개할 것이다. 다만 제국의 건설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어 꿈꾸는 자 많아도 그 열쇠를 얻는 자 하나뿐이니, 무릇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우여곡절은 피할 수 없다.


이름 그대로 ‘호랑이’를 뜻하는 바부르(1483-1530년)는 티무르의 5대 손(부계)이자 칭기즈칸(모계)의 혈통으로 일찍이 십 대 시절 족장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젊어서 부족 간 암투와 내전 속에 변방으로 밀려나 야인으로 떠돌아다녀야만 했고, 한 맺힌 그는 일생의 과업으로 사마르칸트를 수복하고 정복 사업을 펼쳐 선대(티무르와 칭기즈칸)의 영광을 재현할 것을 다짐한다.


원대한 야망을 품었지만 의지만큼 일이 잘 풀리진 않았다. 그는 1504년부터 1510년 사이 사마르칸트 수복에 얽매이지만 일진일퇴 속에 오히려 근거지를 잃는 등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머문다. “이것이 내 한계일까?” 익히 두 얼굴의 술탄 세계에서 언급했듯 필요한 만큼 얻어서 나누지 못하면 실각될 위기에 처한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한 순간, 그는 인도로 관심을 돌린다. 인도의 풍요는 익히 들어온 터, 영광의 재현 아니 자신의 생존과 부족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만 했다. 마침 당시 인도의 델리 술탄조는 쇠락해 가고 있었다. 힘을 추스른 바부르는 인도로 향한다. 마지막 승부다.


바부르의 거병과 진군


하지만 인도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블루오션이라며 모두가 몰려드니 곧 레드오션이었고, 그 치열한 경쟁 속에 버텨온 박힌 돌은 낡고 쇠락했다고는 하나 빼내긴 쉽지 않았다. 끈질긴 저항 속에 번번이 가로막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바부르는 네 번의 시도 만에야 오늘날 파키스탄 라호르 일대를 겨우 점령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못해 때마침 본거지에서 발생한 내란에 눈물을 머금고 철수해야 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럼에도 그는 인도를 향한 집념을 발휘하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기회가 찾아오듯 그는 마침내 델리의 술탄 이브라힘과 일전을 겨루게 된다. 그 역시 인도에 터를 잡기 위해선 일단 기존의 이슬람 세력(델리 술탄조)부터 밀어내야 했다.


바부르는 델리로 향하던 길에 이브라힘의 세력 하에 있던 펀잡의 다울라트 칸 로디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상대의 전력을 파악한 그는 수적으론 열세지만 승산이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자신감을 얻는 그는 승부를 가를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다. 1525년 11월, 고작 만 명이 좀 넘는 병력을 움직인 그는 아들 후마윤과 함께 인더스 강을 건넜고, 이듬해 4월 델리 인근의 평원에서 천 마리의 코끼리를 위시해 십만 병력을 집결시킨 이브라힘과 대치한다. 이것이 파니파트 전투다.


이브라힘 로디 치하의 델리 술탄조(좌), 바부르의 인도 진출과 무굴 제국의 흥망성쇠(우)


그러나 전투는 의외로 매우 싱겁게 끝난다. 병력은 적지만 대포와 화승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바부르 군의 포성에 겁먹은 이브라힘의 코끼리와 병사는 사분오열 흩어지고, 그 순간을 포착한 바부르는 궁사와 기마병을 움직여 혼란에 빠진 이브라힘 군을 일거에 격퇴시킨다. 이브라힘의 군대는 충성도 또한 낮아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가한 군대는 바부르 군 보다도 적었다. 결국 전투의 승패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결정 나고, 이브라힘은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대군을 잃고 전사한다. 압도적인 병력을 활용한 장기전을 택하는 등 적절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다면 이브라힘에게도 승산이 있었지만, 자만하다가 상대의 기민한 전략에 우왕좌왕하며 자멸했다.


이브라힘을 꺾은 바부르는 죽은 적장에 대한 예를 갖춘다. 이는 그의 그릇과 야망을 보여주는 영민한 처신이었는데, 이로써 그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이브라힘의 세력을 흡수한 것이다. 정복지의 백성 또한 그의 새로운 백성이자 군대이므로, 떠나지 않고 다스리며 더욱 뻗어나갈 작정이라면 널리 수렴하고 포용해야 했다. 비로소 거점을 마련한 바부르는 아그라를 수도로 무굴을 건국(1526년)한다. 무굴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을 뜻하고, 기나긴 격전지였던 중앙아시아를 떠나 인도로 향한 바부르 군도 투르크와 몽골의 혼혈로 외양과 체격은 투르크에 더 가까웠다.


한편, 인도의 힌두 세력은 이 과정에서 바부르에게 협조적이었다. 가령 힌두 라지푸트인 라나 상가의 경우 은근 기대하길, 눈에 가시였던 기존의 이슬람 세력을 축출함과 동시에 바부르 역시 선대와 마찬가지로 약탈 후 무더운 날씨를 피해 본거지로 돌아갈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인도는 다시 힌두가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바부르의 생각은 달랐다. 가난한 중앙아시아보다 무더워도 풍요로운 인도에서 버텨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계속 인도에 머물렀고, 더 큰 야망을 꿈꿨다. 라나 상가를 비롯한 힌두 세력들은 그제야 돌아가는 판세를 제대로 깨닫는다.


파니파트 전투(좌), 칸와 전투(중),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은 라나 상가(우)


1527년, 이제 적대 관계로 변한 바부르와 라나 상가가 자웅을 겨룬다. 라나 상가는 백번이 넘는 무수한 실전 경험을 가진 역전의 용사이자 힌두 라지푸트의 영웅으로 바부르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라나 상가는 선봉의 코끼리 부대 등 8만의 대군을 결집한다. 힘을 결집해야 했던 바부르는 역사의 가르침에 따른다. 이슬람 성전을 기치로 내걸고 추종자들에게 그 대가로 부와 명예를 보장하며 지지와 충성을 이끌어낸다. 물론 그 실익은 전리품과 노예 등 노획할 재산의 배분으로 계산될 것이다.


바부르는 칸와 전투(1527년)와 찬데리 전투(1528년)에서 연달아 라나 상가를 격파한다. 결정적인 승전이었다. 라나 상가는 과연 용맹했지만 바부르 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전투에서 라나 상가는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는 중상을 입고 만다. 바부르와 라나 상가의 격전엔 또 다른 평가가 뒤따른다. 힌두 세력들은 서로 경쟁이 치열했던 나머지 라나 상가의 분투를 남의 집 불 보듯 하며 서로 연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같은 종교라도 당시엔 서로 남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바부르는 술탄 이브라힘에 이어 힌두의 터줏대감까지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바부르는 약속대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재물을 나눠 두둑하게 포상했다. 이는 고스란히 충성심으로 돌아왔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제국의 기틀을 다진다. 이것이 곧 무굴 제국의 시조 자히르 알딘 무함마드 바부르의 성공 스토리다. 하지만 투르크와 몽골의 혼혈 호랑이도 제국의 이상을 제시했을 뿐, 그 제국을 완성시키진 못한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오래 누리지 못한 채 마흔일곱의 나이에 사망한다. 인도에 뿌리내린 지 겨우 4년 만이었다. 오히려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맸던 건 아들 후마윤이었지만, 바부르는 아들 대신 차라리 자신을 데려가라며 알라신에게 빌었다. 걱정이 너무 깊었는지 죽음의 그늘이 갑작스레 그를 에워싸 아들이 기적적으로 회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숨을 거둔다. 타향살이 또한 어려웠다. 무덥고 이교도 가득한 땅에 터를 잡고 보니 고향을 향한 향수를 떨치기 어려웠다. 고향의 나무를 공수해 아름다운 이슬람 정원을 만든 것 또한 향수병의 산물이었다. 향수병 일지, 풍토병 일지... 죽어서 그의 시신은 카불로 돌려보내 진다.


이어 아들 후마윤(1508-1556년)이 무굴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하지만 제국의 길은 순탄치 못해, 권력을 둘러싼 내분에 흔들리며 무굴은 와해될 위기에 처한다. 바부르의 때 이른 죽음으로 후계와 정권의 기반을 확실히 다지지 못한 탓이다. 만약 이대로 제국으로 향한 길에서 이탈했다면, 바부르 또한 무굴 제국의 시조가 아닌 인도로 떠난 여러 술탄 가운데 하나로 언급해야 했을 것이다.


아크바르 대(붉은색)와 아우랑제브 대 최절정에 이른 무굴 제국 영토 (푸른색)


이때 후마윤은 축출되어 아그라를 내주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어렵사리 아그라를 수복한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나갔는데, 큰 위기를 버텨낸 덕분에 후마윤은 수성의 대가로 불린다. 하지만 그마저도 명맥을 이어나갔을 뿐 그 길 끝에 비칠 찬란한 빛까진 보지 못했다. 아버지를 종군하고 그 꿈을 지켜낸 수성의 대가는 도서관 계단에서 낙상해 사망하는 비운을 맞는다. 그리하여 무굴의 운명은 손자 아크바르(1542-1605년)에게 넘어간다. 아크바르 대에 무굴은 인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산업이 발전하며 무역 또한 증가한다. 그렇게 번영한 무굴은 제국의 꿈을 이룬다. ‘무굴 삼대‘란 표현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삼대에 망하지만, 무굴 제국은 삼대에 걸쳐 이룩된다. 무굴의 영토는 이후 6대 황제인 아우랑제브(1658-1707년)에 남인도까지 확대되어 그 절정에 이른다.


호시탐탐 대권을 노린 세력이 많았으니, 시작했다고 위대해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후대의 성공으로 선대의 업적은 지워지지 않고 더욱 빛났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겠다. 물론 첫 수를 두지 않으면 다음 수도 없다. 시조의 업적은 길이 기억되고, 그것이 바부르가 남긴 뚜렷한 족적일 것이다. 불확실성 속에 인도로 향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후대를 위한 새로운 길을 열었고, 그가 미처 다 가보지 못한 길을 자식이 지켰으며, 또 그 후대가 이어받아 마침내 모두가 빛나게 했으니, 삼대에 걸친 성공엔 절묘한 역할과 조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세대 간의 불화란 혹 잘못된 미래에 대한 경고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단, 인도의 입장에서 무굴 삼대는 힌두와 이슬람, 치욕과 영광이 교차하는 시대를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무굴 제국의 주역들


책을 읽는 바부르(좌), 델리의 뿌라나 낄라(중), 샤자한이 지은 왕비의 무덤 타지마할(우)


한편 바부르는 많은 피를 흘린 만큼 예술에도 일가견 있는 인물이었다. 일찍이 술과 노래, 그리고 여인을 사랑했고, 피 비린내 진동하는 전투가 끝나면 아름다운 정원과 건축물을 세웠다. 문재도 넘쳐 자서전인 <바부르 나마>를 남기기도 했는데, 자손들은 그 피를 이어받아 중간에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6대에 걸쳐 번성하며 많은 유산을 남겼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말은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인데 마치 그럴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오늘날 인도에서 만나는 무굴의 유산이란 바로 그 흔적일 듯하다.


그런 소리를 자주 들었다. “넌 아비를 똑 닮았구나.” 무굴의 유적들을 보며 그런 기억을 떠올린다. 피와 예술을 사랑한 양면성. 무굴 제국 전성기의 황제로 아크바르의 손자인 샤자한은 사별한 왕비를 못 잊어 세상 가장 아름답고 특별한 무덤의 축조를 지시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여인과 예술을 사랑하며 인도의 모든 자원과 숱한 백성들의 피를 바친 결과물로 그 건축물의 이름이 곧 타지마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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