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혹은 약탈자?
어느 노회한 왕이 숨을 거두려 한다. 천하를 호령하던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지만, 세월의 공과마저 숨길 순 없듯 불안하게 일렁인다. 왕국을 위해 평생을 분투한 그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이름 석 자에 오금 저릴 잔인한 살육자였다. 지나온 세월을 아로새기며 만감이 교차하던 눈빛은 마지막으로 세차게 떨리더니... 이내 감긴다. 왕이시여! 최후의 순간, 당신은 스스로의 인생을 어찌 돌아보셨습니까? 그러니까 ‘오프 더 레코드’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한 가즈니의 술탄 마흐무드(971-1030년)는 인도에 눈독을 들인다. 인도는 비옥했고 재물은 넘쳤다. 다만 그곳을 차지하더라도 타향에 머물며 주둔하는 건 꼬리가 길어 위험했다. 반면 황량한 벌판을 내달려온 그의 기병은 전투에 단련되었고 기동력이 뛰어났다. 마침 당시 인도의 힌두 왕국들은 서로 경쟁하며 세력이 분산되어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마흐무드는 바로 이점에 주목했다. 차지했다고 꼭 머물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치고 달리기. 때마다 기습적인 침략을 감행했고, 무방비 상태의 인도 이곳저곳을 쇼핑몰 회전문 드나들듯 맘껏 넘나들었다. 그리고 얻을 만큼 얻으면, 미련 없이 기수를 돌렸다. “오늘만 날이가?”
가즈니의 마흐무드는 이내 북인도 일대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특출난 능력을 과시한 장군인 그는 이슬람 세계에선 신들린 정복의 화신이었지만, 인도에선 약탈자였다. 재물의 약탈과 방화 그리고 학살을 자행했으며 무수한 인도인을 노예로 데려갔다. 그는 점차 남쪽으로 침략 범위를 넓혀 파탈라푸트라, 마투라, 타네사와라, 솜나트 등에 이르는데, 주로 사원이 있는 도시를 목표로 삼았다. 그중 솜나트의 사원은 오랜 시간 많은 봉납품이 축적된 곳으로 그는 그곳의 재물을 약탈한 뒤 사원을 모조리 파괴했으며, 신의 마지막 자비를 바라며 그곳에 모인 수만 명의 인도인들을 몰살했다. 마흐무드는 사망하기까지 열일곱 차례에 걸쳐 인도를 침략했는데, 그를 저지할 수 있었던 건 그중 단 한 번 카슈미르에서 뿐이었다. 힌두교인이라면 모두 치를 떨며 그를 증오할 만하다.
반면 이슬람 세계에서 마흐무드는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혁혁한 전공을 세워 카스피 해에서 인도 펀잡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로 얻고, 수많은 재물을 노획했으며, 인도에 이슬람을 전파한 희대의 인물이다. 페르시아의 귀족 출신으로 왕권을 계승할 때만 해도 작은 공국에 불과했던 가즈니를 성장시킨 그는 최초로 바그다드의 칼리파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얻은 이슬람 세계의 군주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영웅이자 이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인도 침략은 그가 세계사에 두각을 나타낸 순간이었다. 나의 영웅이 당신의 영웅, 당신의 악당이 나의 악당인 법 없듯, 보는 시각에 따라 빌런 혹은 히어로라는 상반된 면모를 가진 그는 그야말로 두 얼굴의 술탄이다. 그를 향한 이슬람 세계의 헌사는 오늘날에도 이어져 파키스탄은 인도를 겨냥한 미사일에 가즈니란 이름을 명명했다. 술탄이 들으면 흡족할까 아니면 겨우 미사일이냐며 아쉬워할까, 자랑스러울까 혹은 일말의 죄책감은 없을까?
한편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으나 그 칼끝은 힌두교 등 이교도뿐만 아니라 같은 이슬람교도에게도 향했으니, 종교와 무관하게 그의 행동은 같았을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그의 칼은 딱히 종교의 칼집에서 뻗진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침략은 인도 역사에 하나의 변곡점이 되어 인도-이슬람 시대의 첫 단추를 끼우는 시발점이 된다. 일대의 왕조들이 그에게 굴복한 결과, 라호르는 페르시아와 이슬람 문화 수용의 중심지가 되고, 이후 이슬람의 인도 진출도 본격화된다. 당대 이슬람인들은 인도를 이렇게 묘사했다. “어느 곳에나 금과 보석이 가득하고, 자라는 식물들은 하나 같이 향이 좋으며 옷감으로 쓰기에 적당하다. 사탕수수는 도처에 널렸고 곳곳에 기쁨이 흘러넘친다.” 인도가 풍요로운 곳이기도 했거니와 어지간한 무용담을 보탰으니, 그 소문을 들은 후대의 술탄들도 부러워하며 동경했다. 그리하여 모르면 몰랐지 한 번만 갈 수 없는 곳, 인도를 향한 이슬람의 행렬은 이어졌고, 델리 술탄조(13-16세기)와 무굴 시대(16~19세기)가 열리는 것이다.
가즈니의 마흐무드에 이어 인도로 치고 들어온 건 아프간의 족장 샤하부딘 구르였다. 가즈니를 멸망시킨 장본인인 그는 라호르로 내려와 델리로 향한다. 당시 델리를 지배하던 프리트위 라즈 차우한은 주변 힌두 왕조와 연합해 한차례 그를 격퇴했지만, 이듬해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샤하부딘은 대승을 거두고 프리트위를 처형한다. 이로써 1192년 이슬람은 비로소 인도에 상주할 세력 기반을 만든다. 이후 약 150년 간 이슬람은 인도의 동쪽과 남쪽까지 서서히 세를 확장해나간다.
샤하부딘이 사망하자 그 노예 출신인 꾸뚜브딘 아이바크가 주군을 대신해 스스로 술탄을 자칭하며 델리의 초대 술탄이 된다. 노예라도 출세할 길은 열려 있었고, 그의 이름을 딴 건축물이 바로 델리 위치한 꾸뚜브 미나르다. 그의 후계자 중에도 천출이 있기에 노예 왕조라고 일컫는다. 노예 왕조의 술탄들은 난폭했다. 사랑을 얻지 못할 바엔 망가뜨리는 불순한 구애자처럼 기존의 힌두 건축물을 파괴하고 살상을 일삼았다. 하지만 아니러니하게도 예술을 사랑해 빼앗고 죽이며 허문 자리에 웅장한 건축물들을 세웠다. 인도의 건축가들을 동원해 폐허가 된 힌두 사원을 재료 삼아 이슬람 양식이 가미된 건축물을 지은 것이다. 예술의 의미에선 신선한 자극(힌두-이슬람 건축 양식)이지만, 오늘날 북인도의 이슬람 유적은 파괴 위에 세운 피의 금자탑과 같다. 긴 세월이 흘러 그런 유적들은 또 고스란히 인도의 유산이니 이를 마주할수록 복잡한 감정을 떨치기 어렵다.
이후 인도에 방석을 깔고 앉은 이슬람 세력은 할지, 투글루크 왕조였다. 이들이 델리를 중심으로 북인도를 번갈아 장악하며 델리 술탄조가 열렸다. 그리고 투글루크 왕조가 쇠퇴하자 기회를 노린 것이 티무르(1336-1405)였다. 14세기 말 사마르칸트의 지배권을 잡은 그는 이미 환갑이 넘은 노회 한 술탄이었지만, 여전히 배고팠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인도를 향해 군침을 흘렸다. 익히 인도의 풍요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다. 특히 만선의 꿈을 이루고 돌아온 술탄들을 보며 자신도 빠질 순 없다는 아쉬움을 느껴온 터였다. 문제는 피를 흘릴 명분이었다. 인도 원정을 두고 찬반이 엇갈렸다. 인도는 더운 곳이었고, 부족장들 대부분은 원정을 반대했다.
그렇다고 눈앞의 복권을 긁어보지 않을 순 없다. 티무르는 이미 십 대의 나이부터 자기 확신이 강한 자신만만한 사내였다. 그는 지지를 얻기 위해 목적을 미화하고 수단을 정당화했다. 그 해답은 곧 성전에 있었다.
“그곳은 신앙심 없는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이 사는 곳이다. 우리에겐 알라와 그 선지자 마호메트 명 아래 그들을 정복할 권리가 있다. 내 친히 이교도의 땅을 정화하리라.”
그러자 때마침 그 최측근들이 나서 상상의 보석 속에 뒹굴며 부를 환희의 노래를 속삭였다. 귓전에 닿은 그 노랫말은 설레다 못해 꿀이 뚝뚝 떨어질 듯 달콤했다. 이로써 부족장들도 투자의 배당금을 약조받은 셈이다.
티무르는 마침내 인도로 진군한다. 실은 재물을 얻고 간 김에 겸사겸사 세금도 징수할 생각이면서… 문득 말 돌리지 말고 원하는 걸 이실직고하라던 연인의 일갈도 떠오른다. 물론 당대의 술탄이라면 그건 곧 치세의 비즈니스이자 숙명적 과업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건너온 정복자들은 약탈한 재물을 나눠 나라와 백성을 먹여 살리고, 나아진 살림으로 왕조의 치세와 왕권을 공고히 했다. 잘하면 막대한 세금을 징수해 제국의 자금줄을 마련할 수도 있으니 이번엔 그가 잭팟을 터트릴 기회였다.
다만 실패는 실권(失權)과 직결될 수 있으니 위험부담도 있었다. 인도는 완전 정복이 어려운 곳이고, 정복한들 후사가 고민이었다. 같은 이유로 알렉산더의 정복은 흐지부지 되었고, 역사적으로 인도를 통치한 대제국들의 지배력도 점차 유명무실해진 채 소멸되곤 했다. 심지어 오늘날의 방문자들도 인도 정복이란 표현은 함부로 꺼내지 못할 것이다. 정착하기엔 기후 조건 또한 적당치 못했다. 그런 점에서 소규모의 군대로 수차례 치고 빠진 마흐무드의 전략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가장 악랄한 사례를 따른 것이다.
1398년 본거지를 떠나 인더스 강을 넘은 티무르 군은 델리로 향하며 살인과 파괴 그리고 약탈을 거듭했다. 수십만의 인명이 살상되고 그가 지난 곳은 초토화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에 저항한 힌두 세력은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대부분 명예로운 전사를 택했고, 포로가 되어도 길게 살아남진 못했다. 민간인들도 약탈당한 후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일부 이슬람교도를 제외하면 모두 죽음의 행군 아래 매몰되어갔다. 투글루크 군이 야므나 강을 사이에 두고 티무르 군과 마주하지만, 티무르 군이 포위하자 투글루크의 술탄 마흐무드는 전선에서 이탈해 도주해 버렸다. 알 박고 알 치기… 이교도를 향한 성전이라던 티무르의 명분도 거기서 본색을 드러낸다.
델리를 점령한 티무르는 인도의 황제를 자칭하며 병사가 아닌 코끼리의 대규모 사열식을 가진 뒤 그 코끼리들을 모두 사마르칸트로 보냈다. 코끼리는 살아남아도 델리 시민들은 아니었다. 힌두교인들은 처참히 살육되어 도시의 동서남북 외곽엔 시체로 쌓아 올린 탑이 세워졌다. 보름간의 살육을 끝내고 피비린내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자 티무르는 소개령을 내리고 총독을 임명한 채 그곳을 떠난다. 떠나는 길에 모든 재물을 휩쓸어 갔고, 죽지 않은 자와 아이들은 모두 노예로 삼았다. 그중엔 목수와 건축 장인이 있어 이들의 재주로 훗날 사마르칸트엔 훌륭한 모스크들이 세워진다. 역시 가진 기술이 있으면 그래도 그럭저럭 산다던 부모님의 말씀이 간절히 떠오르는 대목이다.
계속 진군한 티무르 군은 메루트에 이르러 만행을 되풀이했고, 힌두교 성지인 하리드와르에서는 사제와 순례자를 참살해 힌두교의 성스러운 강 갠지스(강가)를 피로 물들이기도 했다. 마침내 이에 항거한 힌두 세력이 연합해 티무르 대군에 대항했는데, 3일간 전투가 지속된 가운데 양측은 무수한 사상자를 냈고, 최측근을 잃는 티무르는 회군을 결정한다. 이미 얻을 것을 다 얻고 더 해봐야 잃을 게 더 많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사마르칸트로 발걸음을 돌렸다. 물론 돌아가는 길에도 끝까지 약탈과 파괴를 일삼으며 인도 땅에 모욕감을 남겼다.
인도인들은 왜 빨리 대응하지 못했냐는 의문도 가진다. 가즈니의 마흐무드 때부터 거듭된 악순환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유는 같다. 지금은 하나의 인도지만, 당시 인도는 힌두와 이슬람의 여러 왕국들이 점재 하던 시기라 집단적 대응이 어려웠다. 넓은 대륙에서 데칸 이남의 남인도를 차지하고 있던 촐라 왕조가 있지만, 그 상황을 인지하진 못했다. 1399년 4월 티무르는 전리품과 함께 금의환향했다. 배고픈 티무르는 35년의 통치 기간 중 상당 시간을 정복에 열을 올렸고, 그의 왕조는 16세기 이르러 지금의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북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이룬다. 물론 인도인에게 공포와 증오의 이름인 티무르는 그 고향에선 위대한 정복자, 전설적인 영웅으로 불린다.
한편 이슬람도 다 같은 핏줄의 이슬람은 아니어서 성전을 명분으로 삼지만, 그 출신과 본거지는 각기 달랐다. 따라서 실제 인도에서 일어난 싸움은 티무르가 그랬듯 꼭 술탄과 라자(힌두 왕국의 왕)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술탄과 술탄 간의 경쟁도 뒤섞인 용쟁호투였다. 즉, 이슬람의 시각에선 야심을 품은 자라면 누구나 칼을 꺼내 들고 인도의 소유권을 주장해볼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무굴 제국의 시조 바부르도 마찬가지였고 이후 무굴 제국이 인도를 평정한다. 그리고 그 계보는 이어져 무굴 제국의 시대가 저물 무렵, 또 다른 이슬람 군주가 인도를 찾는다. 그 이름은 나디르 샤(1688-1747년). 자수성가한 그는 원래 나디르 콜리 베그란 이름의 하인으로 페르시아계 사파이 왕조의 총독 밑에서 일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총독을 구하고 그의 사위가 된다. 이후 출셋길에 올라 장군의 지위에 이른 그는 당시 이란을 점유하던 아프간족을 물리치고,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실지를 회복하는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전장의 판세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보던 그는 기병 활용의 귀재였으며, 특히 천재적인 매복 전술이 전매특허였다. 뛰어난 장군으로 페르시아의 명장이자 영웅으로 부상한 그는 사실 페르시아를 넘어 세계 전사에 널리 회자되는 인물로 페르시아의 나폴레옹이라고도 불린다. 1736년, 그는 어린 왕을 폐하고 스스로를 ‘샤(왕)’로 칭한다.
아프샤르 왕조를 세워 술탄의 자리에 오른 하인은 알렉산더와 티무르에게 영감을 받아 제국 건설의 원대한 꿈을 꾸고, 그 자금을 댈 곳간으로 인도를 주목한다. 1739년 4만의 병력으로 인더스 강을 건넌 그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델리 인근에 이른다. 이에 응전한 무굴 또한 10만의 군대로 델리 인근에 배수의 진을 치는데 이것이 바로 카르날 전투다. 하지만 무굴은 이미 이빨 빠진 사자, 옛 명성이 무색토록 단 시간만에 수만의 사상자를 내며 무릎을 꿇고 만다. 나디르 샤가 최고의 전술을 발휘한 전투는 아니었지만, 병사의 기본적인 전투 능력이 우수했고, 무기(활과 대포)의 사정거리가 월등했다. 승부는 기병을 활용한 측면 격파만으로 쉽게 갈렸다.
델리에 입성한 나디르 샤는 동족인 무굴의 지배자 무하마드 샤를 해치진 않았다. 하지만 계산 관계는 확실했다. 인도의 절대 반지와 같던 보물인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수많은 재물을 전쟁배상금처럼 취했다. 당시 무하마드는 코이누르만큼은 빼앗길 수 없어 터번에 숨겼는데, 이를 짐작한 나디르 샤가 서로 간의 우위를 다진다며 고대 풍습인 터번 교환식을 열어 코이누르를 차지한다. 훗날 마를린 먼로가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친구(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라고 했지만, 그 이전에 술탄의 친구였다고 할 만한 일화다. 물론 이후 영국의 식민 시대가 열리고, 코이누르의 주인은 결국 빅토리아 여왕이 된다.
나디르 샤의 뻔뻔함은 이에 그치지 않아 회군에 앞서 그의 아들과 무굴의 공주를 결혼시켜 사돈관계를 맺는다. 재물을 갈취한 뒤탈이 없도록 볼모로 삼은 것인데, 더불어 강제로 압송한 노예와 장인 수만 해도 수천에 달했다. 이미 모든 걸 얻은 그가 성대한 결혼식까지 올리자, 흉흉해진 델리의 민심은 결국 폭동으로 번진다. 폭동으로 자신의 군대가 피해를 입자 분노한 나디르 샤는 도시 초토화와 민간 학살을 지시하며 델리는 다시 한번 피로 물 든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의 다르바칼란 문 앞은 시체로 가득 차 한동안 ‘피의 문’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가 제2의 티무르로 불린 점도 기억해야 한다.
페르시아로 돌아간 나디르 샤는 흡족한 마음에 페르시아 전역의 세금을 3년간 면제해준다. 이는 성공한 술탄이 하사한 인센티브로 군신 간의 계약과 인기 관리이기도 했다. 덕분에 이후로도 나디르 샤는 한동안 승승장구한다. 다만 그런 권력엔 끝내 바닥이 드러나듯, 면제 기간이 끝나고 다시 세금을 징수하자 이곳저곳에서 불만이 생기며 민심은 떠나고 그를 향한 충성심에도 금이 갔다. 결국 1747년 반란이 일어나 진중에서 쿠르드족에 암살되니 그것이 바로 전설적인 페르시아의 명장 혹은 델리의 대학살자의 최후였다.
인도로 떠난 이슬람의 침략사를 되새기면, 힌두와 이슬람 두 종교 간에 오늘날까지 이어진 갈등의 뿌리도 조금은 이해할 듯하다. 사실 인도는 두 종교뿐 아니라 인종, 종교 등 사회의 구성이 다양한 만큼 그 갈등의 양상 또한 다양한데, 인도를 지배한 외세는 그것을 때에 따라 교묘히 이용하기도 했다(영국 식민 통치 등). 상처가 깊은 만큼 이간질도 쉽다. 그럼에도 인도의 정체성은 그 다양성에 있음을 꿰뚫어 본 사람들은, 분노를 다독이고 증오심을 녹이려 했다. 자와할랄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서 이슬람의 침략을 이렇게 풀이했다.
‘인도를 침략한 이슬람은 주로 아프간인으로 아랍과 페르시아 그리고 서아시아의 교양을 갖춘 이슬람교도는 아니었다(티무르는 투르크 몽골인). 당시 인도는 침략자에 비해 높은 수준의 문명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옛 관습에 사로잡혀 변화와 진보에 더뎠고 전쟁에 대해서도 미비한 상태였다. 완강히 저항했지만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를 침략한 이슬람은 매우 잔인했으나, 그 잔혹성은 반드시 종교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의 피지배인을 두려워해 의기를 꺾기 위한 것이었다. 저항할수록 이슬람 세력은 더 인정사정없는 잔인함으로 응수했다.’
인도의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 지도자로서는 상당히 순화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설령 그런 지론을 가지더라도 국민 다수의 힌두교도 앞에서 꺼내긴 쉽지 않다. 21세기에 이른 오늘도 힌두교에 무게 중심을 둔 지도자는 이보다 훨씬 완강한 태도를 보여준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떠나, 네루는 독립 전후 포용과 화합이 필요한 시대의 지도자였다. 더욱이 <세계사 편력>은 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낸 옥중 편지를 책으로 엮었으니, 부모가 어린 딸에게 복수부터 가르칠 리 없듯, 새 시대를 열어 갈 앞날의 지도자(최초 여성 총리로 두 차례 총리직을 역임)에게 증오는 답이 아니라는 걸 가르치고자 했을 것이다.
과연 인도의 무슬림이란, 별개의 사람들도 아니다. 이슬람교도지만 정확하게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인도 사람들로, 인도의 전통문화를 상당수 계승한 인도-이슬람이다. 인도로 유입된 이슬람은 소수였고, 회유와 억압 속에 흔들린 일부 부동표(계급사회의 하층민 등)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지금에 이른다.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였을 수도 있다. 침략의 역사는 아프고 그들에게 적개심도 느끼지만, 현실은 이렇다. 이슬람은 13억 인구의 인도에서 힌두교에 이어 두 번째 종교고, 인도는 세계 무슬림 인구(16억 명, 세계 인구의 23%) 중 상당수가 거주(1.7억 /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3억 이상)하는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 가운데 하나다. 그들 역시 더불어 살아갈 인도의 일부인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분리 독립을 전후로 숱한 폭동과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테러가 일어났다. 하나의 성지를 두고 서로 점유를 주장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이슬람 유적을 비판하며 타지마할 없는 인도를 이야기한다. 두 종교의 화해를 원했던 간디는 힌두교 급진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네루 또한 유화적인 관점을 보인 까닭에 무종교주의자로 그 가문의 뿌리까지 의혹의 눈길을 받았다. 아버지의 이상을 이어받은 인디라 간디 또한 훗날 또 다른 종교 시크교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결과 자신의 시크교 경호원에게 암살당한다. 그러니 화합으로 향한 길은 두 얼굴의 술탄만큼 이상과 현실 사이의 차이가 크다.
그들은 여전히 분리된 사회를 살아간다. 이슬람 커뮤니티는 따로 존재한다. 여타 종교 간의 갈등도 상존한다. 종교만이 유일한 갈등 요인도 아니다. 언제든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하며 배척할 여지가 있다. 때때로 공존의 가능성을 엿보지만, 화합이 쉬웠던 적은 없다. 누군가는 이것이 인도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하지만, 그건 공론에 불과하다. 그 자체가 인도, 마치 공존의 실험 무대 같은 곳이다. 오늘날 우리도 나날이 편을 가르고 서로를 혐오하며 증오한다. 어쩌면 인도를 통해 그 증오의 끝엔 어떤 아픔이 있는지, 그 해열제란 무엇일지 생각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시대에 인도로 향한 나 역시 인도에 더한 또 하나의 다양성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나'라는 그 이방인도 인도에서 부담과 압박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제력을 잃고 분노를 표출한 적 없던가? 혹 어떤 이해득실에 휘둘린 사이 미처 ‘인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진 않았던가? 분노는 타인에게 해롭지만, 분노하는 자신에게 더 해로운 것을... 새삼스레 다짐하길, 부디 두 얼굴의 이방인이 되진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