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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Dec 31. 2018

인도로 간 탐험가들

피타고라스의 정리엔 인도가 있다

‘직각 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이 두 직각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 즉,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기원전 5~6세기)는 철학과 수학 외에 정치, 윤리, 음악 등 폭넓은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리라(악기) 또한 그의 발명품이다.


그는 일찍이 수의 조화와 균형을 간파했다. 수(數)는 만물의 본질이자 우주 만물의 구성요소로 수가 있어 일체의 물체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가령 숫자 ‘1’은 모든 수의 근원, ‘2’는 불완전한 수로 증가와 분할의 원인, ‘3’은 ‘시작-중간-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완결하며 ‘4’는 정방형을 표현해 가장 완전하다. 그리고 ‘10’은 이를 포괄(1+2+3+4=10)해 모든 수학적 비율(음악도 마찬가지)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인도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일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정리


이러한 통찰은 곧 우주에 대한 이해로 옮겨간다. 피타고라스는 이로써 우주의 비밀을 설명하려 했다. 수가 ‘1’에서 시작하듯 우주 만물 역시 단일한 ‘신성(神性)’에서 출발하고, 여기서 신과 악마가 각기 비롯된 다음, 인간의 영혼이 나온다고 봤던 것이다. 더불어 인간의 영혼은 불멸로 하나의 육체를 떠나도 또 다른 인간 혹은 동물 속에 환생하며 생사를 거듭하다가 그 영혼이 완전히 정화될 때 비로소 모든 최초의 근원으로 회귀한다고 했으니, 이는 곧 윤회(輪廻) 사상이다. 여기서 피타고라스는 인도와 연결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윤회 사상을 설파(피타고라스학파의 교리)했다. 윤회는 행위의 결과(상과 벌)로 결국 생을 살며 쌓는 업에 달렸으니, 피타고라스는 생명을 난폭히 다루거나 함부로 살생하지 말며 채식을 해야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이는 오늘날 이어지는 인도인의 믿음에 다름없다. 가령 매우 엄격한 금욕을 추구하는 (그래서 소수인) 자이나교를 예로 들면, 그들은 개미도 전생의 혈육 일지 모르니 발로 밟을까봐 항상 빗자루를 지참하고, 날아드는 날벌레조차 삼키지 않으려 마스크를 쓴다. 또한 염료를 쓰지 않은 하얀 마스크와 하얀 의복을 착용하며, 심지어 의복 자체를 거부한다. 이처럼 극적인 예가 아니라도 인도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유사한 믿음을 가진다. 미생물을 비롯한 세상 만물을 정(淨)하고 부정(不淨)한 것으로 나눠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수저처럼 출처 모를 도구를 타인과 함께 쓰기 보단 스스로의 손으로 음식을 취하는 게 더 정결하다고 본다. 채식을 하고 앞뜰에서 잡은 생쥐도 뒷뜰에 놓아준다. 인도의 의식주 문화를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악한 업은 쌓고 싶지 않은데, 피타고라스의 사상 또한 그와 닮았다.


그렇다면 피타고라스와 인도의 직접적인 인연도 궁금해진다. 피타고라스는 그리스 사모스 섬 출신 무역상의 아들로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상단의 행렬에 섞여 여행을 다녔다. 이후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기하학과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신비 사상을 접했는데, 이를 두고 그의 사상은 이집트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지만, 인도와의 접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집트에 머무르던 피타고라스는 그곳을 침공한 페르시아 인들을 따라 동방으로 향했고, 바빌로니아를 거치며 방대한 학문과 지식을 전수받는 한편 인도의 사제(브라만)와 교류했다. 그것이 그와 인도의 접점이다. 이후 고향에 돌아온 그는 크로톤(지금의 이탈리아)으로 건너 가 학자이자 철학가로 이름을 얻으며 ‘피타고라스학파’를 세웠다.


인도와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 정리를 뒤집으면 인도가 보인다


그의 폭넓은 견문은 인도와 맞닿았고, 이로써 윤회로 우주를 설명하려든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유연한 사고도 이해된다. 지금도 유연해져야 인도를 이해하고, 인도로 떠난 사람들은 무릇 좀 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엔 소질 없는 나 역시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아닌 ‘피타고라스의 윤회’에 주목하며 그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다만 이제 그는 다소 신화적인 인물이다. 고향을 떠나 있던 기간만 40여 년에 가깝고, 고국에 돌아와 학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땐 이미 예순이 넘어 수학자의 생애인데 어쩐지 산술이 어긋난다. 마침 그의 고향 사모스 섬도 하늘 높이 솟던 이카루스가 추락했던 곳이라 그의 존재엔 신화적인 오라마저 감돈다.


만약 피타고라스가 너무 멀고, 그와 인도의 관계가 막연한 개념 속에 맴돈다면, 그보다 좀 더 가까운 인물을 만날 차례다. 낯선 세계를 겪고 이해하며 유연해진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이야기들을 전한다.

“저기 있잖아. 인도에 가면 말이지…”

이실직고 모두 사실이지만 그 무용담을 듣다 보면 과장이 좀 심한 듯한데, 인도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가끔 이런 핀잔도 듣는다. "넌 말끝마다 인도냐..." 그런데 듣다 보면 재밌다. 묘하게 빠져드는 것이다. “에이, 저건 구라다!”하면서도 목을 빼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그의 입을 바라본다.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피타고라스의 입증할 수 없는 여정으로부터 긴 세월이 흘러 13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에도 꼭 그런 사람이 살았다. 말만 꺼내면 백만 명이 어쩌고 저쩌고 남발해 ‘백만이(il milione)’라고 불렸는데, 사람들은 그를 허풍쟁이로 여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백만이란 여기저기 갖다 붙이기엔 너무 과한 숫자였다. 백만 인구의 도시나 백만의 군대… 다만 중국의 표현 방식에 따르면, 숫자 뒤에 공 한두 개쯤 더 붙이는 건 구라가 아닌 일종의 강조법이다. 좀 재밌게 들으라는 선의의 구라. 백만이 또한 중국을 다녀왔다는 점에서 스타일의 근원은 짐작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야기꾼이라면, 위아래 끝점도 살짝 늘릴 줄 알아야 할지 모른다.


인도에 입항하는 마르코 폴로


보석상인 백만이의 아버지와 숙부가 먼저 중국으로 향했다. 인도 해안을 경유한 기나긴 여정 끝에 중국에 당도했는데, 당시 중국은 몽골 지배의 원나라로 그곳에서 쿠빌라이 칸을 알현한 형제는 환대를 받고 교황에게 전할 친서까지 얻는다. 거기엔 기독교 사제 백 명의 파견해달란 내용이 담겨있었는데, 친서를 쥔 형제는 9년 만에 고향인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돌아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를 알현한다. 이에 교황의 명을 받아 (백 명의 현자 대신) 주교 임명권을 가진 수사 두 명을 데리고 재차 중국으로 향하기에 이른다.


이때 당시 열일곱 살이던 백만이가 동행한다(1272년). 비단길을 따라간 험난한 여정 중 수사들은 모두 이탈하고 셋만이 3년 반의 긴 여정을 이어나간 끝에 중국에 도착한다. 쿠빌라이 칸을 알현한 백만이는 이후 17년 간 그곳에 머무르는데, 칸으로부터 제국 내 자유 통행권을 얻어 사절단으로 파견되거나 지방 관료로 봉직하는 등 칸의 임무를 수행하며 견문을 익힌다. 근사한 경험이었지만 한번 칸의 사람이 되니 마음대로 떠나지도 못했다. 역마살이 낀 그도 향수병을 느껴 그만 고향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던 중, 마침 왕녀의 호송임무를 맡게 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베네치아로 향하며 그는 남중국해와 벵갈 만을 거쳐 인도를 경유하는데, 그때 후추의 산지 캘리컷(現 코지코드)을 방문한다. 캘리컷은 이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가 닻을 내린 곳이기도 한데, 11세기 이후 이미 번성한 말라바르의 최대 무역항으로, 풍요로운 인도를 목격한 백만이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보석상의 아들은 당대의 보석인 후추 냄새를 맡고야 말았던 것이다.


후추의 산지 캘리컷에서 인도의 풍요로운 모습을 목격한 마르크 폴로


긴 모험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백만이의 나이는 마흔을 훌쩍 넘어 있었다. 십 대에 떠나 불혹의 나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듬해 동방 무역로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제노바의 포로가 된 되어 1298년 일 년 가까이 제노바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옥중에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사이, 입이 근질근질한 그는 감방 동료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줬는데, 그 이야기는 황당무계했지만 너무나도 흥미진진했다.


그때 마침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첼로가 함께 수감 중이었고, 대박의 냄새를 맡은 그는 백만이가 구술한 모험담을 책으로 엮어 함께 출간하기에 이른다. 프랑스어 초판은 곧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고 세기의 베스트셀러에 등극한다. 인쇄 기술이 개발되기 전 남긴 필사본만 해도 150여 종에 달했고, 이후 다양한 제목과 내용으로 각색되었다. 그것이 곧 마르코 폴로(1254-1324년)의 <동방견문록>이다. 정확하게는 마르코 폴로 자신이 아닌, 동방을 경험한 벗의 신비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지 않을까 안타까웠던 감방 친구가 대필한 여행기다.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의 여정


석방 후 베네치아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결혼해 세 딸을 두었고, 1324년 69세의 일기로 숨을 거둔다. 가족까지도 그 이야기를 신뢰하지 못해 죽음에 이른 그에게 묻는다. “말씀해보세요, 아버지. 다 뻥이죠?” 그러자 그는 그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난 내가 본 것의 절반도 말하지 않았다.” 과연 물에 잠겨도 입만 동동 떠오를 화법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일지는 알 수 없다. 오늘날 영화와 드라마가 그렇듯 재밌기 위한 수많은 각색의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루스티첼로가 서문에서 밝히길, 감옥에서의 한가로운 시간을 요긴하게 쓰고 독자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썼다고 했다. 어쨌든 그 여행기는 서구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영감을 주는데 일조했다. 그건 이븐 바투타(1304-1368년), 오도릭(1265-1331년), 대 상단을 이끌고 간 중국 명나라의 정화(137?-1435년) 보다 앞선 시기였다(정화는 티무르가 지배하던 육로의 비단길을 피해 대선 62척, 장병 2만 8천 명을 이끌고 해로를 통해 캘리컷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를 소개한 신상 이야기에 열광했고, 시선을 점차 동쪽으로 돌렸다. 특히 향신료, 황금과 같은 후추에 주목했다. 누군가는 그런 영감을 얻었다. '어떡하든 직거래를 터서 대박을 노리자.' 불운하게도 이는 결국 그들만의 대항해 시대와 탐욕의 식민주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다. 꽤 오래도록 지속될 동방을 향한 막연한 환상과 함께...


허풍쟁이가 초래한 ‘여행 자유화’라면 지나치지만, 여행기가 재밌으니 더욱 가보고 싶어 진다. 그렇게 노회한 한 명의 여행가가 진실과 함께 잠들 무렵, 또 다른 젊은 여행가가 짐을 꾸린다. 스물두 살의 청년은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향해 순례길을 떠난다. 당시 메카로 향한 길은 성지 순례인 동시에 귄위자가 되기 위한 유학길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기약 없는 긴 여정. 그를 전송하던 가족들의 눈가엔 눈물이 맺힌다. 청년 또한 마음이 찢어진다. “지금 떠나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 다만 청년은 넓은 세상을 두 눈에 새기겠다는 굳은 심지로 발길을 재촉한다. 그가 다시 고향의 땅을 밟은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뒤다.


청년의 이름은 이븐 바투다. 1304년 모로코 명망 높은 법학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기본적인 수학을 마친 1325년 가을,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장정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메카와 메디나를 성지 순례하며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당대 이슬람 국가를 여행했고,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 대륙의 동서를 넘나들며 약 12만 킬로미터를 여행한 뒤 1354년 다시 모로코로 돌아왔다. 당시 술탄의 명에 따라 광범위한 여정을 구술한 것을 정리해 <이븐 바투타 여행기(리흘라)>를 남겼는데, 그 원제는 ‘도시들의 불가사의함과 여행의 경이로움을 생각하는 자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이븐 바투타의 기나긴 여정


그는 여행에서 얻은 광대한 견문을 주제별(음식, 접대, 성, 의복, 수피즘 등)로 정리해 당대의 정치, 종교, 사회, 문화에 관한 자료로 남겼고, 그간 겪은 신비로운 문화적 체험과 숱한 위기를 타개한 흥미로운 일화들로 생생함을 더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오도릭의 <동유기>와 더불어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로,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역시 자신의 저서 <세계사 편력>에서 그를 가장 위대한 여행가의 하나로 꼽았다.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을 따라 메디나와 메카로 향한 그는 습격을 피해 주로 상단과 함께 움직였는데, 최초의 하즈(메카 순례로 이슬람교도의 종교 의무) 이후 세 번의 하즈를 완수할 때까지 페르시아 등 중앙아시아와 스와힐리 해안을 따라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수학을 거듭했다. 이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긴 하즈로 여겨진다. 그러던 그는 인도의 이슬람 왕조에 일거리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델리로 향하는 대상단의 긴 여정에 합류했다. 호기심 가득한 여행의 달인이기도 했거니와 취직을 위해 참으로 머나먼 길을 간 구직자였던 셈이다.


이로써 처음 이슬람 세계 밖으로 나선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중앙아시아 남부의 힌두쿠시 산맥을 넘은 뒤 마침내 인도 델리의 투그루크 왕조에 이르렀다. 당시 가장 부유한 이슬람으로 알려져 있던 술탄 무함마드 븐 투그루크를 알현한 그는, 메카에서 수학한 경력을 인정받아 카디(판관)로 임명되었는데, 이븐 바투타는 그로부터 약 8년간(1334~1341년) 델리 등에 머물며 공직을 수행했다.


인도로 가 무함마드 븐 투그루크를 알현하고 판관으로 취직한 이븐 바투타


그 무렵 이븐 바투타는 오늘날 파키스탄에 속하는 갠지스 강 하류의 신드 지역과 북인도 하르야나 주에 위치한 라지푸트(힌두교) 왕국 사르사티도 방문했다. 당시 몽골의 침입 여파가 있던 델리보다 더 풍요로운 사르사티를 보고 감탄한 그는 여행기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구가 많은 대도시인 이곳은 강건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도시는 강력한 이교도 왕이었던 타라가 건설하였다고 한다.”는 감상을 남겼다.


한편, 십 년이 고비라고 이븐 바투타의 인도 직장 생활은 점차 꼬여갔다. 그를 시기한 사람들로 인해 당시 왕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얽힌 그는 술탄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변덕이 심한 술탄은 처음 맞이했을 때와 달리 그에게 기묘한 눈길을 보냈고, 소요와 정치 불안 속에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는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타지에서 겪는 고독한 사투만큼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도 컸는데, 당시 인도의 술탄국은 전통의 이슬람국과 달라 본산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해 판관으로서 온전한 이슬람 율법을 적용하기 힘들었다.


기회를 틈탄 그는 술탄의 의심을 사지 않고 떠나기 위해 하즈를 허락받으려 한다. 그런데 술탄은 교묘하게도 고향에서 더 먼 중국으로 떠나는 사절단에 그를 합류시킨다. 인재가 떠난다니 또 아쉬운 것이다. 하지만 그 여정은 순탄치 못했다. 델리를 떠나 인도 서해안을 따라 남인도로 이동하던 사절단은 도적떼의 습격을 받고, 이븐 바투타도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구자라트 주 캄바트로 피신한 뒤 캘리컷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여정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는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한다. 당대 탐험가의 자존심도 있고 감히 술탄에게 실패를 알릴 수 없던 그는 남인도에 머무르며 재도전하지만, 몰디브에서 또다시 발이 묶이고 스리랑카에서는 해적의 습격을 받는 등 계속된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후 치타공(방글라데시)을 거쳐 수마트라(인도네시아)에서 중국 상선에 오른 뒤 말라카, 베트남, 필리핀을 거쳐서야 겨우 중국에 이르며 자존심을 지키는데, 그는 광저우를 거쳐 항저우의 서호를 본 뒤 대운하를 통해 베이징으로 가 원나라 혜종을 알현하고, 만리장성을 방문한 뒤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푸저우를 거쳐 귀향길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여정은 여러 가지 모순 속에 논란거리로 남아있는데, 특히 그가 중국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취안저우(자이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명이다. 그밖에도 그의 여정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지 않는 한 시간상 설명이 어려운 부분도 몇몇 있다.


아무튼 그가 이후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귀로에 접어든 건 분명하다. 다시 인도에 이른 그는 델리가 아닌 메카로 방향타를 돌린다. 해로를 통해 바스라로 향한 그는 그곳에서 부친이 이미 15년 전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결국 살아서 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만 고향 모로코로 돌아가기로 한다. 마침 흑사병이 창궐해 또다시 메카로 향하는 건 무리였다. 그럼에도 그건 일말의 아쉬움이나 의문을 품지 않을, 할 만큼 하고 겪을 만큼 겪은 여정의 마침표였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역시 그 자신이 아닌 대필의 손길로 다듬어졌다. 1356년경 그는 시인이자 학자인 이븐 주자이에게 여행담을 들려줬고, 당시 모로코를 통치하던 술탄 아부 이난 파리스는 이븐 주자이를 공동 필자로 임명해 유용한 이야기를 독자의 기호에 맞게 각색하도록 했다. 이븐 주자이의 문체는 <동방견문록>의 루스티첼로보다 거창하고 그 분량도 훨씬 방대하다.


(좌로 부터) 마르코 폴로와 루스티첼로, 이븐 바투타와 이븐 주자이


그러고 보면 비슷한 시대 활동한 두 쌍의 여행가와 작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형태의 콜라보(협업)를 성공시켰다. 여행으로도 벅찬 시대, 견문과 기록이 유별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긴 여행을 훗날 구술하여 기록한 까닭에 세세한 부분은 부정확하다. 오로지 사실만이 중요한 시대일 수도 없었기에 거짓과 허풍을 적당히 더한 낭만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좀 야박할지 모른다. 둘 모두 각색의 힘이 작용했고, 여행의 세세한 진실성이 의심받는 것도 매한가지다.  


다른 점도 있다. 마르코 폴로가 상인의 무용담이라면 이븐 바투타는 순례자와 학자의 해외 취업기다. 우열을 논하기 전에 각기 가치가 달라 최소한 동일한 저울에 올려놓고 보아야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븐 바투타는 멀고 마르코 폴로는 가깝다. 그러면서 이븐 바투타의 시선은 이슬람에 있어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다소 멀게 느껴진다고 하니, 어떤 의미에선 마음이 복잡해진다. 모로코 탐험가도 멀긴 멀지만, 애초 이탈리아 탐험가보다 먼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인도를 멀게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유일 것이다.


한편 <동유기>를 쓴 이탈리아의 사제 오도릭(1265-1331년) 역시 동시대의 인물이다. 1318년 기독교 선교사의 일원으로 베네치아를 출발한 그는 서아시아를 거쳐 1321년 인도로 들어갔고, 이후 동남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러 6년을 머문 후 다시 티베트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1330년 귀국했다. 12년의 여정에도 만족 못한 그는 바로 다시 50명의 수사를 대동해 짐을 꾸리지만, 교황의 허락을 얻으러 가던 길에 병을 얻어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선교사인 동시에 탐험가였던 그는 임종을 앞두고 동방으로 향한 자신의 여정과 그곳에서의 견문을 자세히 구술했고, 이를 한 수사가 기록해 세상에 남긴 것이 <동유기>다.


동방에 관한 기록을 <동유기>로 남긴 오도릭


상인 마르코 폴로, 학자 이븐 바투타, 사제 오도릭까지 탐험가들은 모두 동방으로 향했다. 마치 동방으로 가지 않으면 탐험가 취급도 받지 못한 듯하다. 다만 공교롭게도 셋은 모두 동시대의 인물이고, 십자군 원정, 몽골의 침입의 여파로 동서 간의 교류가 본격화되던 시대를 살았다. 사실 비단길은 이미 존재했고 그들은 이미 개척한 길을 따랐다. 남다른 점이라면 기록한 일이다. 그마저도 탐험가 본인은 가슴에 묻어둔 여정을 누군가 알아보고 낱낱이 문장으로 꺼내 기록한 결과, 그 여행은 비로소 위대해졌다. 이는 분명 일생의 모험만큼 그 기록이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그 기록들은 점차 사람들의 마음속에 욕망과 낭만의 불을 지폈다. 이론을 남긴 피타고라스도 기록을 남겼으면 더 좋았을 일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왕오천축국전>이 있지만... 아직 채워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어떤 이는 순간을 만끽하라며 가만히 눈으로만 기억해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그 대신 가서 보고 만끽한 다음엔 돌아가 꼭 기록하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마침 4대 여행기의 마지막 퍼즐인 <왕오천축국전>까지 더해 세계의 탐험가 중 누구도 인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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