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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Dec 24. 2018

순례길에 오르다

달마가 서쪽으로 향한 까닭

세찬 모래 바람이 일행을 삼켰다. 몸을 한껏 웅크리지만 소용없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고, 두 다리는 매정하게 헛돈다. 이제 운명은 사풍의 자비에 달렸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릴 길이지만, 떠날 때는 낙관했다. 확고한 포부를 가졌고, 어디로 무엇을 위해 가는지도 분명했다. 그러나 이젠 받아들인다. 어쩌면 목적지까지 이르지 못할지 모른다는 것을... 혹 이것이 피안의 경계일까?


생사가 모호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바람이 잦아든다. 노기를 거둔 사막은 무안하리만큼 고요하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끝까지 함께 가자던 일행들은... 메마른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법현은 <불국기>에서 둔황의 모래 언덕을 건너던 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사하(沙河)에는 악령과 뜨거운 바람이 많아 모두 죽고 단 한 명도 그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다. 하늘에는 새도 날지 않고 땅에는 뛰는 짐승도 없다. 멀리 보아도 눈 닿는 데 없고 갈 곳도 알지 못한다. 다만 죽은 자의 해골이 이정표가 될 뿐이다.’


사막을 건너며


외계의 정복자, 침략자... 찾아온 모두를 대륙의 품에 담던 인도는, 스스로 잉태한 찬란한 결정체를 바깥세상에 내보냈다. 힌두교의 땅에서 달리 태어난 불교(기원전 6세기)는 힌두교와 차별화된 사상(만민 평등 등)을 내세워 당시 지배층의 이해에 반했고, 정작 그 발상지에선 점차 쇠퇴하다가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 치세에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하며 한 시대를 풍미(기원전 3세기)했다. 이후 동쪽으로 넓은 인도보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세계의 종교로 자리 잡는데, 아리아인의 원칙, 힌두교의 법을 의미하던 산스크리트어 '다르마'가 곧 불교의 달마... 달마는 동쪽으로 향했다.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달마에 화답한 이들이 달마가 온 서쪽을 바라봤다. 깊은 불심의 길 끝에 인도가 있었고, 그곳을 순례하며 근원을 탐구하려던 구도자는 목숨을 담보한 여정을 감행했다.


가야 할 곳, 찾아야 할 것이 많았다. 아소카 왕은 수십만 명의 피로 물든 칼링가 정벌을 끝으로 불교에 귀의했다. 내치로 눈을 돌려 칼을 거뒀고, 광활한 영토의 경계에 석주를 세우고 불법을 전파하며 그 유산을 정비해 종교로 다스린 것이다. 마우리아는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이니 불교는 인도의 국가 정체성과도 일부 맞닿아 있다. 또한 믿음의 근원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건 가진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인도인들이 숭고하게 여기는 일생의 과업으로, 인도 사람이라면 평생 성지 순례를 꿈꾸고, 직접 가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부탁하며, 죽으면 그곳에서 잠드려 하니 인도는 순례자에게 박하지 않은 곳이다. 하물며 왕족의 신분을 버리고 고행을 자청해 눈을 뜨고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인도에서 존경받는데, 다신교의 나라답게 세상에 재림한 또 하나의 인격신(비슈누의 화신)으로 받든다.


그리하여 웰컴 투 인디아. 일단 살아서 갈 수만 있다면... 비단길(실크로드)을 건너 최초로 인도를 찾은 승려는 중국 동진의 법현(334-420년)이었고, 이어 당나라의 현장(602-664년)과 의정(635-713년)이 뒤를 이었으며, 신라의 혜초(704-787년) 스님이 인도를 찾은 건 8세기경이었다.


서역으로 향하는 현장(삼장법사), 현장 서행도


당시 순례자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에 하나, 육로 아니면 해로였다. 하늘 길로 이어진 지금의 인도 여행도 결코 만만치 않은데, 하물며 그 무렵은 인도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생사를 넘나드는 험로를 거쳐야 했다. 그 여정은 곧 고독한 순례자의 의지와 운을 시험하는 길이었다. 특히 육로의 경우 '죽음의 땅'을 건너야 했는데, 중국 장안(現 서안)이 출발지로 둔황을 거쳐 위먼관 또는 양관으로 나아갔다. 위먼관은 투르판을 거쳐 톈산 산맥을 따라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중앙아시아를 우회하는 길이었고, 양관은 쿤룬 산맥을 따라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을 우회하는 길이었다. 이른바 ‘서역 남북도’다(서역은 중국 서쪽에 있던 여러 나라를 지칭하며 중앙아시아, 인도 등을 포함한다). 타클라마칸은 위구르어로 ‘죽음의 땅’을 의미하는데,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어 순례자들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을 우회해 지난한 구법의 길에 나섰다. 법현과 현장은 육로를 통해 인도로 들어갔고, 혜초 스님은 해로로 떠나 육로로 돌아왔다.


'죽음의 땅'으로 불린 타클라마칸 사막


분명한 목적과 의지 없이 추구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사막의 모래 바람 속에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조금씩 전진하며 그 목적과 의미를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본거지에서 수련하고 학업(본토 유학, 자료 수집 및 번역)에 매진한 뒤 고국으로 돌아가 심화된 지식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살아서 간만큼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3세 때 불가에든 법현은 399년 예순의 나이에 몇몇 승려와 함께 장안을 떠나 인도로 향했다. 처음 4명이었던 일행은 11명으로 늘었다. 법현 일행은 35일 동안 타클라마칸 사막을 헤맨 뒤, 다시 눈보라를 뚫고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그들은 사막의 열기와 산의 냉기를 버티며 생사의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간 뒤에야 402년 인도 서북부의 간다라와 탁실라(現 파키스탄)에 이르는데, 인도에 도착했을 때 남은 일행은 겨우 둘이었다. 인도에 이른 법현은 석가모니의 흔적이 그득한 인도 중부에 8년간 머물며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자료를 입수하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당시 인도는 학문과 예술이 찬란한 발전을 이루던 굽타 시대였고,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불교가 흥성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순례를 거듭한 끝에 스리랑카까지 이른 그는 2년간 그곳에 머무르다가 413년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귀환했다. 떠날 때는 여럿이었지만, 돌아올 땐 그 혼자만이 남았다. 그 기록이 <불국기>로 이후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불교 서적을 번역한 뒤 향년 86세에 입적했다.


한편 현장은 형을 따라 10세 때 낙양의 정토사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했고, 13세에 법명을 얻었다. 경장, 율장, 논장에 모두 능해 삼장이란 명칭을 얻어 현장 삼장, 즉 ‘삼장법사’라 불린 당 초기의 승려다. 법현에게 영감을 받은 그는 627년(또는 629년) 더 깊은 불교 연구로 쌓인 의문을 풀고자 인도로 출발했다. 당시 중국은 당 태종 때로 서쪽으로의 통행을 금지했는데, 일행 없이 홀로 떠난 그는 어렵사리 국경을 통과한 뒤 몸을 숨겨 더 어려운 길을 택했다. 둔황을 지나 고비 사막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북쪽을 건너며 겨우 목숨을 부지한 그는 투르판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환대를 받은 그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던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길을 재촉했고, 쿠차와 사마르칸트 등을 거쳐 마침내 인도에 도착했다.


당시 인도는 불교가 점차 쇠퇴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현장의 의지는 식지 않아 카슈미르와 펀잡 지방에서 몇 해 머문 뒤 이동해 마투라와 마가다 등을 견학하고 날란다의 불교 대학에서 5년간 여러 학문을 수학하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이후 인도 중남부까지 수많은 지역을 순례한 그는 불교 서적 등 수집한 자료를 가득 안고 십여 년 만인 645년 귀국했다. 현장은 여행의 견문록인 <대당서역기>를 당 태종에게 바쳤다. 당 태종이 금지된 여행을 떠난 이유를 묻자 그는 경전의 해석이 생각과 달라 확인하러 갔다고 했고, 그 답변은 황제를 흡족하게 했다. <대당서역기>는 당시 인도 전역을 방문하며 기록한 방대한 자료로 인도 고대사 연구에도 귀중한 사료로 꼽힌다. 또한 이를 모티브로 명나라 때 각색된 소설 <서유기>가 탄생한다. 특히 <서유기>의 손오공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 속 주역으로 용맹과 충의로 람(라마)을 도왔던 하누만(원숭이 신)과 닮았다. 원숭이는 인도에서 흔하고, 하누만은 인도인들에게 사랑받는 신이며 하누만의 신상은 인도 어느 곳에서나 다양한 형태로 접할 수 있다. 귀국 후 입적까지 19년간 경전의 번역에 매진한 현장은 경전 번역의 수준에 한 획을 그어 그가 번역한 전후를 구역과 신역으로 나누었다.


인도의 손오공 하누만 신상과 요새를 지키는 인도 원숭이


이어 법현과 현장의 업적을 흠모한 의정도 37세에 인도로 향했다. 그는 남쪽 경로를 통해 인도에 닿았으며 인도와 동남아에서의 견문을 기록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당나라에 들어가 불도를 배우던 혜초 스님 역시 20대가 되자 바닷길을 통해 인도로 들어갔다. 마가다에서 출발해 불교 순례지 등 인도 전역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쿠차를 마지막으로 순례를 마친 뒤 727년 당나라 장안으로 돌아왔다. 스님은 8년의 여행을 바탕으로 <왕오천축국전>을 썼는데, <왕오천축국전>은 '동서남북중'에 이르는 다섯 천축국에 대한 기록으로 천축국은 곧 당시 인도 일대를 의미했고, 이는 8세기 인도 사회와 풍습을 기록한 귀중한 사료로 남았다.


<왕오천축국전>은 오랜 시간 잠들어 있다가 20세기 초 둔황 천불동(석굴)을 지키던 왕원록으로부터 얻은 판본이 발견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에서도 그렸듯 중국 둔황은 옛 비단길의 관문으로 상인과 순례자 등 수많은 객들이 오갔고, 천불동엔 희귀한 자료가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가 그곳을 지키던 무지한 관료가 헐값으로 팔아넘기며 반출되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오도릭의 <동유기>,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서로, 그중 가장 오래된 <왕오천축국전>은 프랑스인 폴 펠리오의 손에 넘겨져 지금도 또 다른 석굴(프랑스 국립도서관) 속에서 타향살이 중이다.


혜초 스님은 인도 순례 후 경전의 번역에 힘썼고, 787년 중국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했다. 처음엔 스님의 국적 등 생애가 미궁 속에 있었으나 관련 사료의 인용을 통해 그가 신라인이고, 유년기에 당에 들어가 남인도 출신의 밀교승 금강지(671-741년)에게 사사했음이 통설로 여겨진다. 어쩌면 스승의 영향이 그를 인도로 이끌었을지 모른다.


혜초 스님의 순례길


구도의 길에서 돌아온 승려들은 불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종교적 업적 이전에 그들은 이미 그 시대에 목숨을 건 탐험가였고, 한계를 넘은 지적 열망을 보여준 유학생이자 학자이며 소중한 자료를 수집하고 모든 행적을 기록해 후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작가이자 번역가였다. 확실히 그들의 여정은 이후 어지간한 인도 여행조차도 아류로 느껴지게 만든 면이 있다. 물론 21세기의 여정은 다르다. 인도로 향하기 위해 더 이상 걸어서 산과 사막을 건너고 망망대해의 파도 속에 몸을 맡길 필요 없다. 살아서 가고 살아서 돌아온다. 다만 변함없는 건, 큰 뜻을 품고 향해도 그 길이 맞을까 종종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더운 날씨, 창궐하는 모기떼, 끊어지는 전기, 넘치는 하수구... 돌아오지 않는 답,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일, 부득이 포기하고 돌아서는 동무들. 확고한 의지 없이 인도로 가는 길은 가도 간 것이 아니고, 겪어도 겪은 게 아니며, 기다림은 끝이 없을... 살아남을 뿐인 길이다. 아니면, 살아남아도 의미 없이 잊힐 뿐인 길인가? 그건 꼭 달마를 쫓은 순례길이 아니더라도 다르지 않다.


한때 타클라마칸은 끝을 보지 못한 영혼이 남기고 떠난 해골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살아서 가지 못하거나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더 위대했을 여정도 마지막 한 순간의 고비를 넘기지 못한 채 모래바람 속에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다만 실패 또한 그저 무의미한 건 아니어서 사막을 헤매던 외로운 순례자들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부디 끝까지 갈 수 있기를...'

인도로 향하며 마음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헤맬 때마다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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