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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Dec 17. 2018

인도를 통일하다

불가능의 산을 넘은 정복자

어릴 적 나의 꿈은 정복자였다. 그 꿈의 유통 기한은 짧았지만… 알프스 넘어 로마로 진격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특히 동경했다. 한니발 바르카(기원전 247-183년)는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명장으로 ‘전략의 아버지’로 칭송받지만, 그 한 맺힌 최후를 되새기면 인생의 영광 이면에 드리운 무상함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어쩐지 정복자는 끝이 좋지 못하다. 그런 한니발이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꼽은 사람이 알렉산더다. 그는 알렉산더, 피로스에 이어 자신을 세 번째로 꼽았고, 자신이 로마의 스키피오에게 이겼다면 첫째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수스 전쟁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꺾은 알렉산더 대왕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폼페이 '목신의 집' 모자이크 일부)


한니발 보다 백여 년 전 인물인 알렉산더 마그누스(기원전 356-323년)는 고대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26대 왕이다. 어려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사한 그는 부왕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스무 살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고, 부친이 기틀을 다져온 왕국과 강력한 군대를 물려받는다. 장군으로 탁월한 재능과 리더십을 발휘한 그는 짧은 치세 기간의 대부분을 팽창 정책에 집중해 정복을 위한 원정으로 보냈고, 불과 서른의 나이에 그리스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초유의 대제국을 건설한다.


불패의 전략가로 특히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를 무너뜨린(페르시아 제1제국 멸망) 일은 전쟁사에 빛나는 순간으로 꼽히는데, 이를 발판으로 바빌론을 대제국의 수도로 삼은 그는 내친김에 세상의 끝을 보겠다며 진군을 거듭하고, 결국 힌두쿠시 산맥(서아시아에서 인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산맥)을 넘어 인도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허를 찔러 대군을 이끌고 불가능할 것 같던 험준한 산맥을 넘는데, 편안한 길에서 답을 구하지 않는 비범한 면모를 보여준다.


알렉산더의 원정 (우측의 Hydaspis가 곧 히다스페스 전투가 일어난 지점)


인도의 운명은 히다스페스 전투로 판가름 난다. 인도로 진군한 알렉산더 군은 인더스 강의 지류인 히다스페스(젤룸 강)를 사이에 두고 북인도 파우라바 왕조의 포루스 군과 마주한다. 지금껏 알렉산더의 진군도 아주 순조로웠다고 할 순 없었다. 험준한 산맥을 넘은 알렉산더에게 순순히 길을 내주는가 하면, 거친 저항과 마주해 알렉산더 본인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다만 당시 인도는 아직 침입에 맞서 조직적으로 대응할 집단 세력이 없었고, 북인도의 관문에서 만난 포루스야말로 제대로 된 호적수였다. 알렉산더와 포루스는 ‘인도로 가는 길을 내주나 마느냐’를 두고 진검승부를 벌인다.


포루스 군의 전력은 막강했다. 위세 등등한 포루스는 기병 5천과 전차 3백 량, 보병 2만 5천 외에 당대의 탱크라고 할 만한 100마리의 무시무시한 코끼리 부대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알렉산더 또한 기병 5천과 보병 2만 5천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포루스는 히다스페스 강 이남에 대군을 집결시켜 알렉산더 군이 강을 건널 수 없도록 길목을 막아섰다. 도하하는 순간을 노렸던 것이다. 적을 면전에 두고 대부대가 강을 건넌다는 건 자살행위였고, 도하 중에 발각되면 알렉산더 군은 괴멸되어 수장될 가능성이 컸다. 결국 언제 어디서 도하하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었다. 알렉산더는 강을 따라 병력을 분산시키는 기만전술을 펼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사이 기병 2천과 보병의 5천의 병력을 포루스 군 본대 앞에 주둔시켜 마치 주력군이 그대로 머무르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 상류에 집결한 알렉산더의 병력은 누구도 예상 못한 지점에서 기습적인 도하를 감행했다. 승리의 여신이 손짓하듯 때마침 불어 닥친 폭풍우는 포루스 군의 시야를 가렸다. 뒤늦게 움직임을 포착한 포루스는 서둘러 아들에게 기병 2천과 전차 120량을 내주며 측면을 사수토록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포루스의 아들이 도착했을 때 알렉산더 군은 이미 도하를 마친 뒤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포루스의 아들은 알렉산더의 파상공세 속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히다스테스 전투 개요도


측면이 무너진 포루스 본대는 이제 알렉산더의 도하 군에 맞서 방향을 돌린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냉정함을 잃은 포루스는 다소 방만한 전술을 펼친다. 코끼리 부대를 선봉으로 3만의 보병이 넓게 방진을 이루고 그 양 측면에 남은 기병과 전차를 절반씩 나눠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맞선 알렉산더의 도하 군은 흐트러짐이 없다. 대부분의 기병을 포루스의 진영 한쪽에만 집중시켜 공세를 펼치는데, 반으로 나뉜 포루스의 기병과 전차는 힘도 쓰지 못한 채 한쪽 측면을 내주고 만다. 포루스는 급히 남은 기병과 전차를 보내지만, 알렉산더는 기다렸다는 듯 대기하던 기병을 부려 그들을 포위하고 궤멸시킨다.


포루스에겐 아직 코끼리 부대가 남아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전장을 누빈 알렉산더 군은 일찍이 그 상대법을 꿰고 있었다. 코끼리가 아니라 방어가 취약한 몰이꾼을 집중 공략하고, 주인 잃은 코끼리들은 피아식별 없이 전선을 날뛰며 되려 포루스 군에 큰 피해를 입힌다. 신중함, 집중력이 전장의 승부를 판가름 지었다. 이제 마무리를 할 차례다. 강 건너 대기 중이던 알렉산더의 병력마저 도하해 포루스 등 뒤를 에워싼다. 히다스페스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이다. 포루스는 포로가 된다.


엄청난 위압감에도 전장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포루스의 코끼리 부대


사실 인도 이야기를 하면서 알렉산더의 승리를 묘사하는 건 부담스럽다. 입장을 바꿔 인도의 관점에서 보면 알렉산더는 침략자다. 그렇다면 인도의 문화에 기여한 아리아인도 침입자일까? 역사의 어느 순간부터가 인도고, 누가 침입자 혹은 파괴자이며 누가 문화의 전파자이자 기여자일까? 사실 그 모든 역사를 망라한 모습이 지금의 인도라고 보면 누구도 그 해답은 쉽게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히다스페스 전투의 승전으로 북인도에 거점을 확보한 알렉산더가 인도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그것은 그리스와 인도,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우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알렉산더의 원정대는 장기간 전쟁을 치러왔고, 핵심의 정예병을 제외하면 원정 중 충당한 다국적군이었다. 그만큼 그들과의 교류는 그리스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인도에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인도의 정치, 종교, 건축, 예술 등에 상당한 파급 효과를 일으켰다. 또한 알렉산더 원정대는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까닭에 정복 후에는 힘으로 강점하기보다는 포용 정책을 써서 총독을 파견하는 등 자치를 보장했다.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패한 포루스 역시 총독으로 삼았다.


이로써 문화 간의 자연스러운 융합이 가능했고, 다소 정체되어 있던 당시 인도 문화의 새로운 발전 동력이 되었다. 더욱이 알렉산더의 인도 원정에 대항한 인도인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통일 국가에 대한 영감과 비전을 제시했다. 이후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가 탄생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그 시조인 찬드라 굽타(기원전 324-297년)가 알렉산더와 대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알렉산더의 죽음 (Farewell to Alexander the Great, painted by Karl von PIloty, 1886)


한편 알렉산더는 인도의 동남부까지 바라봤다. 하지만 당시 그의 원정도 한계에 이르렀다. 전투에서 패하진 않았지만, 동쪽으로 향하던 알렉산더 군은 또 다른 인도의 대군과 차례로 전투를 치러야 했고, 전쟁에 신물을 느낀 군사들의 동요와 반란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수많은 기적을 발휘한 역전의 용사에게도 더 이상의 인도는 허락되지 않았다. 아쉬움에 탄식하던 알렉산더는 총독에게 점령지를 맡기고 바빌론으로 돌아선다. 세상의 끝을 보겠다던 원대한 꿈은 거기서 일단락된다.


바빌론으로 돌아간 그는 서른둘의 나이에 사망한다. 병을 얻었는지, 암살인지, 객사인지 의견이 분분한데, 정복의 꿈에서 깨어난 정복자는 죽음 앞에 허무하게 정복당한다. 그가 사망하자 인도까지 이른 광대한 제국도 바람에 흩어진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갔는데, 정복의 위업도 일장춘몽과 같았다. 흔히 알렉산더는 위대한 승자 내지 전설적인 영웅처럼 묘사되지만, 과연 승리란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일각에선 알렉산더를 두고 부왕이 쌓은 국력으로 정복에 집착한 자만과 허영 가득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잔인한 전쟁광으로 불과 십여 년 남짓한 통치 기간을 정복전에만 몰두했고, 업적의 깊이를 논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에 생애를 마쳤다. 세계 정복자라고 부르지만 실상 그가 정복한 땅은 세계의 일부며 그마저도 신기루처럼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니, 위대한 장군이긴 하지만 영웅이라고 칭하기엔 무리라는 이견도 있다. 또한 그가 세상의 동과 서를 이었다지만 동서를 연결한 길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해 페르시아는 물론 그리스도 그 길로 왕래했다고 한다. 그가 밟은 인도 땅은 북인도의 일부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도는 그에게 정복된 적 없다. 과연 인도는 알렉산더 원정 전과 후에도 인도일 뿐이다.


다만, 썸과 진한 스킨십은 수위가 달라 썸 아닌 쌈이었던 알렉산더의 원정은 인도 사회에 새로운 자극제였고 그 자극 속에 인도는 또 한 번 진화했다. 알렉산더 입장에서 젊은 나이에 정복에 몰두한 것 또한 정권 내부의 불안을 바깥으로 돌린 것일지 모른다. 영웅을 떠나 짧고 굵었던 정복자의 삶. 덕분에 인도 문화는 한층 더 풍요로워지고, 처음으로 정복과 통일의 개념도 싹튼다. 딱히 인도의 진화를 알렉산더가 의도한 건 아닐 것이므로 그의 위업이라고 과장할 수 없지만, 유의미한 영향을 초래한 건 분명하다.


인도는 끊임없는 외풍 속에 자라온 나무다. 그 모습 그대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 줄 알 수 없이 하나의 나무가 곧 숲을 이룬 반얀 나무와 닮은 것이다. 어떤 모습은 신비롭고 어떤 모습은 기괴하다. 단지 견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끓는 용광로처럼 모든 걸 녹여낸 인도를 두고, 무릇 그 일면을 두고 전체를 논하면 오해하기 쉽다고 말한다. 아리아인에 이어 알렉산더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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