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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Jul 09. 2019

프린스 차밍의 엘보 드롭

마음의 고향

강원 춘천 애니메이션 박물관


줄곧 그 동네에 살았습니다. 

태어난 건 남쪽의 어느 도시인데, 솔직히 그곳이 고향이란 감각은 별로 없습니다. 한동안 방학 때면 부모님을 따라 고향을 찾았지만,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막 의식을 되찾은 공주에게 넌 내 사람이라 해도 믿을 수 없어 찝찝한 느낌이었습니다. 태어난 고향은 낯설고 자라난 곳이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겐 제가 자란 그 동네가 마음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하늘을 찌를 듯 고층 빌딩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지만, 어릴 적 그 동네는 텅 빈 공터였습니다. 지을 듯 짓지 않고 쌓아둔 벽돌들이 가득했고, 비 오면 진흙탕이 되어 무릎까지 빠지곤 했죠. 친구들과 놀다 보면 이왕 빠진 거 허벅지까지 갯벌 체험을 했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현관에서 옷을 벗고 들어오라며 웃으셨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전 소꿉친구와 방치된 벽돌을 쌓아 아지트를 만들었습니다. 아지트가 완성되자 그 속으로 들어가 온종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출출하면 길가로 달려가 달고나를 뽑아 먹었고, 텀블링을 타거나 공사판에 쌓은 모래 언덕을 뛰어내리며 담력을 시험했습니다. 


특히 레슬링이 유행했습니다. 처음엔 서로서로 헐크 호건과 마초맨 랜디 새비지라고 우기다가 그중 한 녀석의 아버지가 실제 프로레슬러인 걸 알자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아들이 당장 아버지의 기술을 구사할 리 없지만, 우린 녀석이 너무 부럽고 자랑스럽고 무서웠습니다(?). 다이빙 엘보 드롭!


당연한 얘길 지 몰라도 동네는 점점 달라졌습니다. 제 마음의 레고 같던 공터와 벽돌은 사라지고, 대신 큰 놀이동산이 들어섰습니다. 놀이동산 가운데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성이 우뚝 섰는데, 그곳은 제게 ‘포상의 성’이 되었습니다. 그 성이 세워진 이후로 시험기간이 끝나면 가끔 어머니께서 다녀오라며 인센티브 아니… 용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침 시험 기간이 끝나면 함께 가자고 조르던 녀석이 있었습니다. 남자끼리 좀 그렇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렇다고 별 다른 가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프린스 차밍’도 아닌데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초대한들 성에 와줄 리 만무했습니다. 게다가 그랬다간 자칫 다이빙 엘보 드롭 감입니다. (배신자라며) 한 녀석은 등 뒤에서 잡고, 다른 녀석이 담벼락 위로 올라가 저를 향해 힘껏 덮칠 것입니다. 가보고는 싶고… 결국 함께 가자고 조르던 녀석과 가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 생애 첫 놀이동산입니다. 그날 우린 온갖 기구를 섭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 중이 중간고사 즈음의 일인 듯한데, 그 친구는 지금 무얼 하고 사는지…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습니다. 

“둘이 간 건 좀 그래도 재밌었어. 그런데 <브로크백 마운틴>은 보기 싫더라.”


강원 춘천 애니메이션 박물관


물론 이렇게 추억에 잠기는 건, 그 또한 영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페이지는 어김없이 다음 장으로 넘어갔고, 제 마음의 고향도 결국 진짜 고향처럼 낯설어지고 말았습니다. 행복한 시절이었고, 난독증인 듯 지난 페이지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같은 학교로 진학해왔던 우린, 고등학교 때부터 뿔뿔이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한동안은 여전히 한 동네에 살았지만, 각자 삶을 쫓는 사이 얼마 후 저도, 저의 헐크 호건과 마초맨들도 하나둘 그곳을 떠났습니다.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건, 자라며 제가 그 동네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같은 사람과 어울리고, 같은 풍경과 길을 지나다녔습니다. 꼭 필요한 일 아니면 그랬고, 그 동네 밖으로 눈 돌리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넓은 도시의 조막만 한 귀퉁일 뿐인데… 호기심이 없었을까요? 나의 세상이란 참으로 좁았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반면 뒤집어 보면 그 동네가 그럴만한 곳이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곳을 떠나고 나서야 그 아늑했던 온기를 떠올립니다. 


그렇다고 돌아가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얼마 전 가보니, 지금 그 동네는 이미 예전과 달리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집니다. 저 역시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방랑벽이 좀 생겼고,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세상으로 향하길 바랍니다. 다만 가끔씩 느끼길, 어쩌면 그 방랑이란 결국 다시 머물기 위한 길일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다시 한번 찾아 머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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