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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Apr 02. 2024

_두고 가야 할 것


  당신은 다시 길에 올랐다. 곧 눈앞으로 거친 산맥이 펼쳐지며 끝없는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내리막길이 간절했지만, 내려가기 위해선 먼저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기리잔의 음료는 효과가 있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지친 다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홀린 듯 걷다 보니 잊고 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당신이 그곳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기 전의 일이었다. 결국 제 발로 떠날 일이었지만 갈등이 좀 있었다. 그즈음 새로 온 부장이 당신을 그곳에서 밀어내려 했던 것이다. 호랑이 같던 부장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당신을 배척했다. 버티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스스로 힘들어질 뿐이었다.

  다만 부장의 생각을 그대로 따를 순 없었다. 당신은 진실했다. 겉으로라도 동조하면 그만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장은 당신과 무관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거기엔 당신의 미래가 없었다. 미래가 없는 곳을 추구할 순 없었다.

  당신은 회의감을 토로하며 부장에게 진심을 말했다. 그러자 돌아온 답은 차가웠다.

  “뭐, 그럼 넌 어딜 가잔 거야? 혹시 그곳? 거길 가면 뭐가 있긴 해?”

  그곳에 관심조차 없던 부장에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당신에게 무관한 곳이라도 어쩌면 그게 부장의 그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그곳이 있다면, 당신은 그걸 탓할 수 없다.

  반면 부장은 그 순간부터 당신을 적으로 돌렸다. 단 한 번 진심을 말했을 뿐이지만,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이후로 당신은 부장에게 성가신 녀석,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부장은 사사건건 당신을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야성이 없다고 했다. 큰일을 하기에 너무 유순하다며, 좀 거칠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심지어 그 얼굴에 칼로 흉터라도 하나 그어 버리면 좋겠다고 했다.

  고작 그 정도로 상처받을 필요 없지만, 틀린 말이 아니니까 비수가 되어 당신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부터 당신은 야성을 보여 줘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야성이라며 본능에 휘둘리고 욕망을 탐하는 사이 화만 늘었다.

  당신은 지쳐갔다. 대리로 진급해서는 누군가의 인생을 대리하는 것 같더니, 과장으로 진급하자 인생이 과장된 것 같았다. 카드빚으로 만든 허세가 언뜻 당신을 빛내주는 것 같았지만, 그건 알이 텅 빈 것이었다. 다 부질없다고 느낀 당신이 주변 사람들을 멀리한 것인지, 화가 많아지자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멀리한 것인지 모르지만, 당신은 고립되었다.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한편 일에서 중요한 건 결국 성과였다. 당신은 별다른 소득 없이 성과의 문턱에서 돌아서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장은 당신에게 그런 선고를 내렸다.

  “다른 부서에서 오라던데 어떻게 할래?”

  말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지 당신을 멀리 내보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부장이 말했다.

  “더 좋은 기회야. 이제 그만 그곳은 잊자고.”

  하지만 그곳을 잊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신은 그만 떠나야할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지만, 이제 와서 다 쓸데없는 기억이었다. 당신은 다시 그곳으로 가고 있고, 부장 또한 부장의 그곳에 다가섰길 바랄 뿐이었다. 당신에게도 그렇지만, 부장에게 당신은 이미 지나간 사람일 것이다. 딱히 기억하며 애틋한 마음을 가질 리가 만무했다. 그런 사람에 관한 기억을 떠올려 본들 부질없는 짓이었다.

  다만 당신은 지금 이 길 위에서 그 기억을 토해내야만 했다. 지나온 나날 당신은 분노하며 수없이 그를 원망해 왔다. 수시로 움틀 대는 그 날것의 감정들에 당신은 매몰되어 버리곤 했다. 어쩌면 그 감정이 다시 그곳으로 향하는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그저 당신의 길을 묵묵히 가면 되는 것이었다. 미련과 괴로움에서의 해방, 지나간 것은 그만 두고 가자고 당신은 다짐했다.

  물론 당신은 그런 기억을 떠올렸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사와 기리잔이 발걸음을 멈출 것만 같았다. 그러면 그만큼 갈 길이 멀어질 뿐이었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어느 순간 모든 걸 멈추고 누군가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말할까봐 두려웠다. 또 다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높고 깊은 산을 넘어가는 당신의 무거운 발걸음을 버티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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